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해승의 스마트폰에 자료 사진이 전달되었다.
“정소한이네.”
호텔 입구와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화면에 찍힌 건 정소한이었다. 심지어 첫 사진은 희윤과 자신의 뒤를 몰래 따라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하여간 깜찍하게 구네.”
해승은 픽 웃으며 사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런 짓을 해 놓고 희윤을 따로 만났다니.
무슨 말을 했을까.
괜히 희윤이 갑자기 집을 나가겠다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거다. 아예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다. 주변의 시선이니 피해가 어쩌고 하는 걸 봐서는 정소한이 그런 식으로 대화를 주도했겠지.
“이해가 안 가네.”
물론 정소한이 제게 어울리지도 않게 경쟁심을 가진 건 알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희윤에게 접근하고 싶을까.
그렇게 해서 본인에게 대체 무슨 이득이 된다고.
해승은 자격지심과 비슷한 경쟁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 그런 마음 자체를 가져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일단 경고는 좀 해야겠네.”
경고도 하고 희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소문도 조용히 덮을 겸 정리가 필요할 듯했다. 해승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연락을 넣었다.
-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곧장 처리하겠습니다.
짤막한 답변을 확인 후 곧바로 서재를 나섰다. 침실로 들어가니 희윤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침대로 다가가 희윤을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가장자리에 앉아 손을 뻗었다. 이마가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지만, 차마 만지지는 못했다.
혹시 잘 자는 사람을 깨울까 싶어서였다.
“희윤 형.”
대신 작게 희윤을 불러 보았다. 눈꺼풀이 움찔 떨렸지만 열리지는 않았다.
“다른 마음, 먹지 말아요.”
* *
평소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해 여유 있게 사내 게시판을 살피던 정소한이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누구야?’
화면에는 유흥가에 있는 한 모텔로 들어서는 두 사람이 찍힌 사진이 떠 있었다.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지만, 찍힌 당사자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아래부터는 저 사진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인지 폭로하는 글이 길게 이어졌다. 몇 년 전 에스퍼 둘 사이에 있던 불화가 한 가이드의 이간질로 벌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런 일이야 본부에서 심심찮게 벌어진다. 아무래도 담당 시스템이다 보니 가이드 혹은 에스퍼를 두고 경쟁하거나 시비가 붙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저 게시글 속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정소한 자신이라는 것에 있었다.
저 가이드가 양다리 걸쳤대. 그러다 일이 터진 거지. 에스퍼 둘 다 쉬쉬했고, 끝까지 자기들이 잘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니깐.
근데 내가 그 가이드의 친구의 지인한테 들은 얘기로 애초부터 그 가이드가 둘한테 다 전담하자는 식으로 간 보면서 저울질했대.
그러다가 지인의 친구의 아는 사람이 A 에스퍼랑 가이드가 같이 모텔 들어가는 걸 봤는데 같은 날 B 에스퍼랑 술 마시면서 하는 얘기를 들은 거지.
두 에스퍼는 서로 자기가 그 가이드와 전담을 맺을 사이라면서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에 징계 위원이 열려 각각 다른 지부로 발령이 난 것으로 끝났다는 내용이었다.
익명은 출근할 때를 노려 게시된 만큼 높은 조회 수를 자랑했다. 더군다나 가이드와 에스퍼 간에 벌어진 치정 싸움이었으니 여럿의 흥미를 이끌기 충분했다.
심지어 오전이 다 가기 전에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던 에스퍼 중 하나가 본인 이야기라면서 글을 남겨 익명 게시판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그런 중에 정소한은 해승이 호텔에 간 일을 소문 낸 당사자를 찾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좌불안석에 떨다가 급체까지 하는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물론 이런 상황은 오전에는 안효정과 처음으로 가상 시뮬레이션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다른 팀 불 속성 에스퍼와의 대련으로 시간을 보낸 희윤은 알지 못했다.
그저 소문과는 상관없는 알찬 하루를 보낸 후 늘 그렇듯 퇴근 시간에 맞춰 해승과 나란히 본부를 나섰을 뿐이었다.
“헉! 저거!”
마침 차가 신호를 받느라 멈춘 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희윤은 버스 정류장에 걸린 큼지막한 광고를 발견했다.
다름 아닌 해승과 함께 찍은 사진 중 희윤이 가장 처음 골랐던 것으로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빔프로젝터로 봤을 때도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커다란 화면에 환하게 빛을 받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저거로 결정했나 보네요.”
해승이 무심히 말했다. 희윤이 그런 해승을 힐끔 돌아봤다. 몇 번 해 봤다고 하더니 확실히 저와는 반응이 달랐다.
희윤은 다시 한번 정류장의 광고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차가 막 출발하던 순간.
“이제 형이 제 에스퍼라는 거 다 알게 됐네요.”
해승이 다시 꺼낸 말에 희윤의 고개가 도로 운전석으로 휙 돌아갔다.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 얼굴이 보였다.
