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85)

희윤은 안효정의 메시지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정작 현장에 왔다가 허공에서 떨어지는 절 받아 낸 해승은 화를 냈다.

당분간 출동은 보내 주려나 걱정하는 와중에 이런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희윤은 천천히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오래 앉아 있었더니 몸도 찌뿌둥하고 요의도 느껴져 화장실에 다녀올 생각에서였다.

주의를 둘러보았다. 휠체어도 목발도 병실 한쪽에 잘 세워져 있었다. 문제는 거리가 제법 된다는 것.

“간호사를 부르기는 좀 그렇지?”

응급한 상황도 아닌데. 희윤은 망설이다가 천천히 일어나 보았다. 다리가 좀 뻐근하고 온몸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기분은 들었지만, 걸을 순 있을 듯했다.

절뚝거리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던 희윤이 우뚝 멈췄다.

“해승아.”

해승이 빈 침대 옆 보조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언제 왔어?”

“얼마 안 됐어요. 식사는요?”

“당연히 했지. 넌?”

희윤의 물음에 해승이 고개를 저었다. 희윤은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시침이 10시 가까이에 다가가 있었다.

“이 시간까지 안 먹었어? 뭐 하느라고.”

“그냥요. 입맛도 없고.”

“그래도 챙겨 먹어야지.”

같이 지낼 때는 매일 아침을 먹던 해승이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고 거른 건가 해서 신경이 쓰였다.

“그럼 같이 먹어 주실래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희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승의 얼굴이 한결 더 밝아졌다. 곧장 의자에서 일어난 해승이 희윤에게 다가왔다.

“부축해 드릴게요.”

뭐 하느냐는 눈으로 보자 해승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혼자서 화장실도 다녀왔는데. 하지만 그 말 대신 얌전히 팔을 들었다.

해승의 단단한 팔뚝이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오고, 다른 팔이 허리를 감았다. 바짝 밀착된 몸에서 따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이딩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좋아져 희윤의 입꼬리가 조금 움찔했다.

“형, 불편해요?”

해승이 희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니.”

희윤은 서둘러 고개를 젓고 앞을 바라봤다. 눈을 마주치면 제가 웃었다는 게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해승은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먼 곳을 보는 희윤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옮기다가 발긋하게 변한 귓바퀴도 발견했다. 그간 가이딩을 핑계로 스킨십이 참 많았는데 아직도 이런 일에 부끄러워하다니.

저보다 4살이나 많은 사람의 순진한 행동이 더 귀엽게 느껴졌다.

“그럼 갈게요.”

해승은 일부러 희윤의 귓가 가까이에 입술을 가져가 속삭였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돋은 동그란 귀가 움찔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깨물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으나 조용히 참았다.

병원에 입원하고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그사이 종아리와 허벅지에 감았던 붕대를 풀었고, 어깨의 상처도 거의 아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역시 에스퍼라 그런지 회복력이 남다르네요.”

의사가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신뢰감을 주는 것보단 어딘지 모르게 영업 미소처럼 보였다.

“그럼 오늘 퇴원해도 되나요?”

희윤이 반창고만 남은 상처 부위를 훑어보면서 물었다.

“음. 네, 보호자가 동의하면요.”

돌아온 대답이 뜻밖이었다. 희윤이 얼굴을 들고 의사를 봤다.

“보호자 동의요?”

보통 퇴원은 의사의 소견이 아닌가. 희윤이 의아해하는데 의사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듯 말했다.

“네. 연희윤 에스퍼님 퇴원은 해승 군 권한이거든요. 전 아무런 힘이 없어요.”

너무 태연한 대답이라 오히려 희윤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정작 의사의 눈길은 희윤이 아닌 그 뒤에 있었다.

그제야 희윤은 누군가 왔다는 걸 알아채고 돌아보았다. 화제의 중심에 있는 해승이었다.

“퇴원해요, 형. 집에 가서 편히 쉬어요.”

희윤과 눈을 맞추자마자 해승이 성큼성큼 걸어서 다가왔다. 오늘 그는 민트색 피케 티셔츠에 흰색 청바지를 입은 가벼운 복장이었다.

밝고 환한 분위기를 보니 당장 나들이라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는군요. 그럼 연희윤 에스퍼님. 그동안 고생하셨고, 건강 잘 챙기면서 지내세요.”

기다렸다는 듯 의사가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그러더니 빠르게 병실을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둘만 남게 되자 희윤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이래도 되는 거야?”

