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쉼 없이 수다를 떠는 가이드들 틈에 껴 본부로 돌아오던 정소한의 시야에 길쭉길쭉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연희윤 에스퍼랑 표해승 가이드.”
“그러게요. 매일 저렇게 딱 붙어 다니고. 정말 전담이라도 할 것 같지 않아요?”
“저대로 1년만 무사히 지나면 전담도 영 틀린 말은 아니죠. 아마 간부들도 저 두 사람이 기간 채우기를 바라고 있을걸요?”
가이드들은 속닥속닥하면서 정소한의 눈치를 봤다. 걱정과 염려와 호기심과 질투, 안타까움과 조소가 그들의 눈빛에 뒤섞여 있었다. 정소한은 애써 모른 척 나란히 걸어오는 희윤과 해승을 보았다.
대체 무슨 대화를 하기에 웃음이 지워질 새가 없는 걸까.
“둘이 매칭률도 엄청 높잖아요. 그쯤이면 예외로 해서 더 전담 맺을 거라는 소리도 있어요.”
“하긴 연희윤 에스퍼는 표해승 가이드한테만 가이딩 받는다면서요.”
“그도 그렇고. 또 전처럼 다른 지부에서 표해승 가이드를 노릴지 모르니까 이 김에 확 잡아 두려는 거죠.”
“연희윤 에스퍼가 오랜만에 나온 고등급 물 속성이기 때문이란 말도 있어요. 전담을 맺게 되면, 재각성해서 S급을 노려 볼 만하니까.”
정소한이 입술 안쪽으로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희윤에게 가이딩을 해 달라는 연락이 온 적 없었다.
안부를 묻거나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를 나눈 적은 있어도 가이딩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다.
물론 그게 희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부 다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표해승이 문제지.
“전에 둘이 호텔에 간 적도 있다면서요.”
“에이……. 그건 술 마시러 간 거라고 밝혀졌잖아요.”
“그랬나. 그래도 뭐, 벌써 그게 언제 얘긴데. 저 모습 보면 더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아요?”
그때도 그랬다. 기껏 호텔에서 목격한 일을 퍼뜨려 놓았는데, 둘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도리어 그날 이후로 저들의 말마따나 더 친밀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전엔 일방적으로 해승이 희윤을 따라다녔다면, 이제는 희윤도 해승만 찾는 것 같았다.
“정소한 가이드는 뭐 들은 거 없어요?”
그러다 동료 가이드 중 하나가 정소한에게 불쑥 물었다.
정소한은 동료 가이드와도 담당 에스퍼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었다. 워낙 차분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고 본인도 다른 사람과 문제없이 지내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맞지 않는 사람은 하나쯤 있기 마련이었다. 정소한에게 그중 하나가 표해승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 말을 건 가이드였다.
“뭐가요?”
“뭐긴 저 두 사람이요.”
가이드가 턱으로 여전히 화기애애하게 걸어오는 희윤과 해승을 가리켰다.
“어쨌든 정소한 가이드도 연희윤 에스퍼의 담당이잖아요. 가이딩 호출은 없어도 연락은 자주 하지 않으려나? 아니면 그것도 못 해요?”
대놓고 그를 건드리는 말에 다른 동료 가이드가 하지 말라며 팔을 툭툭 쳤다. 하지만 이미 정소한은 얘기를 들은 후였다.
“네. 아시다시피 연희윤 에스퍼 곁에 표해승 가이드가 같이 있어서 제가 가이딩할 기회까지는 없더라고요. 아쉽긴 한데 어쩌겠어요.”
정소한은 분기를 꾹 누르고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래도 연희윤 에스퍼가 먼저 연락도 하고, 이런저런 상담도 자주 하는 편이에요. 아시다시피 표해승 가이드가 좀…… 성격이 유별나잖아요?”
물론 희윤이 정말 그에게 해승의 얘기를 물어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해 봐야 해승과 함께 어디 출동 갔다 왔다는 거나, 훈련을 마치고 해승이 가이딩을 해 줬다는 소리뿐이었다.
그 외에는 정소한이 그저 희윤에게 해승과 잘 지내는지, 가이딩을 하다가 거부감은 없었는지 자신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은근슬쩍 물어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할 수 없으니 약간의 진실을 섞었다.
