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85)

여러 속성의 에스퍼와 대련하고, 조 이사에게 1:1로 지도를 받는 사이 어느덧 계절은 여름의 초입에 이르렀다.

그사이 희윤의 소속은 에스퍼 팀에서 조사팀으로 바뀌었다. 조 이사가 본부의 일에 적응하기 위해 몇 달 해 보는 것도 좋다고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안효정과 떨어진 게 아쉽긴 했지만, 희윤은 조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팀을 변경했고, 적응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려던 희윤은 여전히 해승의 집에서 지냈다. 몇 번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그때마다 해승이 온갖 핑계와 말도 안 되는 설득을 거듭하는 바람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리된 것이었다.

사실 그런 건 다 핑계로 하고 희윤이 머물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그럼 다녀올게.”

오늘 희윤은 주말을 맞아 집에 잠시 다녀오기로 했다. 해승도 같이 가려고 했지만, 뜻하지 않게 생긴 일정 때문에 불발됐다. 하필 그게 수호 그룹이 후원하는 보육 시설로의 봉사 활동이었기 때문에.

“너도 잘 다녀오고.”

“네. 형. 얼른 갔다가 오세요. 날도 더운데 오래 있지 말고요.”

해승이 한껏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희윤을 잡은 손도 영 떼어 놓지 못했다.

“그냥 저도 같이 갈까요?”

“봉사 활동이나 가.”

“그건 저 말고도 하는 건데요.”

“네 할아버지가 직접 연락하신 거잖아.”

“아, 진짜…….”

해승의 미간이 짜증으로 확 좁아졌다. 그 말마따나 봉사 활동을 하러 오라고 연락한 건 다름 아닌 표 회장이었다.

보통 그런 건 회사에 자리를 하나씩 맡은 임원의 가족들이 할 일이었다. 해승에게까지 올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그런데 하필 이번에 봉사 활동하러 가는 보육 시설에 에스퍼 하나에 가이드가 둘이나 각성한 게 표 회장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표 회장은 이제 갓 각성한 보육 시설 출신 아이들을 위해서 같은 가이드인 자신의 손주가 가는 게 좋겠다는 뜻을 전화로 밝힌 것이었다.

뭐든 제 뜻대로 하는 해승 같아도 할아버지에게는 꼼작 못하는지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끝내 알았다고 대답했다.

“알겠어요. 저도 끝나자마자 바로 올 테니까. 형도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세요.”

“하하. 알았어.”

해승이 비장한 얼굴로 하는 말에 결국 희윤이 웃고 말았다.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라니. 누가 보면 전쟁터에라도 나간 줄 알 듯했다.

그러고 나서도 10분간 해승은 가기 싫은 티를 팍팍 내다가 표 회장이 붙여 둔 비서와 함께 사라졌다.

“자, 가 볼까.”

해승이 탄 차가 멀어지고 나서 희윤도 몸을 돌렸다. 공기 중에 습기가 묻어났다. 바야흐로 장마의 계절. 하늘도 어딘지 모르게 맑은데도 부옇게 보였다.

고작 몇 분 서 있지도 않았는데 땀이 밴 이마를 닦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낮이라 그런지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류장에 있는 커다란 광고에 힐끔 시선을 주었다가 등을 보이며 기다란 의자에 앉았다. 희윤이 외면한 광고는 다름 아니라 그만 단독으로 촬영했던 사진이었다.

해승이랑 둘이 있는 건 그래도 보기에 좋았는데, 혼자 담긴 광고는 영 어색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버스가 어디쯤 왔을까 해서 전광판을 봤다가 또 움찔했다. 움직이는 화면에 이번에는 해승의 모습이 연속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잘생겼네.”

저도 모르게 말을 뱉다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버스가 올 때까지 희윤은 해승의 모습이 떠 있는 전광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후 희윤은 동네까지 가는 마을버스가 있는 시간이 아니라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하차해 동네까지 걸어갔다. 낮 기온이 높은 탓에 언덕에 오르자 머리며 목덜미가 뜨끈뜨끈해졌다. 희윤은 눈을 가늘게 뜨며 턱에 흐른 땀을 닦았다.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너머로 작은 슈퍼가 보였다. 늘 그렇듯 그곳에는 평상이 있었다. 길게 그림자가 진 평상을 보니 앉아서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희윤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슈퍼로 갔다.

