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왜요.”
“만나러 왔었다며.”
“네. 근데 뭐 연락처도 사는 곳도 몰랐잖아요. 저도 애써 더 찾아보지 않았고요. 그냥 30분 정도 여기 앉아 기다리다가 갔어요.”
사실 몇 시간이나 평상에 앉아서 기다렸었다. 아버지의 비서가 안절부절못하고 몇 번이나 이만 가 봐야 한다고 말할 때까지 말이다.
“그랬구나.”
희윤도 그때쯤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라 선명하게 생각나는 건 없었다. 아마 시간이 엇갈려 만나지 못했겠지.
새삼스럽게 아쉬움이 밀려왔다. 만약 그때 해승과 다시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고. 에스퍼로 각성하기 전이었으니 지금과 같은 관계는 아니었겠지만.
어쩌면 자신이 에스퍼라는 걸 좀 더 빨리 알게 되고 해승과 담당을 맺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지금쯤은 담당이 아닌 전담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희윤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형?”
“어? 아, 아냐. 아니야.”
뭐라 물은 것도 아닌데 한껏 당황한 희윤을 보며 해승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는 숫제 귀에서부터 볼과 목덜미까지 발갛게 변해 있었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해승이 저를 다시 만난다고 해서 반드시 지금보다 더 관계가 발전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터무니없는 상상이었다.
“근데 그건 뭐예요?”
희윤을 물끄러미 보던 해승이 뒤늦게 손에 들린 종이를 발견하고 물었다. 희윤도 그쪽을 봤다가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재개발 동의해 달라고 찾아왔더라고.”
“제가 봐도 될까요?”
어려운 일도 아니라 희윤은 기꺼이 종이를 건넸다. 해승이 조용하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오래 볼 것도 없었다.
“이름이랑 서명만 해서 저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
“네가?”
“네. 이거, 이거. 이 부분. 형도 잘 모르지 않으세요?”
희윤의 시선이 해승이 손가락으로 짚은 부분을 따라갔다. 면적이니 평수니 하는 부분이 보였다.
“그러게. 이건 주민센터나 구청 가서 물어봐야 하나…….”
계속 살던 집이지만 아는 게 없었다. 평소에 그런 걸 관심 두지도 않았고. 해승의 말마따나 모르는 부분이라 적어 두려면 관청에 들러야 할 듯했다.
“형은 바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가 나 대신 일일이 하려면 귀찮지 않겠어?”
“제가 할 리 있어요? 저도 다른 사람 시킬 거니까 걱정 마세요.”
해승이 아주 당당하게 남에게 일을 미루겠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희윤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동의서를 곱게 접어 제 품에 넣었다.
“이런 자잘한 일은 앞으로도 형한테 갈 것도 없이 정리할 테니 형은 저만 신경 써 주세요.”
“너만 신경 쓰라니.”
심장에 가히 좋지 않은 소리다. 가뜩이나 요즘은 해승의 말과 표정에 흔들릴 때가 많은데.
“솔직히 형이 요즘 저한테 소홀해졌잖아요.”
“뭐? 내가 언제?”
“언제긴요. 얼마 전에만 해도 오전에는 조사팀 일 처리한다고 바쁘고, 오후에는 조 이사와 훈련한다고 지하 훈련장에만 있고. 가끔은 점심도 안효정이랑 약속 있다고 절 버려두고.”
“아니, 그건…….”
투정을 부리듯 나온 말은 하나같이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당연히 그거야 업무 때문에 그런 거 아니겠는가. 특히 조 이사와는 지도를 받고 있기에 매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괴물체 신고가 들어와 출동할 일이 생기면 해승과 만날 수 있겠지만, 그도 아니라 희윤도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 아냐.’
불쑥 끼어든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희윤이 얼른 부정했다.
“출퇴근 꼬박꼬박 같이하고, 저녁도 너랑 먹고, 같이 집에 가잖아.”