“하긴. 연희윤 에스퍼도 아마 정소한 가이드가 더 편할 거예요. 표해승 가이드 까다로운 것 우리도 다 아니까. 좀…… 안타깝긴 하다.”
다행히 정소한에게 시비를 건 가이드를 말렸던 다른 가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해 주었다. 그 역시 해승과 같은 팀이기에 아는 것이었다.
“뭐, 정소한 가이드한테는 잘됐죠. 괜히 일만 많아졌다고 그랬잖아요.”
끝까지 얄미운 소리를 하는 가이드에게 정소한이 웃음을 보여 주며 대꾸했다.
“그렇긴 하죠. 그래도 전 누구처럼 편하고 제가 하고 싶은 에스퍼만 골라 하는 그런 짓은 안 해요.”
“뭐라고요?”
정소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비를 건 가이드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왜 화를 내세요. 어디 찔리는 데가 있으신가.”
정소한이 보란 듯이 웃었다.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망가졌고, 같이 있던 가이드들이 두 사람을 말리면서 어서 본부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못 이기는 척 걸으며 정소한은 다시 뒤를 보았다. 그러다 아까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최관우 에스퍼 아냐. 왜 여기에…….’
최관우와 해승이 어떤 관계인지는 정소한도 모르지 않았다. 매칭률은 가이딩을 할 수 있는 수준이긴 했지만, 상성부터 성격까지 최악이라 양쪽 지부에서 담당을 맺는 걸 포기한 케이스였다.
그래도 그와 별개로 둘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좀 있는 것으로 듣긴 했었다.
정소한의 의미심장한 시선은 꽤 오래도록 최관우와 해승에게 머물렀다.
* *
신고를 받고 출동한 희윤은 바닥을 온통 헤집어 놓은 괴물체의 흔적을 발견했다. 풀을 짓이기고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뿐 아니라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망가뜨린 나무나 바위들도 눈에 뜨였다.
들개나 멧돼지 혹은 다른 야생동물이 만들었다기에는 너무 규모가 커 괴물체가 그랬다고 봐야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쪽 어때요, 연희윤 에스퍼?”
희윤과 현장을 살피러 온 전 팀장이 물었다.
“아무래도 동물이 했다고 보기에는 힘들 것 같아요.”
물론 확신하지는 못했다. 희윤은 아직 경력이 1년도 되지 않은 새내기였고, 괴물체를 상대해 본 것도 고작 한 번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장을 살피고, 꼼꼼하게 냄새를 맡다가 보니 묘하게 걸리는 게 있었다. 누린내보다 더 독하고 코를 찌를 듯한 악취.
“흠……. 그렇죠? 신고할 때 커다란 개떼처럼 보였다고 했고요.”
“네. 처음에는 들개인 줄 알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멀리서 목격한 분이 그 개의 눈이 네 개인 걸 발견했다고 하더라고요.”
들개라면 눈이 그렇게 많이 있을 리 없다. 짖는 소리도 묘하게 갯과 동물 같지 않았다면서 음성 파일까지 첨부했다.
그래서 경력이 높은 전 팀장과 고등급 에스퍼인 희윤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만약 짐작한 괴물체가 맞는다면, 웬만한 에스퍼는 물러서는데도 위험이 따를 수 있었으니까.
“팀장님.”
그때 묘한 기척을 알아챈 희윤이 전 팀장을 나직이 불렀다. 전 팀장도 예리하게 눈을 빛내며 어딘가를 쏘아보았다.
크르르르. 크르르르르릉.
마침내 수풀을 헤치며 괴이하게 생긴 소리의 근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다섯 개네요.”
아마 멀리 있어서 하나는 안 보였나 보다. 미간에 세로로 길쭉하게 자리 잡은 노란 눈이 보였다. 위협적으로 번뜩이는 걸 보니 꼭 조명을 켜 둔 것 같았다.
“음. 그러네요. 혹시 몇 마린지 파악 가능한가요?”
희윤에게 대답한 전 팀장이 곧바로 스마트 워치를 통해 물었다. 조사팀은 이 두 사람 외에 드론 조종기를 여러 대 조작할 수 있는 염동력 속성 에스퍼도 먼 거리에서 지원 중이었다.