“뭐가요?”

“의사 선생님이 너한테 내 퇴원 권한이 있다고 하던데. 그거 의료법 위반 아니냐고.”

강제 입원은 엄연히 법으로 금지된 거 아닌가. 희윤이 들으라는 듯 투덜거리는 소리에 해승이 생긋 웃었다.

“네. 되죠. 어차피 이 병원, 제 거니까요.”

“어?”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말에 희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기. 할아버지가 절 위해서 전담으로 만든 거예요.”

희윤은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값비싼 가구들. 해승의 집만큼 널찍한 병실. 깔끔하게 정돈된 최신식 의료 기기.

바깥으로는 싱그럽고 예쁜 화초와 세련된 벤치, 햇볕을 피할 수 있는 파고라가 곳곳에 놓인 분위기 좋은 정원.

이런 곳이 오로지 해승을 위해 지어졌다니. 세계적인 기업이라 그런지 돈 쓰는 스케일도 참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만 진료하지는 않아요. 그랬다간 세간에서 몰매를 맞으니까. 일반 환자도 받고 있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놀라긴 마찬가지다.

“할아버지가 정말 널 사랑하는구나.”

평범한 소시민인 희윤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득 무릎 옆에 누운 제 머리를 쓰다듬던 거칠고 주름 많던 손이 생각났다. 해승처럼 한없이 지원해 줄 순 없어도 곁에 있기에 누구보다 안정감을 주던 사람이.

“네. 그러니 형도 이제 이 병원을 이용하면 돼요.”

희윤이 과거를 떠올리던 생각을 털어 내며 다시 해승을 봤다.

“나도?”

“네. 제 에스퍼니까요. 형이 원할 때 언제든지 치료받을 수 있게 준비해 두라고 했어요.”

“아니…….”

“괜찮죠?”

해승이 희윤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 걱정이 담긴 손길은 어딘지 모르게 간지럽고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자, 이제 밥 먹어요.”

해승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했다. 그 위에는 각양각색들의 음식이 가득 차려 있었다.

“미리 준비해 둔 거였어?”

“네.”

“내가 먹자는 소리 안 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해승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럼 버리는 거죠.”

“그게 무슨 말이야. 음식 아깝게.”

“그러니까요. 얼른 먹어요.”

해승이 희윤의 앞에 수저를 나란히 내려 주며 말했다. 같이 먹겠다는 게 아니라 해승이 먹는 걸 보려고 온 거였는데 생각하면서도 희윤은 저도 모르게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집었다.

“참. 형. 재건축 동의 서류, 잘 정리해서 넘겼다고 연락 왔어요.”

“아.”

희윤은 아예 새까맣게 잊고 있던 화제를 떠올리고 입을 벌렸다.

“안전 진단 시작하면 건축 심의 들어갈 거고, 동시에 조합 설립하고, 시공사 선정을 할 거예요. 그 후에는…….”

해승이 꺼내는 말 태반을 희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 일로 시끄러울 테니 형, 당분간은 제집에서 계세요.”

그랬기에 자연스럽게 해승이 본인 집으로 가자고 한 말도 그러려니 넘기고 말았다. 그보다는 제 앞에 산같이 쌓이는 고기나 반찬 등을 신경 쓰느라 잘 들리도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낯익은 얼굴이 나타나 퇴원 수속을 끝냈다는 말을 전했다.

“대리 기사님이 아니었구나…….”

희윤이 제게 눈인사를 하는 상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낯익은 얼굴은 얼마 전 해승의 차를 운전해 준 기사였다.

“네. 제 개인 비서예요.”

그렇게 대리 기사의 본래 신분을 알게 된 후 희윤은 제가 살던 곳이 아니라 해승의 집으로 이동했다.

희윤이 ‘내가 왜 여기로 왔지.’ 하는 생각을 한 건, 해승과 침대에 나란히 누워 막 잠이 들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유도 곧 떠올렸다. 재건축 때문에 편히 쉴 수 없으니까 오라고 한 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었던 거야.’

새삼스럽게 해승의 집에서 지낸 시간을 헤아려 본 희윤이 속으로 혀를 찼다. 성인이 될 때까지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을 구할 변변한 친구나 지인조차 없던 희윤이다. 그랬기에 누구의 집에서 신세를 저 본 경험도 없었다.