“그러니까요. 그것까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응?”
뭔가 지금 대답이 묘한 것 같은데. 희윤이 의아한 얼굴로 해승을 바라보았다. 해승이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생긋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쭉 같이 지내요. 같은 부서라면 좋을 텐데 그건 안 되니까.”
아무래도 이상하다. 꼭 뭔가 잘못 걸린 것 같은데. 근데 그게 뭐인지 콕 집어서 말할 수가 없다.
희윤은 대체 이 위화감이 뭔지 알아낼 수가 없어 영 찜찜했다.
“일단 그럼 돌아갈까요? 이제 슬슬 배도 고픈데 저녁도 먹고요.”
“아, 응.”
해승이 일어나며 하는 말에 희윤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많이 늦긴 했다. 원래는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차에 오른 둘은 가까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란히 집으로 돌아왔다. 번갈아 가면서 씻고, 영화 한 편을 틀어 놓고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늦은 밤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형.”
“응?”
“전 지금도 좋아요.”
“뭐가.”
“이렇게 형이랑 같이 있는 거요. 그때 만나지 못해서 아쉽긴 했지만.”
“아…….”
평상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형이 내 에스퍼가 되어 다시 날 찾아왔잖아요?”
내 에스퍼라니. 간질간질한 표현에 또 주책맞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눈을 감는데 옆에서 뒤척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희윤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숨까지 조용히 죽였다.
“사실 본부에서 형 처음에 만났을 때요. 그때부터 눈에 확 들어왔어요.”
하지만 해승의 말에는 결국 눈꺼풀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네. 저랑 복도에서 만났잖아요.”
아, 그랬지. 희윤도 그때를 기억한다. 행정 직원을 따라 이동하던 중에 오후 볕을 받고 서 있던 매혹적인 미인을.
그러다 EST실에 나타난 해승을 보고 놀랐었다. 물론 그전에 안효정이 질색해서 대체 누구인가 궁금한 게 먼저였지만.
“그때 네가 요청한 거였어?”
“네. 도저히 참을 수 없었거든요.”
여전히 웃는 얼굴이 화사했다. 어째 불을 꺼 둔 상태로도 해승의 얼굴은 또렷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그때 만난 사람이라는 건……. 아, 데려다주며 알았겠구나.”
희윤은 묻다가 스스로 답을 찾았다. 해승이 저를 이 동네에 바래다준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혹시 하는 생각을 했겠지.
해승은 알아서 상황을 정리하는 희윤을 보며 그저 미소만 띠었다. 언젠가 말할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제가 처음 본 날에 희윤에 관한 정보를 다 가져오라고 지시했던 걸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맞아요. 그래서 이쯤이면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에스퍼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이, 매칭률까지 높은 데다 어릴 때 방황하던 저를 묵묵히 지켜봐 준 사람이라니.
“민망하네.”
희윤이 베개에 괜히 머리를 비비며 웅얼거렸다. 어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운명이라니.
가끔 보면 해승은 정말 뻔뻔할 정도로 당당할 때가 많았다.
* *
장마가 시작되었다.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비가 내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하늘은 연일 회색 구름에 덮여 있었다.
희윤은 며칠 새 괴물체가 출현했다는 신고로 벌써 세 번이나 출동한 상태였다. 물론 세 번 중 실제로 괴물체가 나타난 건 단 한 건도 없었다지만.
그건 김이 빠지면서도 다행한 일이었다.
“서울에는 괴물체가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었죠?”
네 번째 출동 역시 멧돼지를 괴물체로 착각하고 신고하여 출동한 후 조사팀으로 돌아온 희윤이 옆자리에 앉은 에스퍼에게 물었다.
“딱 한 번 있었어요. 20년 전에.”
염동력 속성 에스퍼가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한 채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있었어요?”
“네. 서울이라기보다는 수원이랑 살짝 걸친 곳이었죠.”