- 나무가 있어서 아직 파악이 안 됩니다. 근데 생김새가 들개나 하이에나랑 비슷한 걸 봐서는 떼로 다니는 것 같아요. 일단 위험하니까 후퇴해 주세요.
곧 스마트 워치에서 말소리가 나왔다. 드론으로 주변을 둘러본 염동력 속성 에스퍼가 꺼낸 말이라면 예상이긴 해도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크릉.
뒤로 물러나던 희윤과 전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들려온 건 전방에 있는 괴물체가 낸 게 아니었다.
- 뒤에 두 마리 출몰!
스마트 위치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괴물체가 희윤과 전 팀장을 에워싸 버린 것이었다.
“연희윤 에스퍼.”
전 팀장이 긴장한 눈으로 괴물체 떼를 살피며 희윤을 불렀다.
“네.”
“내가 바람으로 정면을 뚫을 거예요. 그럼 연희윤 에스퍼는 곧바로 그쪽으로 달려가세요.”
“팀장님! 혼자서 상대하시는 건 위험해요.”
희윤이 즉각 거부했다.
“공격한 후에 나도 곧바로 도망칠게요. 어차피 우리한테는 드론이 있어요. 놈들이 따라와도 알려 줄 테니까 찢어져요.”
잠깐 사이 괴물체의 수는 더욱 불어났다. 네 마리, 다섯 마리…… 점점 늘어난 숫자는 어느덧 열 마리가 되었다.
- 본부에 긴급 출동 요청했습니다. 두 분 조금만 버텨 주세요!
스마트 워치에서 다시금 음성이 흘러나왔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챈 염동력 속성 에스퍼가 즉각 본부에 연락한 듯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아무리 희윤이 고등급 에스퍼이고, 전 팀장이 베테랑이어도 둘이서 괴물체 열 마리는 버거웠다.
후웅.
매서운 바람이 전방에 있는 괴물체 두 마리에게 달려들었다.
깨갱!
“연희윤 에스퍼, 가요!”
갑작스러운 돌개바람에 강타당한 괴물체 두 마리가 혼비백산하여 갈라섰다. 빈틈이 생기자마자 전 팀장이 외쳤다.
희윤은 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면서도 미리 만들어 둔 물기둥 여러 갈래를 날려 전 팀장에게 덤벼들려는 괴물체를 저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필사의 도주가 시작되었다.
허억. 헉. 헉.
바위를 타고 넘어 그 뒤로 숨어든 희윤이 거칠게 숨을 뱉었다. 산비탈을 무작정 타고 넘느라 얼마나 뛰어온 건지 거리 파악이 되지 않았다.
도주 중 괴물체와 여러 번 싸우면서 옷 여기저기가 베이고 찢겨 엉망이었다. 이마와 볼은 흙과 먼지로 범벅이었고 머리칼도 땀에 푹 절어 있었다.
희윤은 거칠어진 숨을 꿀꺽 삼키고 하늘 위를 봤다. 드론 세 대가 허공에 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 후방 11시 30m 괴물체 4마리.
희윤이 올려다보는 걸 알았는지 염동력 속성 에스퍼가 괴물체의 위치를 알렸다.
“팀장님은요?”
- 산 아래쪽으로 도주 중입니다. 걱정 말아요. 연희윤 에스퍼보다 안전해요.
몇 마리나 따라붙었느냐고 물어보려는데 바스락하는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크르르르.
괴물체의 목울음도 이어졌다.
30m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도착이 이르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희윤이 엄폐물로 사용한 바위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는 정면.
괴물체 세 마리가 추가로 나타난 것이었다. 하나같이 다섯 개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 이런, 주위에 괴물체 세 마리가 더 있어요!
염동력 속성 에스퍼가 상황을 알렸을 땐 이미 희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팀장님 따라갔던 괴물체들이에요?”
- 아뇨. 새로 나타난 것 같아요.
그 말은 앞으로 몇 마리가 더 추가될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본부는요.”
- 거의 다 도착…….
