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85)

저녁 내내 해승과 어디로 휴가를 갈지 얘기하는 건 즐거웠다. 제주도도 좋고, 부산도 좋고, 신안이라는 커다란 섬과 배를 타고 한참 가야 하는 울릉도도 화제에 올랐다.

해승이 아예 해외는 어떠냐는 말에 잠시 혹하기는 했지만, 다음에 가자고 했다. 거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가는 것으로 결정 났다.

“날짜는 8월 중순 이후로 해요. 휴가 결정 나면 메시지 바로 주고요.”

“그래.”

희윤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눈빛은 즐거움과 기대가 담겨 있다는 걸 해승은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가고 싶은 곳은 미리 보세요. 숙소랑 항공권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응. 나도 보탤 테니 얼마 정도 들지 알려 줘.”

해승이 대답 없이 보고만 있자 희윤은 좀 더 단호하게 말했다.

“같이 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비용도 같이 내야지.”

아무리 해승의 자금 사정이 저보다 더 좋다고 한들 여행에서까지 전부 의지할 생각은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정리해서 알려 드릴게요.”

“그래.”

한결 밝아진 희윤의 얼굴을 보며 해승은 남몰래 빙그레 웃었다. 물론 희윤이 원하는 대로 경비가 얼마나 드는지 말해 줄 거긴 했다. 그 금액이 사실은 아닐 테지만.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희윤은 팀장 자리로 걸어갔다.

“팀장님.”

“네. 연희윤 에스퍼.”

커피를 마시며 자리를 정리하던 전 팀장이 부르는 소리에 전 팀장이 옅은 미소를 띠며 희윤을 올려다보았다.

“8월 중순에 휴가를 가려고 하는데 신청할 수 있을까요?”

“아……! 연희윤 에스퍼, 아직 휴가 신청서 안 썼구나. 잠시만요.”

공지에 뜬 인사부의 여름휴가 신청 공지를 빠르게 확인한 전 팀장이 말했다. 보통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받는데, 희윤이 입원 중이었던 터라 전달이 늦은 것이었다.

“물론 가능하죠. 얼른 휴가 신청서 작성해서 저한테 보내 주세요.”

“네.”

“날짜는 다른 에스퍼들 언제 가는지 일정표에 표시해 뒀으니까 그거 피해서 하면 돼요.”

다시 한번 알았다고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가 그사이 절전 모드로 넘어간 모니터를 켰다.

떠듬떠듬 여름휴가 때문에 새로 개설된 메뉴를 찾아 들어갔더니 조사팀의 휴가 일정이 언제인지 달력으로 표시된 게시물이 있었다.

다행히 희윤이 생각한 날짜는 휴가 신청자가 없었다.

“오, 연희윤 에스퍼. 이제야 휴가서 쓰는구나. 언제 가요?”

이제 막 출근한 김동민이 희윤의 모니터를 기웃거리며 말했다.

“8월 20일부터 가려고요.”

“오. 좋다. 어디로 갈 거예요? 그때면 숙소 있으려나? 그래도 극성수기는 지나서 괜찮을 것 같긴 하다.”

“제주는 어때요? 거기도 그때쯤 한가할까요?”

희윤이 김동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제주도? 거긴 비행기 좌석부터 확인해 봐야 할걸? 8월 중순이면 가격도 아직 비쌀 때고, 티켓도 구하기 어려울 수 있어.”

“그래요?”

희윤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냥 휴가만 작성하면 제주도는 쉽게 갈 수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해승이 항공권과 숙소를 알아본다고 했는데, 괜찮을까.

희윤이 걱정스럽게 생각하며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향할 때였다.

“응. 제일 인기 많은 여행지잖아.”

걱정스럽다는 듯 말하던 김동민이 목소리를 팍 죽이더니 질문했다.

“아, 혹시 휴가 표해승 가이드랑 가요?”

“네.”

그 대답에 김동민의 표정이 도로 심드렁해졌다.

“그럼 비행기도 숙소도 걱정 없겠네.”

“네?”

“표해승 가이드가 알아서 할 거 아냐.”

물론 해승이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지 몰라 이유를 알려 주길 원했지만, 김동민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포털사이트를 열어 본인이 여행 갈 여행지를 검색하며 한숨을 푹 쉬었을 뿐이었다.