“어서 오세요. 아이구, 희윤 군. 오랜만이야!”

화려한 꽃무늬가 프린팅된 날염 티셔츠를 펄럭이며 선풍기 바람을 맞던 안동댁이 희윤을 보고 반색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그럼, 그럼. 별일 없이 지냈지. 어째 희윤 군은 만날 때마다 신수가 점점 더 훤해지는 것 같아.”

희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냉장고로 걸어가 음료수를 살폈다. 마침 자주 마시는 탄산음료가 눈에 띄어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요즘 자주 같이 다니는 사람은 어디 가고?”

“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서 따로 왔어요.”

“그렇구먼.”

안동댁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연예인이라고 했던가?”

며칠 집을 비웠던 희윤이 훤칠한 미인과 나타났을 때, 동네 사람들은 전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희윤이 이곳에 온 이후 누구 아는 사람을 데려온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더 호기심이 간 것이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눈에 확 뜨일 정도로 미인이라서 동네에서는 해승의 신분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다 나온 상태였다.

“아뇨. 제…… 담당 가이드예요.”

그렇게 말하는 게 입술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희윤은 목덜미를 손으로 쓱 문질렀다.

“가이드?”

눈을 끔뻑이던 안동댁이 뒤늦게 “아. 그거!” 했다. 괴물체가 나타나고, 이능력자가 각성한 지도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는 뭔가 별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그랬기에 저런 더딘 반응을 희윤도 이해했다. 그도 본인이 에스퍼가 되기 전까지는 어디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일처럼 생각했으니까.

“그러게. 그러고 보니 희윤 군도 에스퍼인가 뭔가였지.”

희윤은 이번에도 말없이 입꼬리만 슬쩍 당겨 보였다.

“그나저나 잘됐다. 혹시 시간 괜찮나?”

“네. 뭐 배달할 거 있으세요?”

희윤이 단박에 알아듣고 묻자, 안동댁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어어. 별건 아니구. 저기 저 라면 한 봉지랑 빨랫비누랑 그 옆에 치약이랑 영수 할아범네 좀 가져다줘.”

“계산은요?”

“받아다 주면 좋구.”

“그럼 이따가 들를게요.”

희윤을 신뢰하는 안동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희윤은 군말 없이 봉투에 안동댁이 말한 물건을 담고 슈퍼를 나왔다.

“이따 뵐게요.”

“응. 고마워, 희윤 군.”

안이나 밖이나 후텁지근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늘진 평상에 앉아 미지근하나마 바람을 맞으며 음료수를 마시고 있으려니 기분은 썩 좋았다.

바닥에 내려놓은 다리를 쭉 뻗던 희윤이 순간 멈칫하며 아래를 봤다. 불쑥 떠오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지?”

제가 준 탄산음료를 마시며 짧은 다리를 달랑거리던 어린 소년.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더 떠오르는 건 없었다. 다 마신 캔을 평상 아래 휴지통에 넣는데 뒷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어떻게 지내니? 오후 1:51]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문자가 왔다. 하지만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인 희윤은 이게 며칠 전 것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잘못 보낸 걸 모르나.”

그런 거라면 상대가 틀렸다고 알려 줘야 할 텐데. 고민하다가 그냥 도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꽂았다.

고작 두 번 문자가 잘못 왔다고 연락하는 건 괜한 오지랖이었으니까.

가는 길에 영수 할아버지에게 물건을 배달해 주고 엉덩이 토닥거림을 받은 후 집으로 향했다. 여름이라 그런지 그간 관리가 소홀했던 마당은 잡초가 가득했다.

곧장 마루에 걸어 둔 커다란 챙모자를 쓰고, 창고에서 낫을 꺼내와 풀부터 벴다. 씁쓸한 풀냄새를 맡으며 한껏 달아오른 마당에 시원하게 물을 뿌렸다.