희윤의 귀가 금세 발갛게 변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얼른 손으로 귀를 가리며 다시 창밖을 봤다.
다행히 정류장을 지나친 이후로 광고는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 날 본부에 왔더니 다들 희윤만 보면 그 얘기를 한마디씩 건넨다는 것에 있었다.
“희윤 씨, 완전 연예인 체질이었네. 광고 봤어. 진짜 잘 나왔더라?”
안효정이 희윤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희윤은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희윤 씨는 봤어요?”
“네. 버스 정류장에 뜬 거요.”
“전철은요?”
“아. 거기도 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차마 직접 가서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내가 그럴 줄 알고 영상으로 담아 왔지.”
안효정이 빙글빙글 웃으며 스마트폰을 터치했다. 화면에 전철 내 모습이 보였다. 출근길에 찍었는지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자! 그냥 사진도 아니고 동영상이더라.”
희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안효정의 말마따나 여러 개 이어진 화면에 마치 영상으로 찍은 듯 사진이 넘어가는 장면이 보였다. 무슨 특수 효과를 넣었는지 마치 영화처럼 보이기도 했다.
“와…….”
“멋있지? 내가 이거 보고 에스퍼가 아닌 연예인인 줄 알았잖아.”
“그러게요. 사진으로 봤을 때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움직이는 영상을 보니 색다르게 느껴졌다. 희윤은 다시금 재생되는 화면을 멍하니 봤다. 화면 속 해승은 정말 배우 같았다.
표정이나 눈빛이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아 놓아줄 줄 몰랐다.
“뭐야. 왜 얼굴이 빨갛게 됐어?”
“아…….”
“뭘 부끄러워해. 잘 나왔다니까.”
희윤은 달아오른 제 귀를 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차마 해승을 보다가 그랬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울렁울렁한 속을 다스리려 마른침을 삼키는 눈은 도로 화면에 갔다. 돌연 퇴근길에 해승이 한 말이 떠올랐다.
〈이제 형이 제 에스퍼라는 거 다 알게 됐네요.〉
슬며시 손을 가슴 위에 올렸다. 아직도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게.’
해승의 유일한 에스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더는 욕심 내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독이며 하루 사이에 쌓인 메일함을 열었다. 여전히 그와 대련하자는 내용이 가득했다.
‘해 볼까?’
조금 더 긍정적 방향으로 생각하며 어제보다 신중하게 목록을 훑던 희윤의 시선이 멈칫했다. 뜻밖의 상대에게 메일이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연희윤 에스퍼. 조현기 이사입니다.
희윤은 망설이지 않고 제목을 클릭해 내용을 확인했다. 간단한 인사와 안부를 묻는 끝에 용건이 적혀 있었다.
언제라도 좋으니 연희윤 에스퍼랑 같이 차 한잔하고 싶은데 어때요? 시간 괜찮을 때 사무실로 오시면 됩니다
마지막 문장을 확인한 희윤은 지금 가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조 이사도 메일을 보고 있었던 건지 곧 알겠다며 기다리겠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그 내용까지 확인한 후 희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연히 옆에 앉은 안효정의 시선이 따라왔다.
“저, 조 이사님 뵈러 다녀올게요.”
“조 이사님?”
무슨 소리인가 하던 안효정은 화면에 뜬 메일을 훑었고 조 이사의 이름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녀와. 조 이사님 개인 사무실은 19층에 있는 거 알지?”
친절하게 위치도 알려 주었다.
“네. 다녀올게요.”
희윤은 인사한 후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가 타려는데 먼저 안에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그쪽은 누군가가 탔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정소한 가이드님.”
희윤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정소한에게 꾸벅 인사했다.
“아, 희윤 씨.”
정소한이 눈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식은 다른 곳에 있는 듯 좀 멍해 보였다. 뭔가 고민이 있는 듯한데 물어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희윤이 몇 번이나 그쪽을 봤지만, 정소한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본인이 누른 층에 도착해서도 멍하니 있다가 문이 닫힐 뻔했다.
“정소한 가이드님.”
희윤이 재빨리 열림 버튼을 누르며 정소한을 불렀다. 멍하니 있던 정소한의 시선이 희윤에게 향했다.
“괜찮으세요?”
“아, 네.”
아닌데. 안 괜찮아 보이는데. 오래 알고 지낸 건 아니지만, 이런 정소한은 처음이었다. 신경이 쓰인다.
자신이 고민할 때 얘기를 들어 준 것도 있었으니까.
“음……. 혹시 제가 얘기를 들어 드려도 될까요?”
희윤이 조심스럽게 권했다. 지금은 조 이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어렵지만, 정소한이 원한다면 퇴근 전 시간을 낼 생각이었다.
“괜찮아요.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희윤 씨.”
정소한이 그런 희윤을 가만 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고생하라고 말하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고민 많아 보이는 등이었지만, 희윤은 다시 정소한을 잡지는 않았다. 본인이 원치 않는데 그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손에 쥔 핸드폰이 진동해 시선이 절로 그리로 갔다.
도착한 건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