“나도 특급 호텔에, 전용기 타고 여행 가 보고 싶다.”

아마 해승을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희윤은 무어라 대꾸해 줄 말이 없어 조용히 메신저 앱을 열어 해승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 해승아. 8월 20일부터 가능할 것 같아. 오후 2:10]

[해승 : 네. 저도 그날로 할게요. 오후 2:10]

답장은 곧장 돌아왔다. 아까보다 조금 더 기분이 좋아진 희윤은 휴가 신청서를 열어 차분히 입력했다.

전 팀장에게 전송하는 시간은 출동 보고서를 작성할 때보다는 조금 더 빨랐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자 희윤의 메일함에 휴가 신청이 잘 접수되었다며, 해당 날짜에 잘 다녀오라는 메일이 도착했다.

본부에 제휴를 맺은 리조트나 호텔, 여행사의 정보도 붙어 있는 게 신기해서 오후에는 그걸 보느라 시간이 잘 흘러갔다.

그 외에는 비슷한 일상이었다. 조 이사와 이런저런 훈련을 하고, 종종 연락하는 안효정과 대련하고, 연구 목적으로 쓰일 자료를 정리하고.

종종 조사팀 팀원들이 출동을 가는 걸 배웅하고.

“이상하네.”

그러다 문득 희윤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에게 조사를 가라는 연락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처음이야 업무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다.

또 조 이사가 부쩍 저를 찾아 연구를 도와달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명색이 조사팀인데 이렇게 없어도 되는 건가.

의아한 생각이 들자 역시 물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당장 궁금증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전 팀장도 출동을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사무실에는 희윤과 대각선 자리에 앉은 동료 에스퍼를 빼고 전부 외근이었다.

벌써 시간은 4시를 넘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물어보기에는 그른 듯했다. 커피나 한잔하며 머리를 식혀야지 하는 생각에 사무실을 나왔다.

“…….”

로비로 내려와 카페로 향하다가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었다. 다름 아니라 인천지부에서 왔다는 바람 속성 에스퍼 최관우와 표해승이었다.

“뭐 이렇게 사람 많을 때 제주도냐. 나랑 그리스나 가자. 가서 요트 타고 섬들 돌면서 놀자. 아니면 크루즈는 어때?”

“힘들어.”

“튕기긴. 힘들긴 뭐가 힘들어. 네 비행기 타면 안방처럼 편하잖아.”

“너 갈 수는 있어? 보내 준대?”

최관우가 떼를 쓰듯 말하자 해승이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해승이나 최관우나 S급이다 보니 해외에 가려면 이런저런 제약이 있었다.

“너랑 함께 간다고 하면 당근 보내 주지. 아직 우리 지부장 너 포기 안 했다?”

최관우가 해승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희윤이 보기에 둘은 정말 가깝고 친근해 보였다.

“최관우 에스퍼네요. 저 두 사람은 아직도 사이가 좋은가 봐요.”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정소한이 희윤과 눈을 마주치자 다시 입을 열었다.

“둘이 예전에 담당을 맺은 적이 있거든요.”

희윤의 관심을 사로잡을 만한 주제였다.

“담당을요? 그냥 매칭 테스트만 했던 것 아니었어요?”

“인천지부에서 어떻게든 S급 가이드를 붙잡으려고 밀어붙였거든요.”

“아.”

“무슨 얘기가 어떻게 오갔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일로 잠깐 표해승 가이드가 인천지부에 임대로 가 있었어요.”

정보를 주는 척 말하는 정소한의 눈빛은 음험했다. 그러나 멀찍이 선 해승을 살피던 희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임대요?”

“네. 왜 축구에서 보면 선수들 타 팀으로 보내기도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요. 아예 보내는 게 아니라 기간을 정해서 빌려주는 거죠.”

“S급 에스퍼를 가이딩해야 하니까 그런 거겠네요.”

질문하는 와중에 희윤은 가슴이 콕콕 바늘로 찔리는 아픔을 느꼈다.

“맞아요. 나라에 다시없을 인재잖아요. 아마 지금도 최관우 에스퍼는 표해승 가이드를 노릴걸요?”