그 후 창문과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키면서 걸레를 들고 구석구석 먼지를 닦고 청소했다. 사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마당보다 집 안이 오히려 깨끗한 편이었다.

“으아, 덥다.”

정리를 모두 마치고 희윤은 마당에 벌렁 드러누웠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슬레이트 지붕 너머로 보였다.

물 한 잔 마시고 땀을 좀 더 식힌 후 집을 나섰다. 그러다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이 인상을 쓴 채 걸어오는 걸 발견했다.

하나는 낯설지만 다른 쪽은 어째 얼굴이 익었다. 다름 아니라 작년부터 재개발 문제로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하는구나.’

그 때문에 잡음이 꽤 제법 있었는데 분위기를 보니 어떻게든 견해차를 줄인 듯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멀뚱히 서 있는 희윤의 가까이 와 있었다.

“이 집 주인 되세요?”

그중 희윤도 낯설지 않은 남자가 말을 걸어 왔다. 희윤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 이제야 만났네요. 대체 몇 번을 왔다 갔다 한 줄 아세요?”

남자는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뒤에 서 있던 그보다 더 젊은 사람에게 눈짓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파일철을 희윤 앞으로 쓱 내밀었다.

뭐냐는 눈으로 쳐다봤더니 젊은 사람이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쯧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보시는 것처럼 재개발 동의서입니다.”

그 아래 동의자 성명, 생년월일, 주소, 권리 내역 부분에 토지랑 건축물 허가 여부, 면적을 적으라고 되어 있었다.

희윤이 내용을 쓱 읽고 눈을 들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말했다.

“여기 주민들 거의 다 써서 제출했어요. 확인해서 작성하세요. 내일 찾으러 오겠습니다.”

“내일요?”

“바쁘시면 뭐 우편함에 꽂아 두셔도 되고요.”

희윤의 질문에 남자가 귀찮은 얼굴로 녹슨 우편함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러더니 도로 시선을 젊은 사람에게 돌렸다. 얼른 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희윤은 얌전히 동의서를 받아 들었다.

“자. 여기 명함. 혹시 뭐 궁금한 거 있으면 이쪽으로 물어보세요.”

끝까지 불성실한 태도로 남자가 명함을 쓱 들이밀었다. 희윤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가 이번에도 말없이 받았다.

그것으로 용건이 끝났다는 듯 두 사람은 그대로 사라졌다. 남은 희윤만 멍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지이잉. 지이이잉. 지잉.

넋을 놓고 마루에 앉은 희윤 옆에서 스마트폰이 온몸을 떨어 댔다. 몇 번이고 반복되던 진동은 그쳤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스마트폰이 제 존재를 알리려 애쓰건만 정작 그 주인은 멍하니 마당 어느 한 지점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하…….”

하늘 위로 노을이 지고 나서야 희윤은 한숨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시선을 무릎으로 내렸다. 그 위에는 건설사 직원이 무작정 주고 간 동의서가 놓여 있었다.

“모르던 것도 아니고.”

이미 작년부터 계속 실랑이가 있었다. 하지만 다들 어차피 건설사가 원하는 대로 되리라는 건 짐작했다.

아무리 이곳에 오래 살았어도 실제 땅의 주인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으니 제대로 권리 주장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희윤이 동의서를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을이 깔린 집은 평소보다 더 따스한 분위기와 쓸쓸한 느낌을 동시에 전해 주었다.

그래도 이곳은 오갈 데 없어진 희윤을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 준 공간이다. 비록 고생한 기억도 많이 쌓아 둔 곳이기는 해도, 할머니와의 보금자리가 아니던가.

희윤의 시선이 다시금 동의서로 향했다. 역시 당장은 저 종이에 무언가를 쓰기는 힘들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동의서를 쥔 채 집을 나섰다. 훔쳐 갈 것도 없지만 대문도 꼼꼼하게 잠갔다. 튼튼한 자물쇠는 희윤을 따라왔던 해승이 달아 준 것이었다.

