소설리스트

40화 (40/85)

“정소한이 뭐라고 했어요?”

“너도 알고 있었어?”

희윤의 물음에 해승은 고민했다. 아무래도 안효정에게 뭔가 들은 게 있는 듯했다. 거기다 정소한이 할 얘기가 있다고 했었으니 희윤과 해승, 둘 다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을 했을 거다.

“네. 들었어요.”

해승은 알게 된 시점을 모호하게 흐렸다. 덕분에 희윤이 어떤 오해를 하게 되었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랬구나…….”

굳이 희윤은 그 소문이라는 게 뭐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게 뭐가 되었든 해승에게는 그저 이용할 만한 일이 되었다는 게 중요했지.

“형. 걱정하지 말아요. 어차피 그런 거 얼마 가지 않아서 사라질 거니까. 그리고 솔직히 우리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응…….”

대답하는 목소리가 또 가라앉았다. 그런 희윤의 모습에 해승은 다시 불쾌감을 느꼈다. 아까만 해도 차라리 이 기회에 희윤에게 에스퍼고 가이드고 귀찮은 것들이 꼬이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도.

고작 침울해 보이는 희윤 때문에 생각이 금세 바뀐다. 그런 저를 해승은 자각하지 못했다.

“대체 어느 자식이 봤는지 모르겠네. 목격했으면 끝까지 따라와서 확인하든가. 우리가 뭐 호텔에 가서 하룻밤 잔 것도 아니고.”

“아.”

그제야 희윤은 제가 모르던 소문이 호텔과 관련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 순간을 하필 본부의 직원 누군가에게 목격했나 보다.

“그러게.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술 한잔한 것뿐인데.”

다행히 말이 덤덤하게 나갔다. 그와 달리 심장 주변은 뻐근하게 아팠다. 희윤이 더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해승도 눈썹을 찡그렸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 희윤의 말 때문이었다. 순간 뜨끔하고 몸 어딘가를 찔린 듯한 느낌이 왔지만, 끝내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 말 또한 정소한이 할 때 해승은 제 편할 대로 해석했었다. 사귄다는 그런 단순한 관계로 정의할 수 없다고. 고작 그것 때문에 희윤에게 계속 눈길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라고.

에스퍼니 가이드니 하는 정의를 떠나 해승에게 희윤은 그 자체의 의미로 충분하니까.

“난 괜찮으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저를 보지 않은 채 희윤이 말한다. 마치 무언가를 혼자 삭이고 정리하는 것처럼. 그게 뭘까. 희윤은 지금 무얼 속에서 내려놓은 걸까.

해승은 그게 너무도 궁금했다. 그런 나머지 가이딩도 중단해 버리고 얼른 희윤의 어깨를 붙들었다.

하지만 차마 그대로 뒤로 당겨 눈을 뜨게 할 수는 없었다. 희윤이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굳게 다문 걸 봐 버렸기 때문이었다.

“형.”

해승이 드물게 당황해서 희윤을 불렀다. 제가 뭔가 실수한 게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게 아니라면 희윤이 저런 표정을 지을 일이 없지 않은가.

“희윤 형. 나 봐요. 형?”

우는 건 아니다. 표정도 담담하다. 그런데도 무언가 불안감이 찰랑찰랑 차올라 해승의 신경을 건드렸다.

다행스럽게도 희윤은 금방 눈을 떴다. 돌아보는 눈빛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네 말마따나 오해한 거니까. 정 네가 신경 쓰이면 내가 확실하게 말할게.”

희미하게 짓는 웃음. 그게 너무도 씁쓸해 보여서 더더욱 해승의 뇌리에 깊이 박였다.

* *

그날 이후로 희윤이 이상해졌다. 해승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뭐가 달라졌냐고 하면 콕 집을 수는 없는데, 묘하게 저를 피하는 게 느껴졌다.

출근을 같이하는 것도, 퇴근 전에 연락하는 것도, 시간이 맞으면 함께 저녁을 먹고 귀가하는 것도 평소와 같은데.

“음, 내가 보기에는 이거 두 개가 제일 괜찮은 것 같은데……. 야! 표해승!”

스크린에 띄운 여러 사진을 꼼꼼하게 살피던 지부장이 이맛살을 확 구겼다. 아까부터 해승이 영 집중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또 딴생각하지!”

해승이 그 말에 심드렁한 얼굴로 스크린을 봤다.

“괜찮네요.”

말투에도 귀찮음이 잔뜩 묻어났다. 지부장은 속 터진다는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또 왜! 뭐가 문제야. 네가 원하는 대로 광고도 연희윤 에스퍼랑 같이하고, 네 맘에 드는 거로 고르고 있잖아.”

부득불 본인이 원본부터 수정본까지 다 보고 골라야 한다고 해서 프로덕션에 요청해 받은 것이다.

