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빠른 발소리가 들려올 때, 예민한 귀를 자랑하는 에스퍼들은 소리의 주인공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곧 그들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주인공이 찾으러 왔을 누군가의 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안타깝게도 이미 빈 채였다.
“형 어디 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가 우뚝 멈추고 대신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분명 매끄러운 미성인데 온기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효정 에스퍼.”
이름이 불린 안효정이 얼굴을 파삭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궁금하면 네가 연락해 보든가요. 표해승 가이드.”
얼굴만큼 짜증이 가득 담긴 대답이 돌아갔다. 답해 줄 생각도 없었지만, 있다고 해도 알려 줄 수 없었다. 심지어 현재 희윤이 다른 가이드와 카페엔 간 상태라면 더더욱. 요즘 해승이 희윤의 주변을 관리하고 있다는 걸 안효정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하.”
해승이 곧장 스마트폰을 들어 희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봐야 한다는 생각에만 치중해 연락할 생각도 못 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필 지금.’
통화는 연결되지 않고 단조로운 신호음만 이어졌다. 몇 번 신호음이 반복되자 해승의 표정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안효정은 모른 척하면서도 그런 해승을 곁눈질하며 PC용 메신저 앱을 열어 희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 희윤 씨, 지금 표해승 가이드 여기 와 있어. 찾고 있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오후 3:11]
당장은 해승이 전화를 걸고 있으니 보지는 못할 거다. 그러나 분위기로 봐서는 희윤이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렇다면 그 후에 문자를 보고 상황을 파악할 가능성이 크다.
그 생각에 안효정은 조금 더 답이 오기를 기다려 보았다.
“어딜 간 거야.”
결국 희윤과 연결되지 않았는지 해승이 스마트폰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눈을 들어 안효정에게 돌렸다.
괜히 뜨끔한 안효정이 딴짓을 하는 척 모니터를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볼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안효정 에스퍼. 저 좀 잠깐 보죠.”
그냥 가 버리면 참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해승이 콕 집어서 안효정에게 따로 보자는 용건을 전했다.
“왜?”
“요즘 본부 내에서 형이랑 제가 호텔에 간 일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것 때문에 묻고 싶은 게 있거든요.”
해승이 내던진 폭탄에 안효정의 고개가 휙 소리가 나도록 돌아갔다. 그뿐 아니라 사무실에 앉아 있던 몇 없는 에스퍼들의 눈도 동그랗게 커졌다.
“뭐, 뭐?”
“몰랐어요? 아닐 텐데. 아무리 그런데 관심 없어도 주변에서 계속 떠들었을 거 아니에요.”
“아니, 진짜 갔다고? 둘이?”
안효정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네. 갔죠.”
해승은 뭐 그게 별거냐는 듯 대답하더니 사무실을 쓱 훑었다. 이쪽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다가 눈을 마주친 에스퍼들이 찔끔하고 고개를 돌렸다.
“소문에 그거는 아니지? 어? 희윤 씨가 그럴 사람 아니잖아. 너도 그렇고. 아니, 넌 더 그럴 리 없지. 안 그래?”
어느새 안효정은 몸까지 일으켜 해승과 마주 보고 선 채였다.
“뭐가요?”
“뭐냐니!”
안효정이 분한 듯 소리 지르다가 빙글빙글 웃는 해승을 보고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조금 가라앉혔다.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니 해승이 저를 놀렸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에스퍼고 가이드고, 일반 직원들이고 할 것 없이 생각하는 게 어떻게 다 이럴까.”
해승이 입술을 비틀 듯 웃으며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뭐 왜. 호텔엔 전부 방 잡고 뒹굴러 가나?”
신랄한 말투에는 조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안효정은 그 말에 도리어 안심했다. 그래, 역시 저 표해승이 그럴 리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해승이 영 얄미웠다.
뻔히 본부에 안에서 도는 소문을 모르지 않았을 해승이 침묵했다는 게. 그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도 모르고!