허술한 대문도 바꿔 달겠다는 걸 간신히 말리던 장면이 잠시 떠올라 희윤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머물렀던 덕분에 공터에 막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서둘러 안동댁에게 돈을 전달하려 슈퍼로 향하던 희윤은 평상에 앉은 기다란 인영을 발견했다.

“……어?”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희윤은 그게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해승아?”

혼잣말하듯 희윤이 작게 해승을 불렀다. 당연히 해승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두 팔로 평상을 디디고, 두 다리를 장난치듯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그건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럽게 보였다.

“여긴 어떻게…….”

평상으로 다가간 희윤이 해승 앞에 섰다. 자연히 해승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해승이 얼굴을 들어 희윤을 바라보았다.

“전화는요.”

해승이 나직이 물었다.

“아.”

희윤은 서둘러 스마트폰 액정을 터치해 보았다.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뿐 아니라 메신저 앱에도 읽지 않았다는 표시가 여럿 떠 있었다. 동의서를 받아 들고 생각에 잠겨 있느라 전화도 메시지도 온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미안. 몰랐네.”

“괜찮아요. 여기 있는 거 알았으니까.”

추궁하듯 말해 놓고 해승은 희윤이 사과하자 선선히 웃어 보였다. 다행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희윤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여기서 오래 기다린 거 아냐?”

해승은 그 말에 살짝 눈을 키웠다. 그러다 이내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희윤이 자신을 생각해 주는 것이 못내 기분이 좋았다.

“그럼. 사과의 의미로 탄산음료 하나 사 주세요.”

“음료수?”

“네. 형이 좋아하는 거로.”

희윤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슈퍼로 들어갔다. 안동댁은 6시쯤 방송하는 농촌 예능을 보고 있었다.

희윤이 수금한 돈과 음료숫값을 내밀자 안동댁이 일부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음료수는 수고비.”

망설이는 희윤을 힐끔 보고 안동댁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뭐 부족해? 배고프면 저기 과자라도 더 가지고 가든가.”

“아……. 아뇨. 아니에요.”

당장이라도 과자 하나를 집어 줄 것 같은 모습에 희윤은 서둘러 남은 돈을 챙겨 넣었다.

“근데 저 앞에 앉은 총각, 희윤 군 가이드인지 뭐시기지?”

희윤을 가만 올려다보던 안동댁이 문 너머를 힐끔 보더니 물었다.

“네. 맞아요.”

“저기 혹시 둘이 좀 특별한 사이야? 친구? 설마…… 애인은 아니지?”

안동댁의 말투가 어쩐지 조심스럽게 들렸다.

“아뇨, 아니에요.”

애인이라니. 희윤은 두 손을 빠르게 저으며 부정했다. 순식간에 제 귓불이 뜨거워진 게 느껴졌다.

“흠……. 그래?”

안동댁이 묘한 눈으로 희윤을 바라보았다.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그녀는 희윤의 성격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저렇게 반응하는 걸 봐서는 분명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밖에 가이드라는 청년은 누가 봐도 희윤이 오기를 기다리며 몇 시간째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럼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아직 ‘썸 타는’ 사이인가. 속으로 생각한 안동댁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중에 한 번 소개해 줘.”

“네, 네…….”

소개해 달라는 게 어떤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동댁은 그 반응을 보며 다시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얼른 가 봐.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아까요?”

“응. 2시간은 훌쩍 넘었을걸?”

희윤의 시선이 절로 평상에 앉은 해승에게로 향했다. 아까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을 때, 최초로 걸어 온 건 불과 30분 전이었다.

그럼 해승은 그 전부터 여기에 앉아서 희윤의 연락을 먼저 기다렸다는 게 된다.

“네. 저 그럼 가 볼게요.”

“응. 그래.”

희윤은 서둘러 슈퍼를 나와 평상에 다가갔다.

“자.”

희윤이 해승의 앞에 캔을 내밀었다. 냉장고 속에 있다가 높은 기온을 맞닥뜨린 표면에는 송골송골 물기가 맺혀 있었다.

해승의 손이 다가왔다. 희고 긴 손가락에 쥐어지는 캔을 보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희윤 역시 눈을 돌렸다.