수원이라는 말에 잠깐 멈칫했던 희윤이 다시금 물었다.
“어떤 특성을 갖고 있었어요?”
에스퍼처럼 괴물체도 여러 특이 사항이 존재했다. 지난번 갯벌에서 출몰한 짱뚱어를 닮은 녀석처럼 땅속에 파고들었다가 튀어나오는 개체가 있는가 하면 거대 멧돼지처럼 생겨서 불을 뿜는다거나 강이나 바다에서 어마어마한 해일이나 홍수를 일으키는 괴물체도 있었다.
“두더지 같은 놈이었어요.”
“두더지요?”
“네. 전에 갯벌에 나왔던 것처럼. 땅을 헤치고 다녔어요. 그것 때문에 그 일대에 구덩이가 파이고 건물은 붕괴되고 난리가 났다고 하더라고요.”
뉴스도 대대적으로 방송해서 영상이 있다며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에스퍼가 덧붙였다.
“하지만 대부분 도심보다는 산이나 들, 갯벌, 바다, 강 등에서 발생하는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죠.”
“왜 그럴까요?”
“글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도 밝히지 못하긴 했어요. 뭐 다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죠.”
하긴 도심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필연적으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피해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희윤은 염동력 속성 에스퍼가 말했던 20년 전 사건의 영상을 검색하면서 왜 괴물체가 출몰하게 되었는지도 의문을 가졌다.
“괴물체가 처음 출몰한 게 30년 전이었죠.”
“맞아요. 부산 바다에 해일을 일으킨 개체가 시초였죠. 처음에는 지진으로 생긴 해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거대한 괴물체가 해저에서 튀어나오느라 생겨난 거였어요.”
두 사건의 영상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몇 번 더 다른 사건들을 보던 희윤은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리가 자리인 탓에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이 훤히 보였다. 희윤과 마찬가지로 상석에 앉아 그쪽을 살피던 조사팀 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인천지부 에스퍼들이네요?”
“인천지부요?”
“네. 무슨 일로 왔지?”
조사팀 팀장이 희윤의 말에 대꾸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희윤이 합류한 조사팀 인원은 총 여섯 명. 대부분 1년 이내로 연차수가 짧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건 조사팀 팀장인 C급 바람 속성 에스퍼 전희경이었다.
나이는 37살, 각성은 16살에 한 그녀는 성인이 된 스무 살부터 서울과 수도권의 여러 지부를 옮기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었다.
그랬기에 전 팀장은 어렵지 않게 엘리베이터를 탄 무리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전국대회 때문인가.”
전 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전국대회요?”
“어. 연희윤 에스퍼는 아직 모르죠. 매해 10월에 서울에 있는 지부들끼리 대회를 열어요. 운동은 아니고 에스퍼 대결이죠.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아마 전국체전 같은 건가 보다. 희윤은 그렇게 이해했다.
“대회가 크다 보니까 날짜와 참여 공지를 어떻게 할지 미리 회의하는데, 아마 오늘이 그날인가 봐요.”
“아.”
희윤의 시선이 잠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문은 닫혀서 에스퍼들의 모습은 더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화면 하단에 메신저 앱 팝업이 쓱 나타났다.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한 희윤이 망설임 없이 클릭했다.
[해승 : 형, 바빠요? 오전 10:47]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업무 중인 사람한테 바쁘냐고 묻다니.
희윤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답을 보냈다.
[나 : 아니. 괜찮아. 오전 10:47]
현재 사무실에는 전희경과 B급 염동력 속성 에스퍼뿐이었다. 다른 세 명은 각각 괴물체 의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상태였다.
곧바로 메신저 앱이 반짝반짝 빛나며 팝업이 떴다.
[해승 : 저도요. 형, 오늘은 밖에서 먹을까요? 오전 10:47]
[나 : 먹고 싶은 것 있어? 오전 10:48]
[해승 : 비 올 것 같으니까 칼국수 어때요? 오전 1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