“그럼 대체 왜 간 건데?”
“왜긴요. 술 마시러 갔죠.”
“아…….”
“그 호텔 라운지가 야경이 예쁘기로 유명하잖아요. 데이트들 좀 해 봤으면 알 텐데. 진짜 수준들 하고는.”
사무실에 있는 누구라도 듣지 못할 만큼 크게 말하면서 보란 듯이 “쯧쯧.” 혀까지 찬다.
“그러게. 다른 곳으로 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냐.”
“내가 왜요?”
“어?”
“형이랑 어디서 술 마시는지 왜 신경 써야 하냐고. 거기가 호텔이든 술집이든 산골짜기든 무슨 상관이라고.”
“뭐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일단 그런 말이 돌았다는 걸 알았다면 진작 좀 이렇게 말을 하지. 부풀리고 부풀려진 말이 혹여 희윤에게 들어갔다면 분명 상처를 입었을 거다.
“그래서 누구한테 들었어요. 안효정 에스퍼는.”
조금 전 따로 만나서 얘기를 하자고 하던 해승이 마치 그 일은 잊은 것처럼 질문해 왔다. 안효정은 해승이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 가요. 가. 나가서 말해 줄게요. 다른 사람들 일하는데 방해되지 않게.”
안효정은 대답을 미루며 먼저 해승을 지나쳤다. 물론 여기에서 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보아하니 해승이 그 때문에 여기에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더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듯했다.
“됐어요. 그거야 내가 알아보면 되죠.”
그러나 뒤에서 들려온 말에 안효정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해승이 태평한 얼굴로 그러나 무시무시한 말을 뱉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든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표해승이. 상부도 함부로 상대할 수 없는 S급 가이드가, 본부의 최대 후원사이자 주요 무기 거래처인 수호 그룹 고문 이사가 한 말이다.
“목격자도, 그 말을 옮긴 최초 유포자도 마찬가지고.”
그건 살해 위협만큼이나 무시무시한 파급력을 가지고 왔다. 여기저기 숨이 넘어가고 빠른 타자 소리가 들려왔다.
“그보다 형은 어디 갔어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해승이 안효정에게 물었다. 휙휙 변하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안효정은 미처 말을 고르지도 못하고 사실대로 꺼내고 말았다.
“정소한 가이드랑 카페에.”
그러다 제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금세 깨닫고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
안효정은 해승이 금방이라도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승은 아무 반응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희윤과 연결되지 않았다. 결국 통화를 포기하고 메시지 앱을 열었다.
하지만 해승은 대화창에 ‘형.’ 한마디만 치고 창을 닫아 버렸다. 어차피 이렇게 해도 제대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다.
그럼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낫다. 해승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전화를 돌렸다.
“CCTV 확인해 봐. 희윤 형, 어디로 갔는지. 당장.”
대답은 듣지 않고 곧바로 종료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안에 오르고 로비 층을 누르는 해승의 표정이 평소보다 더욱 서늘했다.
* *
“저랑 해승이가 호텔에 간 일로 소문이 돌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아…….”
희윤이 꺼낸 말에 정소한은 드물게 당황한 얼굴을 했다.
“혹시 그것 때문에 곤란한 일이라도 생겼어요?”
정소한이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아뇨. 그렇진 않았어요.”
“그럼…….”
“저보다는 해승이한테 피해가 가는 것 같아서요.”
“표해승 가이드가 그래요?”
희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어보지도 못했다.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잖아요. 근데 호텔에는 왜 갔던 거예요?”
정소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요.”
그러면서 배려심 있는 말도 덧붙였다. 희윤이 곧바로 대꾸했다. 사실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었다.
“술 마시러 간 거였어요. 야경이 좋은 곳이라고 해서 볼 겸.”
“아…….”
정소한이 짐짓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빛은 약간의 의심을 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날 두 사람이 호텔로 들어가는 걸 본 게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에스퍼와 가이드가 호텔에 갔다. 근데 그냥 야경을 보기 위해서라고? 무슨 그런 황당한 말을.