희윤의 눈이 덜컹 불안하게 떨렸다. 저절로 시선이 다시 티격태격하면서 대화하는 해승과 최관우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상성이 좋지 않다고…….”

“말이야 그렇지만. 지금도 봐요. 안 좋으면 저렇게 같이 있을 수 있죠. 그리고 두 사람 집안도 서로 친하거든요.”

친하다고? 희윤이 도로 정소한을 보았다. 정소한이 그것도 몰랐냐는 듯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런 몰랐어요? 표해승 가이드가 수호 그룹 회장 가족이잖아요. 최관우 에스퍼의 집안은 그쪽 주요 파트너사거든요.”

그랬구나. 그래서 저렇게 사이가 좋았구나. 어쩐지 둘을 보고 있으니 언제든 다시 담당을 맺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정소한은 제 말에 흔들리는 희윤을 보면서 다시금 속삭였다.

“이건 다들 잘 모르는 얘기인데. 인천지부 지부장님과 표해승 가이드의 어머님이 친척이라고 해요. 그러니 언제든 또 임대 요청이 오면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이건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 다만 그렇지 않겠느냐고 오래전 본부 소속 이능력자들 사이에 암암리에 떠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얘기까지는 해 줄 필요 없을 거다. 정소한의 눈빛이 간교하게 빛났다.

“2년 전에는 상성이 안 좋다는 이유로 떨어트려 놨지만, 그건 지금 다시 해 보면 모르는 일이잖아요? 거기다 이번엔 다시 둘 사이에 잇기 좋은 핑계도 있고요.”

“핑계요?”

“네. 전국 대회요. 그거 핑계로 자주 부딪치니 상부에서도 얘기 꺼내기 편하지 않겠어요?”

두 사람을 보는 얼굴이 더 어둑해지는 걸 본 정소한이 다정히 희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희윤은 카페까지 가서 커피도 마시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섰다. 자리를 피하기 직전까지 장난스럽게 대화하는 해승과 최관우가 눈에 들어왔다.

그건 정소한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계속 머리에 남았다. 덕분에 옆에서 정소한이 무어라 말을 했는데, 정작 희윤의 귀에 남은 건 없었다.

인사도 대충 하는 바람에 정소한의 표정이 굳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의자에 앉자마자 막 마우스를 움직여 절전 모드를 풀자마자 화면 하단에 새 메시지가 왔다며 알림이 떴다. 보낸 사람은 해승이었다.

희윤은 고민하다가 대화창을 열었다.

[해승 : 형, 저 카페 내려왔는데 커피 사 갈까요? 오후 2:32]

아직 최관우 에스퍼와 카페에 있었구나. 해승의 메시지를 읽자마자 먼저 든 생각이었다. 동시에 그런 거에 신경 쓰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스스로 아무 사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왜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나 : 아냐 괜찮아. 조금 전 믹스 타서 마셨어. 오후 2:33]

[해승 : 아쉽네요. 핑곗김에 얼굴도 보려고 했는데. 오늘은 점심도 같이 못 먹었잖아요. 오후 2:33]

우는 토끼 이모티콘과 글자가 아쉬움을 잔뜩 담아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해승에게 선약이 있어서 점심도 함께 먹지 못했었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이유를 묻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최관우와 만나느라 그런 것이었다.

‘일 때문이겠지.’

전국 대회 문제로 본부에 왔다니까. 하지만 해승은 그냥 가이드일 뿐인데 그런 일에도 참여하는 건가.

거기까지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카페에서 도란도란 대화하던 두 사람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희윤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요. 연희윤 에스퍼?”

김동민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뇨. 조금 졸려서요…….”

“하긴 지금 시간이 딱 눈꺼풀 무거울 때긴 하죠. 가서 시원한 얼음 커피라도 타 마셔요.”

김동민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했다. 아까 일어날 때 자리에 없어서 희윤이 카페에 다녀왔다는 건 모르는 듯했다.

“네.”

말 나온 김에 정말 휴게실에서 커피 믹스라도 타 와야겠다고 생각한 희윤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휴게실이 엘리베이터에서 오른쪽 복도 끝에 있어 희윤은 그리로 걸음 했다. 엘리베이터 근처로 다가갔는데, 때마침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희윤은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던졌다가 그대로 우뚝 멈추었다.