수백은 될 사진을 일일이 보고 확인해서 결정하는 게 얼마나 귀찮고 고된 일인데. 아침부터 저를 붙들어 놓은 주제에 딴 생각이라니.

“맘에 든다니까요. 그거로 해요.”

그런데 정작 저를 괴롭힌 주범이 성의 없이 구니 지부장의 열이 확 뻗쳐 오르는 건 당연했다.

“이럴 거면 그냥 다 맡겨 버리자니까.”

지부장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물론 해승이 그걸 귓등으로 들을 리 만무했다.

“영상은요? 그거도 다 됐어요?”

“오냐. 튼다, 틀어.”

또 제 할 말만 하는 해승을 본 지부장은 손을 휙휙 내저었다. 얼른 영상을 틀라는 지시에 직원도 군말 없이 실행 버튼을 눌렀다.

영상은 따로 촬영한 게 아니고 화보 찍을 때 같이 찍은 자료를 다듬은 거였다. 사실 김 감독은 영상도 따로 촬영하길 원했지만, 해승이 단칼에 거절했다. 이유는 희윤이 피곤하다는 것.

한결같이 제멋대로였다.

영상은 15초. 짧다면 짧지만, 희윤과 해승의 가장 멋진 모습을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괜찮네요.”

하지만 해승에겐 여전히 시원찮은 반응이 돌아왔다. 아니 애초에 저놈에게 긍정적인 말이 나오길 포기해야 한다.

그보다 대체 오늘 내내 왜 저렇게 넋을 빼놓고 있는지 이유를 알아야 했다. 지금도 광고 영상이 끝나고 훤하게 불이 밝혀졌는데도 해승이 조용했다.

이쯤 되면 다 끝났으니 가겠다며 벌떡 일어나 사라져도 모자랄 타이밍인데.

“너 혹시 뭐 고민 있어?”

지부장은 진짜 그럴 리 있겠느냐는 의혹을 담아 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표해승이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자부하지만. 그래도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까.

그런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승이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그렇다는 반응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왜? 설마 연희윤 에스퍼가 너랑 가이딩하는 거 불편하대?”

해승의 시선이 단박에 지부장에게 꽂혔다. 예리한 칼날 같은 눈빛은 에스퍼도 아닌데 묘하게 사람을 긴장하게 한다.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러게, 너 적당히 하랬지.”

“내가 뭘 했다고요.”

“뭘 했긴. 연희윤 에스퍼를 오죽 괴롭혔어? 너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다른 담당 가이드한테 연락 못 하게 한 거. 그뿐만 아니라 아주 연희윤 에스퍼 일거수일투족에 일일이 참견하고.”

지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그 정도 집착이면 누구라도 질릴 거다. 다시 묻자. 너 진짜 왜 그러냐? 정말 연희윤 에스퍼랑 매칭률이 높아서. 그 이유 때문이야?”

아무리 봐도 둘이 하는 짓은 사귀는 사이거나 그 직전 썸 타는 사이로밖에 안 보였다. 물론 지부장은 해승의 마음을 이미 알아챈 상태였다.

해승이 희윤에게 마음이 있는 것. 그런데 정작 본인은 모른다는 것.

문제는 그 상태로 자꾸만 희윤을 제가 통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형이 피해요.”

해승이 툭 말을 뱉었다. 짐작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왜 지부장은 제가 다 심장이 덜컹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 언제부터?”

“음……. 안효정 에스퍼랑 대련한 이후로?”

지부장의 머릿속에 빠르게 그날 일이 떠올랐다. 희윤과 안효정의 대련은 상부에서도 꽤 흥미로운 일로 남았다.

등장했을 때부터 지부장을 비롯한 에스퍼들에게 관심을 끈 희윤이다. 그런 그가 최근에 보이는 행보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둘이 대련하는 모습에는 정말이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담함과 빠른 대처, 예상할 수 없는 능력 사용까지.

“구체적으로 뭐가.”

간부들은 희윤과 해승이 이대로 전담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건 충분히 화제가 될 거고 서울 지부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글쎄요…….”

그럴 때 둘이 삐걱거리는 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니 지부장은 적극적으로 나서 줄 의향이 있었다.

문제는 해승도 이거 다 콕 짚이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희윤 형 말이에요. 분명 같이 있는데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해승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지부장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대꾸했다.

“네가 뭐 잘못했겠지.”

“뭘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뭐가 됐든 다 네가 실수한 거다. 내가 지부장 자리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지부장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해승에게는 괜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그날 뭐 신경 쓰이는 일 없었어?”

“신경 쓰이는 일이요?”

“그래. 누가 연희윤 에스퍼한테 너와의 일로 시비를 걸었다거나 싫은 소리를 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안 좋은 소문이 있다는 식으로 말을 흘리거나.”