“그랬구나. 그럼 술은 어디서 마셨어요? 펜트하우스?”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질문하는 말투는 상냥했다.
‘펜트하우스가 어디지?’
희윤이 낯선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아뇨. 호텔 라운지 바였어요. 서울 타워가 보이는 곳이었는데, 근사하더라고요.”
그때 야경은 지금 생각해도 참 두근두근하고 좋았는데. 다시금 씁쓸한 기분이 몰려와 희윤이 눈을 내리깔았다. 덕분에 정소한이 자신을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본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술만 마시고 왔어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었지만, 희윤은 정소한이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덤덤히 대꾸했다.
“네. 늦은 시간이라서요. 다음 날 출근도 해야 하고.”
싱거운 대꾸에 정소한은 실망한 빛을 띠었다. 하지만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곤란하긴 하겠네요. 희윤 씨 요즘 표해승 가이드랑 자주 같이 다니잖아요.”
“그러게요.”
희윤의 얼굴이 어두워진 걸 본 정소한이 은근한 투로 말했다.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조심요?”
“네. 아무래도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이니까 그런 소문도 나는 걸 테니까.”
“아.”
희윤이 낮게 탄식했다. 불쑥 떠오른 생각 때문이었다.
해승의 집에서 신세 지고 있는 건, 안효정과 지부장만 아는 사실이다. 만약 이것까지 알려지면 해승에게 더 피해가 가는 건 아닐까.
‘역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지.’
어차피 그곳은 애초에 제집도 아니었으니까. 희윤이 결심을 마치고 막 고개를 들던 때였다.
“희윤 형.”
기다렸다는 듯 익숙하고도 다정한 음성이 들렸다.
희윤은 망설임 없이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역시 그곳에는 해승이 서 있었다. 순간 또 심장이 물살에 휩쓸리듯 속절없이 떨렸다.
‘쟨 왜 또 저렇게 쓸데없이 반짝거려.’
괜히 투덜거려 보았다.
“여기에 있었네요.”
해승이 해사하게 웃으며 희윤과 정소한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으응. 넌 여긴 어떻게?”
반가운 마음과는 별개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본부 카페도 아닌데 해승은 자신이 여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왔단 말인가. 그러다 자연히 그가 전화를 걸어 온 걸 외면했다는 것까지 떠오르고 말았다.
‘혹시 전화를 받지 않아 찾아다녔나?’
희윤이 속으로 생각하던 순간.
“커피 한잔하러 왔죠. 졸음도 깰 겸. 근데 창 너머에 형이 보이길래 올라와 봤어요.”
그럼 그렇지. 역시 너무 비약한 거다. 설마 제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해승이 찾아다닐 리 있겠는가.
“형은요?”
“응?”
“전화 계속 안 받으시기에 훈련이나 대련 중인 줄 알았는데, 정소한 가이드와 있었네요.”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운데 눈빛은 아니었다. 가늘어진 눈매가 유쾌하지 못한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아, 미안. 전화는 온 줄 몰랐어. 무음으로 해 둬서.”
희윤이 서둘러 변명했다. 설정 모드를 바꾼 건 맞았다. 다만 화면이 하얗게 반짝일 때마다 힐끔힐끔 보기는 했지만.
“그랬구나. 그럼 저도 커피 사서 올라올게요.”
해승은 더는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 합류하겠다는 말은 희윤을 움찔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금 이 자리에 해승과 정소한을 나란히 앉히고 싶지 않았다.
“아, 아냐. 이제 일어나려고 했어.”
희윤이 그렇지 않으냐는 눈으로 재빠르게 정소한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해승을 노려보던 정소한이 그 짧은 순간 표정을 바꾸고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직 업무 시간인데 오래 자리 비워 둘 수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야죠.”
“흠……. 그래요? 그럼 뭐, 같이 내려가요.”
