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85)

[잘 지내고 있냐? 오전 10:29]

본인이 누군지 밝히지도 않은 뜬금없는 내용에 희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번호를 봐도 역시 낯설었다.

“잘못 온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희윤은 곧 관심을 껐다. 19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밖으로 나와 문자는 관심에서 멀어졌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비서는 희윤에게 짧게 인사하더니 곧장 이사실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조 이사가 반갑게 맞았다.

“갑작스럽게 만나 달라고 청해서 당황했죠?”

희윤을 소파로 안내해 앉히고, 커피까지 대접해 주며 조 이사가 말문을 열었다.

“아, 아뇨. 아닙니다.”

희윤이 얼른 고개를 젓는 걸 보며 조 이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행이군요. 실은 진작 따로 만나고 싶었는데 연희윤 에스퍼도 이런저런 일로 바쁜 것 같아서 차마 연락을 못 했습니다.”

“아.”

“어쨌든 오늘 이렇게 만나고자 한 이유는 연희윤 에스퍼가 괜찮다면, 내가 지도를 좀 했으면 해서예요.”

그건 조 이사가 능력 사용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말처럼 들렸다. 희윤이 대답 없이 눈만 끔뻑이자 조 이사가 좀 더 입꼬리를 올렸다.

네게 절대 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듯한 미소였다.

“물론 당장 긍정적인 대답을 해 달라는 건 아닙니다. 연희윤 에스퍼한테도 부담이 되는 일일 테니까.”

“아, 아닙니다. 저야 감사하죠. 다만 생각도 못 한 일이라…….”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습니다. 나는 되도록 연희윤 에스퍼와 함께하고 싶어요. 아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서울 지부에 A급 물 속성은 나와 신 부장뿐이라 아쉬움이 컸거든.”

그 얘긴 희윤도 들은 적 있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윤 씨가 요즘 두각을 나타내서 나도, 신 부장도 기대하는 바가 커요. 그래서 괜찮다면 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하는 말입니다.”

“네. 말씀만으로도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그건 더 고민하고 답해 주면 되겠고. 담당 가이드들과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조 이사가 급하지 않으니 충분하게 고민하고 말하라는 듯 자연히 화제를 돌렸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기보단 거의 표해승과만 지내고 있긴 하지만. 그러다 문득 희윤은 혹시 조 이사가 얼마 전까지 퍼졌던 소문을 알고 묻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승의 말대로 차츰 수그러들어 이제는 별로 관심을 보는 사람이 없기는 해도 간부급들은 어떻게 여길지 모르는 일 아닌가.

“에스퍼와 가이드는 서로 협조가 매우 필요합니다. 그러니 혹시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곤란한 일 있으면 꼭 주변에 도움 요청해요.”

“네.”

희윤은 그런 일 없을 거라는 말 대신 얌전히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이만 정리할까요? 벌써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네.”

조 이사는 중언부언하며 사람을 잡아 두는 스타일이 아닌 듯했다. 필요한 말만 하고 나자 먼저 대화를 끝내자고 말했다. 희윤으로서도 거절할 필요 없는 얘기였다.

“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점심도 같이 먹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내가 다른 일정이 있어서 어렵네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얼른 고개를 젓는 희윤을 웃는 낯으로 보던 조 이사가 입을 열었다.

“표해승 가이드가 그간 담당했던 에스퍼가 없다는 것 알고 있지요?”

“네.”

“그 때문에 그 녀석이 여러모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나는 연희윤 에스퍼가 해승이한테 와 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표해승, 잘 부탁할게요.”

어깨를 두드리는 손이 다정했다. 지부장도 그렇고 조 이사도 해승을 오래 알아 온 사람들은 본부 내 다른 직원들과 생각하는 게 다른 듯했다.

“제가 더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표해승이한테? 하하……. 그건 의외네.”

해승의 성격을 잘 아는 조 이사가 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도 본부에서 도는 얘기를 모르지는 않았다.

해승이 그답지 않게 새로 온 에스퍼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주변에 꼬이는 사람들을 경계한다고.

조 이사는 부디 이 에스퍼와 해승이 잘 지내기를 바랐다.

그건 조 이사뿐만 아니라 간부들 전부가 가진 소망이자 목표였다.

* *

희윤은 늘 그렇듯 점심은 해승과 함께했다.

“조 이사님이 이제 연락했어요?”

희윤은 식판에서 국을 뜨다 말고 멈칫했다. 눈을 들었다가 곧장 해승과 마주쳤다. 해승이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얘기했잖아요. 관심이 많다고. 그런 것치고 좀 늦은 것 같아서요.”

“바쁘시니까.”

“뭐 그 양반이 그렇긴 하죠.”

해승은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희윤은 그런 해승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조 이사와 제법 친한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어떤 사이냐고는 묻지 않았다.

해승과 점심을 먹은 후 사무실로 돌아온 희윤은 또다시 대련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이번엔 같은 물 속성 에스퍼 진선영이었다.

“가상 시뮬레이션 훈련보단 대련이 낫지. 갔다 와요, 희윤 씨.”

희윤이 고민하는 모습을 본 안효정이 뭘 망설이냐는 듯 말했다.

“그럴까요?”

“그럼요. 거기다 같은 물 속성이잖아요? 도움 많이 될 거예요.”