해승이 고개를 한쪽으로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그가 기억하기로 그날 희윤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소한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있었다면 모를까.

‘잠깐. 설마…….’

해승의 눈이 커졌다.

덜컹.

의자가 뒤로 거칠게 밀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랑곳없이 해승은 그대로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 당장 희윤에게 확인해 봐야 했다. 아무래도 최근 이상해진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야, 표해승!”

지부장은 갑자기 회의실을 나가 버리는 해승을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희윤 씨. 희윤 씨!”

모니터에 뜬 타 팀 불 속성 에스퍼의 대련 신청서를 멍하니 보고 있던 희윤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옆을 돌아봤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안효정이 걱정스럽다는 듯 보고 있었다.

“아뇨. 그냥 좀 잠을 못 자서요…….”

“왜? 무슨 고민 있어?”

안효정은 희윤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그녀도 오늘 들은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떠드는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 안효정도 우연히 알게 된 소문이 있었다.

희윤과 해승이 호텔에 갔다고.

에스퍼와 가이드가 상성이 좋을수록 육체적인 관계를 긴밀하게 맺으려 한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두 사람의 친밀도와 스킨십의 깊이에 따라 가이딩의 효율이 달라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내진 않았어도 희윤이 그런 섣부른 일을 할 사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해승이다. 그래서 안효정은 두 사람이 호텔에 갔다고 해서 여느 소문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설마 표해승 가이드가 괴롭히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니면 뭐 표해승 가이드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겼거나.”

그 물음에 희윤의 눈동자가 일순 떨렸다. 그건 안효정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진짜 둘이 갔어? 호텔을? 왜? 어쩌다가!’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왜 갔느냐고 물어야 하나. 그렇지만 희윤이 말한 것도 아닌데 알은척할 수도 없고. 그럼 소문을 들었느냐고 물어봐야 하나.

안효정의 고민은 다행히 오래가지 않았다. 희윤의 책상에 놓인 핸드폰이 열렬히 몸을 떨어 댔기 때문이었다.

“희윤 씨. 전화 온다.”

희윤은 그 말에 눈을 돌렸다. 발신자에 찍힌 이름이 의외라 고개를 갸웃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희윤 씨, 안녕하세요. 저 정소한이에요.

“네. 정소한 가이드님. 잘 지내셨어요?”

- 저야 잘 지냈지요. 근데 제가 바쁜데 전화했나요?

“아뇨. 괜찮아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희윤은 상대가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를 저으며 정중히 물었다.

- 다행이네요. 음, 다른 건 아니고. 희윤 씨 시간 괜찮으면 지금 저랑 커피 한잔하실래요?

“아…….”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에 희윤이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정소한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 지난번 커피 사 준다고 했던 것 잊지 않았죠?

희윤은 그게 지난번 강평 소방서에 출동하고 돌아와 정소한에게 가이딩을 받으며 했던 말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때 늦은 밤까지 가이딩하느라 고생해 준 그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긴 했다.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 그럼 커피 사 주시는 건가요?

정소한이 웃으며 물었다.

“네. 얼마든지요. 비싼 거로 살게요.”

- 좋아요. 그럼 저도 바로 정리하고 내려갈 테니까 로비에서 봬요.

로비서 보자고 하는 얘기는 밖에 있는 카페로 가자는 소리였다. 희윤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통화를 끝냈다.

생각해 보니 희윤도 정소한을 만나 듣고 싶은 얘기가 있긴 했다. 물론 이제는 해승과 정소한이 말한 소문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대체 그게 어떻게 퍼지게 된 건지는 모르니까.

“정소한 가이드랑 카페 가려고?”

“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며 희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가서 시원하고 단 거 마시고 와.”

차라리 잘됐다. 안효정이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이쪽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에게 얼른 눈 돌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들 아닌 척 자꾸 희윤을 쳐다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올 때 커피 사 올까요?”

방금 제 주변에서 벌어진 일은 알아채지 못한 희윤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꽂으며 물었다.

“아냐. 신경 쓰지 말고 갔다 와요.”

“네. 그럼 다녀올게요.”

희윤이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때쯤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은 안효정의 경고대로 제 할 일을 하는 척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희윤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먼저 도착한 정소한이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보였다.

“갈까요?”

“네.”

두 사람은 본부 건물을 빠져나와 5분 거리에 있는 3층짜리 프랜차이즈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카운터에 나란히 서서 희윤은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정소한은 더치 커피를 주문해 2층으로 올라와 창가 자리에 앉았다.

“희윤 씨랑 드디어 커피를 마시네요.”

정소한이 더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웃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희윤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바빠서 그런 건데요, 뭘. 그나저나 날이 제법 따듯해진 거 같죠?”