염동력 속성 에스퍼가 채 대답하기 전. 정면에 있던 괴물체 두 마리가 희윤에게 달려들었다. 희윤은 물로 만든 창 두 개를 각각 날리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깨갱!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한 괴물체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노련하게 물로 만든 창을 피하고 희윤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휘둘렀다.
“윽!”
어깨에 날카로운 발톱이 스치고 지나갔다. 희윤은 신음을 삼키며 다시 창을 만들어 괴물체에게 날렸다.
하지만 괴물체는 공중제비하듯 희윤의 공격을 피해 버리고 다시금 날 듯이 접근했다. 아무래도 몸을 피할 타이밍은 되지 못할 듯했다.
희윤의 눈동자가 파랗게 물결치는 순간 바닥에서부터 물의 장막이 솟아올랐다.
촤아악.
크애액. 캑!
괴물체가 벽에 머리를 박았다. 물속에 갇힌 괴물체는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소용돌이치듯이 움직이는 물살 때문에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컹! 컹컹! 컹컹컹컹!
물창을 맞고 바닥에 처박혔던 괴물체가 크게 짖었다. 기다렸다는 듯 희윤을 쫓던 네 마리가 바위 위에서 등장했다.
- 뒤 조심해요!
염동력 속성 에스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동시에 바위에서 괴물체 두 마리가 희윤에게 달려들었다.
미리 경고를 받은 덕에 희윤은 아까보다 더 두꺼운 물줄기를 쏘아 내 괴물체를 방해하며 몸을 물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먼저 공격한 두 마리를 피하자마자 다른 두 마리가 곧바로 뛰어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 연희윤 에스퍼!
스마트 워치에서 전 팀장의 외침이 들렸다. 희윤은 저도 모르게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 짧은 틈을 괴물체는 놓치지 않았다.
“으윽!”
빠르게 튀어나온 괴물체가 희윤의 어깨를 발톱으로 찢어 놓았다. 아찔한 아픔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곧바로 또 다른 한 마리가 위협적으로 덤벼들었다. 희윤이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종아리에 기다란 상처가 남았다. 주르륵 피가 흘러 흰 양말을 붉게 물들였다.
공격이 먹혔다는 걸 깨달은 괴물체들이 사방에서 희윤에게 덤벼들었다. 가까스로 피하고는 있지만 조금씩 상처가 늘어갔다.
희윤은 이를 악물었다. 이래서야 괴물체의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희윤의 시선이 잠시 저를 따라다니는 드론으로 향했다.
‘차라리 공중으로 날아 버릴까?’
생각을 정리한 희윤의 눈동자가 푸른색으로 반짝 빛났다. 희윤은 물줄기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사방으로 날렸다. 견제 목적으로 날린 공격이기에 치명상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괴물체를 주춤하게 만들긴 충분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희윤은 다시 한번 물줄기를 비수처럼 수십 개 만들어 괴물체 무리에 날렸다.
크액! 깽! 깨갱!
생각지 못한 타격에 괴물체들이 혼비백산하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큰 상처는 입히지 못해도 몸에 뾰족뾰족 박히는 물줄기가 따갑고 성가신 것 같았다.
크엉. 컹.
캥. 캥. 캐액.
사방팔방 뛰며 물 비수를 피하기 바쁜 괴물체를 살피던 희윤의 눈동자가 또다시 파랗게 파랑을 일으켰다.
희윤의 발아래에 흡사 물로 장벽을 만들었을 때처럼 물방울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곧이어 물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 와, 떴어요. 떴어!
스마트 워치에서 염동력 속성 에스퍼의 기막히다는 듯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중계자라도 되는 듯 신난 것처럼도 들렸다.
아닌 게 아니라 물로 만든 구름은 두둥실 떠 올라 건물 2층 높이까지 된 것이었다.
- 뭐라고요?
전 팀장이 무슨 일이냐며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물구름 아래에 괴물체들이 컹컹 짖어 대며 점프하는 게 보였다.
워낙 덩치가 크고 비정상적인 점프력을 가져서인지 괴물체의 뾰족한 주둥이가 물 바닥에 닿을락 말락 했다. 희윤은 좀 더 위쪽으로 이동했다.