그대로 해승과 마주했다. 왜인지 그 검은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형. 아직도 기억 못 하죠.”

“응?”

가만히 보고 있는데 해승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기억 못 하느냐고? 뭘? ‘아직도’라는 걸 보면, 해승과의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소리인데…….

희윤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도무지 해승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긴 누구에게는 특별한 순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스치듯 가벼운 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죠.”

웃으며 말하는데 왜 그걸 기억하지 못하냐고 핀잔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안 가르쳐 줄 거예요.”

기껏 사람을 궁금하게 해 놓고, 해승이 해사하게 웃으며 탄산음료를 가져갔다.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풀 탭이 열리고, 해승의 입가에 캔이 닿는 게 보였다.

희윤은 멀거니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뒤늦게 제가 해승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하늘은 어느새 까만 저녁으로 물들어 있었다. 대신 조금 전까지의 노을빛은 희윤의 귓가를 잔뜩 붉게 물들였다.

단숨에 캔을 비운 해승이 희윤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어?”

엉겁결에 앞으로 당겨진 희윤은 털썩 평상에 앉아 버렸다. 졸지에 해승과 나란히 앉고 보니 아까 대기 중이던 버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때까지 버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세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왜일까. 불쑥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던 건.

막 여름이 시작되던, 유난히 덥게 느껴지던 어느 날. 하굣길에 음료수 캔을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희윤은 익숙한 평상에 동네에서 못 본 낯선 존재가 앉아 있던 걸 발견했다. 바닥에 다리가 닿지 않아 동동 구르던 소년이었다.

고작 10대 초반쯤 되었을까. 인형처럼 예쁜 얼굴도 얼굴인데 어딘지 모르게 다가오는 저녁 무렵의 분위기와 너무도 잘 어울려 더욱 눈길이 갔다.

외롭고 쓸쓸해 보여서.

그게 꼭 부모님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이곳에 떠밀려 온 저와 닮아 보여서.

희윤은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소년에게 다가갔다. 목이 말라 보이는 소년에게 손에 쥐고 있던 탄산음료를 전해 주고, 보호자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소년을 찾으러 온 보호자와 함께 무사히 돌아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와 달리 걱정해 주고, 데리러 올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게 끝난 인연이었기에 자연히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졌는데.

“그러네. 너였구나. 그게.”

세단을 향했던 눈길이 해승에게 향했다.

“매칭 테스트가 힘들어서 그랬던 거였어.”

연이은 말에 해승의 눈빛이 반짝반짝해졌다. 희윤이 조금씩 저를 떠올리는 것이 매우 기쁘다는 듯.

“아니면 전에 말했던 대로 네게 무례하게 굴었던 에스퍼를 피해서 왔던 건가.”

“이제 기억나요?”

질문하는 목소리도 한층 밝아졌다. 희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납치당했던 날이었어요.”

“아…….”

“전에 말했다시피 큰일은 없었어요. 고작 2시간이었을 뿐이죠. 근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고요. 본부가 아닌 어디로든 가고 싶은데 집으로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수중에 돈이 있어서 어디 멀리 떠날 수도 없고.”

해승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무작정 본부를 나와 걷기 시작했다고. 그러다가 도착한 곳이 희윤이 살던 동네라고.

“그랬구나…….”

“그거 알아요?”

“응?”

“사실 나, 형 찾으러 여기 한 번 더 왔었어요.”

해승이 장난스럽게 발을 구르며 말했다. 살며시 눈매를 접어 웃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날?”

“네.”

‘왜?’ 하는 눈으로 희윤이 해승을 돌아봤다. 이쪽을 보고 있었을까. 밤하늘처럼 고요한 눈빛과 그대로 마주했다.

“고맙기도 했고.”

해승이 다시금 눈을 휘어 웃으며 답했다. 희윤이 제 에스퍼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한 번만 손을 잡아 보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근데 집도 모르겠고, 여기서 무작정 계속 기다릴 수도 없고. 결국 못 만나고 갔어요.”

“미안.”

정말 속상하다는 듯한 해승을 보니 절로 사과가 나왔다. 희윤의 사과가 뜬금없었는지 해승이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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