정소한은 가볍게 웃으며 화제를 날씨로 돌려 주었다.

“네. 그러네요.”

희윤도 대꾸하며 활짝 열린 창 너머를 봤다.

진짜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처음 본부에 왔을 때가 갓 봄이 시작되던 때였는데, 오늘 보니 어느새 사방이 온통 푸릇푸릇해졌다.

그러고 보니 해승과 벚꽃을 보며 도시락을 먹은 공원이 여기에서 멀지 않았다. 희윤의 시선이 절로 그쯤 어딘가로 이동해 갔다.

“올해는 좀 여유 있게 벚꽃도 보러 가고 그러려고 했는데 바쁘게 일하다가 정신 차려 보니까 이미 다 졌더라고요.”

그러다 귀에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희윤 씨도 요즘 정신없이 바빴죠?”

희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소한은 그럴 것 같다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었다.

“서울 소방본부에서 파견 요청 온 것 저도 들었어요.”

“아…….”

“뉴스나 인터넷 기사 보니까 물 모이 관련해서 반응이 좋더라고요. 어제도 동화산에 산불이 났는데 크게 번지지 않고 꺼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면서요.”

그건 희윤도 뉴스로 봤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 에스퍼들이 애쓴 덕분이라는 게 알려져서 본부에도 연락이 온대요. 고맙다고.”

“시민분들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여러모로 본부나 에스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좋은 일이다. 또 산불이 난 산에도 큰 피해가 나지 않게 되었다니 그것 역시.

“희윤 씨도 참 겸손하네요.”

“네?”

“이번에 물 모이에 좀 더 쉽게 물을 채우는 방법을 보여 준 게 희윤 씨라면서요. 그 덕분에 일의 진척이 더 빨랐다고 그러던데요?”

“그랬나요?”

“네. 각 본부에 해당 촬영 영상이 교육 자료로 엄청나게 인기가 많아요.”

그건 또 전혀 모르던 일이었다. 희윤은 민망한 기분에 괜히 손바닥으로 목덜미만 쓱쓱 문질렀다.

“얼마 전에도요. 안효정 에스퍼와의 대련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 보셨어요?”

정소한이 훈련소에 왔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던 희윤이 놀란 눈을 했다.

“네. 잠깐 가서 구경했죠. 그날 이후 에스퍼들이 저한테 희윤 씨랑 대련해 보고 싶다는 말 자주 하던데, 따로 연락 온 거 없었어요?”

“아…….”

그 말에 희윤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정소한에게 연락이 오기 전, 전달받은 것도 다른 팀 에스퍼의 대련 신청이었으니까.

사실 희윤이 메일이나 메신저를 통해 대련 신청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내는 요청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요즘 일과 중 하나일 정도였다.

희윤의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반응에 정소한이 또 웃음을 흘렸다.

“잘 못 느끼는구나. 진짜 희윤 씨는 본인 속성이랑 딱 맞는 것 같아요.”

전에는 외모와 벨 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더니 이번에는 속성과 맞는 것 같단다. 역시 이번에도 정소한이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희윤은 그냥 바닐라라테를 마셨다.

이후로도 정소한은 희윤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편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주제도 한 가지에 치중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바꾸면서 적당히 질문도 던져 주어 희윤도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내내 어떻게 소문에 관해서 말을 꺼내야 할까 궁리했다. 말주변이 없으니 이럴 땐 어떻게 화제를 끌어내야 하는지도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련 적당히 하라고. 자꾸 그러면 가이딩 안 해 주겠다고 했는데……. 희윤 씨? 왜 그래요?”

한창 에스퍼와 있던 일을 풀어내는 정소한이 딴생각에 빠진 희윤을 알아차렸다.

“아, 아뇨. 죄송해요. 그, 그런 일이 자주 있나요? 그러니까 가이딩하려고 대련을 무리해서 받는?”

희윤은 열심히 얘기해 주는 정소한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에 빠진 게 미안해 얼른 입을 열었다.

“아뇨. 그보다는 그냥 몸 쓰는 걸 즐기는 거죠. 희윤 씨도 그렇지 않아요? 제가 아는 에스퍼들은 사무 업무를 하느니 차라리 가상 시뮬레이션 훈련이나 대련을 하는 게 낫다고들 하던데.”

“사무 업무가 어렵긴 하더라고요.”

희윤도 그 말에는 깊이 공감했다. 아무래도 줄곧 몸을 쓰는 일만 해 왔기에 가만 앉아 있는 게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뭘 고민하고 있었어요?”

정소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쑥 물어 왔다. 희윤은 드디어 제게 소문에 관해 질문할 기회가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아직도 어떻게 물을지 정리되지 않았다.

“아……. 그게. 다른 일이 아니라…….”

마침내 희윤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