해승이 희윤과 정소한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불편한 자리를 피하고자 희윤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해승을 지나쳐 가려 했지만, 손목에 감기는 힘에 멈칫하고 멈추어 서야 했다.
고개를 내려 저를 붙든 손을 보고, 그대로 이어진 팔을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뭘 그렇게 서둘러요.”
“어, 어?”
괜히 뜨끔한 희윤이 말을 더듬었다.
“왜요. 안효정이 당장 오라고 연락이라도 했어요?”
다행히 해승은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희윤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정소한 가이드 말대로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으니까.”
“그래요. 뭐.”
그런 거라면 알아들었다는 듯 해승이 생긋 웃었다. 당연하다는 듯 희윤과 손을 마주 잡았다. 희윤은 해승에게 그대로 끌려가며 겹겹이 겹쳐지는 손을 보았다.
뒤에 정소한이 있었다. 그러니 더 오해하지 않게 당장 풀어야 하는데. 해승이 제게 마음을 품은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놓아야 하는데.
차마 그러고 싶지 않았다.
희윤은 결국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맞닿은 두 손에서 전해진 온기가 여지없이 간질간질한 느낌을 전해 왔다.
속도 없이.
그게 좋아서.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해승은 옅게 미소 짓는 희윤을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조금 뒤에 정소한이 굳은 얼굴로 둘을 바라보는 게 보였지만, 그대로 무시해 버렸다. 애초 저쪽은 해승에게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카페를 나오자마자 정소한은 먼저 가 보겠다고 말하며 앞서 본부로 사라졌다. 희윤은 같이 가자는 말도 하지 못했다.
해승이 커피를 사야 한다는 핑계로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희윤도 해승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정소한이 한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이럴 때 같이 있으면 오히려 해승에게 피해가 될지 몰랐다.
“왜 그래요, 형?”
희윤이 가만 올려다보기만 하자 해승이 고개를 갸웃했다. 차분한 머리칼이 기운 각도만큼 찰랑거리며 흘러내린다.
‘넌 어쩌자고 머릿결마저 좋은 걸까.’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희윤이 입을 열었다.
“혹시 소문 때문에 네가 곤란한 일 있으면 말해 줘. 그 즉시 난 집으로 돌아갈게.”
혹시 제대로 의사를 전달하지 못할까 봐 걱정된 희윤은 문장 하나를 숨 한번 안 쉬고 그대로 전부 쏟아 냈다.
“곤란한 일이라뇨? 왜요? 누가 형한테 뭐라 그래요? 괴롭혀요? 욕해요?”
해승이 한쪽 눈을 찌푸린 채 반대로 물음표 가득한 질문을 돌려주었다.
“아니. 전혀.”
오히려 이쪽의 눈치를 살피듯 보기만 할 뿐이다. 안효정이 곁에 딱 붙여서 신경 써 주었기에 소문에 관해서 물어 오는 사람도 없었다.
“아니면 그것 때문에 불편해요?”
“아니, 난…….”
네가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한 말인데. 희윤은 뒷말을 차마 더 꺼내지 못했다. 해승이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살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하……. 미안해요, 형. 형이 그 일을 신경 쓸 줄 몰랐어요. 어차피 소문이라는 건 반응하면 더 커지잖아요. 그래서 그냥 두면 어련히 조용해질까 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해명이라도 할걸.”
“아냐. 괜찮았어.”
희윤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해승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제가 어리석었어요. 경솔했던 거 같아요. 대체 누가 그날 우릴 보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퍼뜨렸는지도 확인할걸.”
어쩐지 흐름이 좀 무섭게 변해 가는 것 같다. 심지어 해승의 눈빛도 점점 어둑해져 갔다.
“해승아?”
희윤이 정신 차리라며 해승을 불렀다. 달래 주기 위해서 살살 마주 잡은 손도 흔들었다. 그러자 조금씩 해승의 표정이 풀렸다.
“어쨌든 형.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형이 불편하다면 차라리 제가 나갈 테니까.”