희윤이 부모님을 제외하고 생애 가장 오래도록 머문 건 할머니 댁이 유일했다. 그것도 본인 선택이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불편한 걸 모르고 있었다는 건, 그만큼 해승이 저를 배려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희윤은 조심스럽게 옆을 돌아보았다. 새액. 색. 조용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해승은 반듯이 누워 자고 있었다.

“…….”

딱 본인다운 잠버릇으로 깨어날 때까지 한 번 뒤척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잠을 깬 후에도 얼굴이나 눈에 부기가 있던 것도 못 봤다. 물론 자다 일어나서 머리는 까치집을 하기는 했어도.

희윤은 괜히 제 뺨을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신경을 썼던 것 같은데 이제 익숙해지고 나니 그조차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해승과 지낼지 모르겠는데, 이제부터라도 좀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희윤도 스륵 잠이 들었다.

* *

다음 날 출근했더니 전 팀장이 반색하며 맞았다.

“희윤 씨! 잘 왔어요.”

전 팀장은 대화를 하면서 희윤의 몸 상태도 확인하는 세심한 모습을 보였다.

“팀장님. 몸은 괜찮으세요?”

“난 보다시피 멀쩡해요. 희윤 씨가 제일 고생했지.”

“저도 깨끗이 잘 나았습니다.”

희윤의 대답에 전 팀장은 한결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윤도 웃으면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출근 시간에 맞춰 왔는데, 대부분 자리가 비어 있었다.

“다른 분들은요?”

“두 사람은 아까 출동 나갔고, 둘은 자료실에 갔어요. 오동리에 출몰했던 괴물체에 관한 서류 찾으러. 희윤 씨는 봤어요?”

“아뇨.”

“하긴 입원해 있는 사람이 그런 것까지 챙기지는 못하죠.”

고개를 끄덕인 전 팀장이 곧 메신저로 링크 하나를 전달했다. 링크를 클릭하자 희윤도 만났던 괴물체의 사진이 상단에 떴다.

“들개처럼 생겼죠. 그래서 이름을 리카온이라고 붙였대요.”

“리카온이요?”

희윤의 시선이 사진 옆에 적힌 명칭으로 향했다.

“네. 아프리카들개를 그렇게 불러요. 물론 몸집이나 생김은 더 무시무시하지. 일단 눈이 다섯 개니까.”

“그렇죠.”

특히 미간 사이에 있는 길쭉한 눈은 공격할 때 사납게 빛나며 더욱 위협을 주기도 했다. 희윤도 그때를 떠올리며 보고서를 읽었다.

“떼로 움직이는 습성이 있고, 암컷이 우두머리라고 하네요. 우리를 공격했던 것들도 야산에 대략 서른 마리가 있었다고 해요.”

“서른 마리요?”

“네. 그것 말고도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공격하는 특성이 있고 낮에 움직이고, 뭣보다 번식이 빠른 것 같아요. 처음에 발견했을 땐 세 마리라고 했잖아요? 그게 불과 한 달 사이에 열 배로 늘어난 거지.”

괴물체이기에 번식이 빨랐던 건지 아니면 종이 그래서 그런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며 팀장이 설명했다.

“본래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인근에서 발견되었던 개체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더운 나라에만 주로 나타난 줄 알았죠. 그런데 이번에 우리나라에 출몰하며 상황이 달라졌어요.”

“아.”

“지금 대대적으로 다른 지부에도 공문에 갔어요. 혹시 이곳 외에도 리카온이 더 출몰한 곳은 없는지. 이것도 다 연희윤 에스퍼가 고생해 준 덕분에 밝혀진 거예요.”

“아니에요. 팀장님 덕분이죠.”

전 팀장이 웃으며 민망해하는 희윤을 위해 주제를 전환했다.

“다음에 그 물로 만들었다는 구름 한 번 구경시켜 줄 수 있죠? 영상은 봤는데, 실제로 보면 어떨지 궁금하더라고.”

물론 그것도 희윤을 부끄럽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희윤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팀장이 다시 작게 웃었다.

“지금 그게 얼마나 화제가 됐는지 모르나 보네요. 하긴 처음에 연희윤 에스퍼가 조사팀에 왔을 때 다들 능력 사용법에 놀라는 모습을 보였는데도 정작 본인은 눈치 못 챘죠.”

“그랬던가요…….”

전혀 몰랐다는 듯 동그래진 눈을 보며 전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알려 주세요. 나도 그렇지만 아마 다른 에스퍼들도 아주 궁금해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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