“네. 알겠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희윤은 안효정의 의견을 받아들여 대련을 수락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어디 가요?”

그대로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뜻밖에도 안에는 선객이 있었다. 해승이었다.

“아… 대련 신청이 와서, 지하 훈련장에.”

희윤이 놀란 듯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저도 같이 가도 돼요?”

“다른 일 있는 거 아냐?”

해승이 위층에서 내려오는 길이라면 지부장을 만나고 온 게 아닌가 해서 물은 것이었다.

“아뇨. 끝내고 오는 길이에요.”

그렇다면야 희윤도 거절할 이유가 없다. 희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승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둘은 그 길로 함께 지하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진선영은 먼저 와서 희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희윤 에스퍼님! 오늘 잘 부탁드려요.”

웃으며 인사를 건넨 진선영이 힐끔 희윤 뒤에 서 있는 해승을 봤다. 일순 못마땅한 빛이 스쳤지만, 금세 지워 버렸다.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재미있게 해 봐요!”

그렇게 발랄하게 말한 진선영은 초반부터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뽐냈다. 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칼날이 연신 희윤을 위협했다.

채찍처럼 휘두르고, 바닥에서 움켜쥐려 하고, 하늘에서 땅에서, 앞에서 뒤에서 끊임없이 퍼부어지는 공격은 A급 못지않게 위협적이었지만 단 한 번도 희윤에게 닿지는 못했다.

“연희윤 에스퍼! 계속 그렇게 방어만 할 거예요?”

20분가량 쉬지 않고 움직이다가 뚝 멈추어 선 진선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온갖 능력을 사용해서 퍼붓는 사이, 희윤은 한 번도 반격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희윤의 앞에는 일전에 안효정과 대련할 당시 막바지에 만들어 냈던 물의 장벽만이 세워져 있었다.

“아, 아뇨. 할 겁니다.”

“사실 저도 그 영상 봤거든요.”

영상? 희윤이 의문 섞인 눈으로 진선영을 보았다.

“갯벌에서 괴물체 날려 버린 거랑 안효정 에스퍼와 대련하는 영상이요. 그때 나온 그 수룡, 저도 상대해 보고 싶더라고요.”

보기보다 진선영은 꽤 호전적인 듯했다. 웃으면서 말을 하는데 눈빛이 아주 반짝반짝했다. 처음 봤을 때 수줍게 물어볼 게 있다며 커피를 사 달라던 얼굴과는 정말 딴판이었다.

“네.”

희윤도 슬슬 태세를 전환할 생각이었다. 물의 장벽이 어느 정도 물이 있어야 만들어지는지, 어느 정도 위력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지 파악이 되었으니까.

“좋아요!”

다시금 진선영이 덤벼들었다. 희윤은 이번엔 막아서는 게 아니라 날아오는 물 칼날을 분해해 버렸다.

눈앞이 부연 수증기로 막혔다.

“와. 진짜. 엄청나네.”

그야말로 순식간에 허공에서 제 공격이 무산된 걸 본 진선영이 감탄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경험이 많은 에스퍼답게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물줄기가 내리꽂혔다가 그대로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촤아악.

고작 한 줄기일 뿐인데도 소리가 훈련장을 울릴 정도로 위력은 대단했다. 움찔한 진선영이 엄청난 공격 후에도 덤덤해 보이는 희윤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련이 종반부로 다다르며 승은 진선영 쪽으로 점차 기울어갔다. 희윤이 A급 속성이긴 해도, 5년 차 경력직인 진선영보다는 조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헉. 와, 헉!”

“하아. 하…….”

온 훈련장을 물과 안개의 바다로 만들어 버린 두 사람이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왜 A급인지 알겠어요. 인정, 인정.”

진선영이 혀를 내두르듯 말했다. 희윤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내다 고개를 내젓는 진선영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희윤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진선영도 웃음을 흘리며 마주 까닥였다.

“연희윤 에스퍼도요. 근데 진짜. 어디 가서 이제 갓 수습 딱지 뗀 에스퍼라고 말해도 안 믿겠어요.”

희윤은 대꾸하는 대신 그저 젖은 목덜미만 손바닥으로 쓸었다.

“다음에 또 대련해 주세요.”

진선영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물기에 촉촉 젖어서 그런지 더욱 생기발랄하게 보였다. 희윤도 그녀에게 마주 미소 지어 보였다.

“저야말로 다음에도 잘 부탁드릴게요.”

먼저 훈련장을 나섰던 희윤은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움찔했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또 이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희윤 형.”

그들 중 단연 돋보이는 건 해승이었다.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 덕분에 희윤의 관심은 금세 훈련장에 몰려든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오늘은 방어 위주로 연습했나 봐요.”

“응.”

어떻게 알았지. 가만 보면 해승은 에스퍼의 능력 성향을 어렵지 않게 파악하고는 했다. 그만큼 본부에서 오래 있었고, 다양하게 현장을 봐 왔던 게 경험으로 남아 그런 거겠지.

“공격만 너무 특성화하는 게 위험하긴 하죠.”

“맞아.”

심지어 희윤이 어떤 걸 목적으로 생각하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저를 잘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희윤은 또 주책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진선영과 눈을 마주치고 움찔했다. 꼭 제 마음을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희윤이 서둘러 시선을 피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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