“거기 네 집인데 네가 왜…….”
“알았죠?”
웃는 얼굴로 해승이 물었다. 눈매도 부드럽게 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압박감이 느껴질까. 분명 내 집에 돌아간다는 말만 했을 뿐인데.
어쨌든 희윤으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얌전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고개를 보며 해승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 이제 하나는 해결했고.’
해승은 희윤의 손을 잡은 채 걸어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희윤이 있는 카페를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를 가로질러 본부를 나서고 몇 분 되지 않아 곧 희윤과 정소한이 움직이는 CCTV 영상이 전달됐으니까.
그 후 해승이 지시한 건 그날 희윤과 호텔에 도착했을 때 입구와 주차장 근처에 비치해 둔 CCTV 자료였다.
다분히 불법적인 일이나 어차피 군수와 보안은 수호 그룹이 꽉 잡고 있으니 파일을 빼 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주 살짝 희윤이 간 카페를 찾는 것보다 시간이 좀 걸릴 뿐.
“형, 조금 전 제가 뭐 하고 왔는지 아세요?”
희윤이 의문 섞인 눈으로 해승을 돌아봤다.
“지난번 광고 촬영했던 사진 고르다가 왔어요.”
“아…….”
“형한테도 당장 보여 주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계속 안 받으시더라고요.”
해승이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순간 귀엽네,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미안.”
혹시 정소한과 있는 게 알려질까 봐 받을 수 없었다. 물론 해승이 자신이 정소한을 만난 목적을 알 리 없겠지만. 그래도 희윤으로서는 뭔가를 숨기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걸렸으니까.
“아니에요. 제가 형 잘 나온 거 추렸으니까 올라가서 같이 봐요.”
“그래.”
희윤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두 사람은 본부에 다다랐다. 막 입구에서 나오는 직원을 발견한 희윤이 서둘러 잡힌 손을 빼내었다.
그도 모자라 걸음을 늦춰 해승보다 반보 뒤로 사이를 벌렸다. 당장 해승의 시선이 비어 버린 제 손으로 향했다. 곧이어 고개 역시 돌아갔다. 희윤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해승의 눈매가 못마땅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희윤이 왜 그런지 알기에 다시 잡지 않았다. 대신 축 처진 어깨를 부드럽게 쓸며 다가오는 직원들을 보았다.
해승과 눈이 마주친 이들은 전부 흠칫했다가 서둘러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다행히 그 후에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어디로 가나 했더니 해승이 희윤을 이끈 곳은 빔프로젝터가 갖춰진 시청각실이었다.
“이런 데도 있었구나.”
“네. 형, 이쪽에 앉으세요.”
해승이 희윤을 테이블에 앉히고, 본인도 그 옆에 자리를 차지했다. 빔프로젝터와 가까운 거리였다. 그 옆에는 이미 부팅을 마친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해승의 손길이 빠르게 노트북을 오가고 곧 화면에 광고 제작사에서 보내온 사진이 주르륵 나타났다.
“와…….”
희윤이 감탄해 마지않았던 해승의 정장 차림이 화면 가득 떴다. 해승은 제 사진에는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하게 마우스를 클릭해 넘겼다. 그래도 희윤의 감탄이 들려올 때면 속도를 늦춰 감상할 시간을 줬다.
“몇 개나 골라야 해?”
“형이 원하는 대로요.”
희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홀린 듯이 화면을 봤다. 모든 사진이 다 잘 나왔다. 자신이 아니라 해승이.
특히 함께 찍은 것보다 단독으로 나온 사진은 마치 작품처럼 표정이나 분위기가 시선을 꽉 사로잡았다.
그랬기에 어느 것 하나 콕 집어서 고르기 어려웠다. 해승은 그런 희윤을 위해 몇 번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진을 보여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희윤이 어렵게 고른 것 중에 몇 개는 스마트폰에 따로 보내 주기도 했다. 해승은 어느새 풀린 희윤의 얼굴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