- 연희윤 에스퍼가 허공에 떠 있다고요!
염동력 속성 에스퍼가 희윤 대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 팀장에게 전달했다. 여전히 목소리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허공에 떠 있다고요? 연희윤 에스퍼가? 어떻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그 말만으로 현재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는 전 팀장이 불안해하는 말투로 소리쳤다.
- 연희윤 에스퍼, 위치는!
- 팀장님, 거기 계세요. 스탑! 스탑!
전 팀장의 명령과 염동력 속성 에스퍼의 간절한 외침이 연이어 나왔다.
- 더 올라가시면 괴물체 두 마리한테 딱 걸려요!
전 팀장을 놓친 괴물체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그를 찾고 있다며 염동력 속성 에스퍼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경험이 많은 전 팀장은 바람을 이용해 놈들에게 자신의 냄새가 가지 않게 했다.
그랬기에 주변에 있어도 아직 걸리지 않은 거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가까워진다면 기척 때문에 괴물체에게 발각당할 가능성이 컸다.
“저 괜찮아요. 천천히 이동 중이에요. 팀장님 오지 마세요. 위험해요.”
희윤은 온 정신을 물구름을 움직이는데 집중한 채 말했다. 조금만 집중력이 떨어지면 물구름도 허공 중에 흩어질까 봐 얼굴엔 긴장감이 흘렀다.
상상은 금세 능력으로 구현했다.
될지 안 될지 고민하는 것보다 일단 해 보자는, 지극히 희윤다운 생각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본부에서는 지원팀 도착했어요?”
희윤이 저를 따라오는 괴물체들을 힐끔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몇 번 점프해서 달려들다가 공격이 닿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놈들이 물구름을 쫓아오고 있었다.
아까는 일곱 마리. 지금은 다시 세 마리가 추가되어 총 열 마리.
조금 더 높이 올라가면 산 전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으윽.”
생각하는 도중, 희윤은 머리를 바늘로 찌를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 연희윤 에스퍼. 괜찮아요?
대답할 수 없었다. 마치 혀가 마비라도 된 것 같았다. 이마를 움켜쥔 희윤의 어깨에서 뚝뚝 피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보다 다리의 상처가 더 컸다.
희윤의 집중력이 흔들리자 급기야 물구름이 보글보글 기포를 내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 연희윤 에스퍼!
염동력 속성 에스퍼가 희윤을 크게 불렀다.
“아!”
희윤이 신음 같은 탄성을 나직이 흘리며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두통에 흐려졌던 머릿속이 조금 맑아졌다.
- 왜 그래요?
희윤의 상태를 볼 수 없는 전 팀장이 염려스럽게 물었다.
- 연희윤 에스퍼가 아무래도 능력 사용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안정도 몇인지 확인해 주세요.
염동력 속성 에스퍼의 대답이 이어졌다. 뒷말은 희윤에게 한 것이지만 정작 당사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여전히 머리는 찌를 듯이 아팠고, 시야도 몽롱했다.
삐익. 삑. 삑.
그때 손목에 걸린 스마트 워치가 울리기 시작했다.
- 경고! 에스퍼님의 안정도 46%. 안정도가 5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가이딩이 시급합니다.
이어 경고음이 들렸다. 처음 닥치는 상황에 희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연희윤 에스퍼. 조금만 더 버텨요. 지금 본부에서 출동한 에스퍼들이…….
- 경고! 에스퍼님의 안정도 46%…….
- 연희윤 에스퍼. 괜찮습니까?
염동력 속성 에스퍼의 말과 전 팀장의 목소리. 안정도가 떨어졌다는 경고가 연이어 들려왔다. 희윤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느덧 푸르게 빛나는 눈빛에 언뜻언뜻 갈색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물구름이 더 많은 기포를 생성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희윤 형!”
저를 부르는 익숙한 음성에 희윤의 귀가 쫑긋했다. 몽롱하게 변하는 눈동자에도 조금 빛이 돌아왔다.
“형!”
분명 그건 해승의 부름이었다.
‘해승아.’
희윤은 입을 벌려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의식이 까무룩 꺼지는 게 먼저였다. 순식간에 물구름이 흩어지고, 정신을 놓친 몸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