“형? 어디 가요?”

안에서 해승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린 게 보였다.

“대답이 없길래 무슨 일인가 했어요. 어디 갔다 오는 거예요? 화장실?”

희윤이 멍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마중?”

해승이 눈꼬리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희윤과 곧바로 마주친 게 못내 기쁜 듯했다. 해승의 기다란 손이 희윤에게 불쑥 다가왔다.

희윤이 뭔가 하고 내려다만 보고 있자 해승이 말했다.

“쿠키랑 마카롱 좀 샀어요. 이따가 입 심심할 때 먹어요.”

어쩐지 말투도 설탕을 바른 듯 달콤했다.

“뭘 이런걸…….”

정작 희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얼굴 볼 핑계 겸 사 온 거예요. 오늘은 제가 바쁘다고 메시지도 자주 못 했잖아요. 그에 대한 사과도 할 겸 겸사겸사.”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한없이 환하다. 해승은 희윤이 카페에 왔다가 최관우와 있는 걸 봤다는 사실을 몰랐다.

물론 알았어도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일부러 안 와도 되는데. 어차피 퇴근 후에 만나잖아.”

희윤이 바로 받지 않고 또 말을 꺼냈다. 그 모습에 해승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상자를 여전히 쥔 채 해승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희윤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이 미묘하게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형. 제가 안 놀아 줘서 섭섭했어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당황스러운 소리에 희윤의 눈길이 곧바로 해승에게 움직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만족한 해승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저도 별로 안 가고 싶은데, 지부장님이 자꾸 얼굴마담 하라고 불러서 어쩔 수 없었어요.”

“무슨 일인데?”

말리면 안 되는데. 불쌍한 얼굴을 한 해승을 보자 희윤은 저도 모르게 질문하고 말았다.

“10월에 있는 전국 대회 때문에요. 그것 때문에 요즘 전국에 있는 지부들에서 자꾸 오잖아요. 그때 우리 지부에는 S급 누가 있다 홍보하려고 부르는 거죠.”

“최관우 에스퍼도 그래서 오는 거야?”

희윤은 저도 모르게 최관우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가 흠칫했다. 계속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나간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최관우요? 갑자기 걔는 왜…….”

해승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걘 신경 쓰지 말아요. 관심도 두지 말고요.”

딱 자르듯 나오는 말에 희윤은 속이 따끔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관심 두지 말라니. 자신이 최관우에 관해서 묻는 것도 궁금해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그럼 얼굴 봤으니까 전 가 볼게요.”

해승이 희윤의 손에 상자를 쥐여 주며 말했다. 그러면서 희윤의 등 뒤 사무실 분위기를 쓱 훑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희윤의 옆자리 외에는 전부 비어 있었다. 그럼 사무실에서 뭔가 일이 있는 건 아닌데.

‘뭘까.’

대체 희윤이 저와 눈 맞추기를 거부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간다고 했는데도 희윤은 멍하니 손에 들린 상자만 봤다.

아무리 봐도 고민이 있는 얼굴인데, 제게 내색하지 않으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희윤 형.”

“연희윤 에스퍼, 전화요!”

해승이 희윤을 부르는 것과 김동민이 희윤을 찾는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희윤은 잠깐 해승을 보다가 곧장 김동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 지금 갈게요.”

그러더니 다시 해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이따가 봐.”

형식적이라는 게 느껴지는 인사와 저에게 몸을 돌리고 멀어지는 모습. 해승의 이마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기분 탓이 아니다. 분명 또 희윤이 달라진 것 같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 역시. 자신은 이유도 모른 채 외면받는다.

그건 해승에게 분명한 불쾌감을 가져왔다. 김동민에게 수화기를 건네받은 희윤이 통화하다가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동그란 눈매가 커진다. 아직 여기 있을 줄 몰랐다는 듯. 반가운 빛은 없고 오로지 당혹감만 비치는 눈동자에 해승의 낯은 더더욱 굳었다.

휙. 몸을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뒷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짜증이 잔뜩 느껴졌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연희윤 에스퍼님. 홍보팀에서 연락드렸습니다.

홍보팀? 거기서 저에게 연락할 일이 있던가? 의아해하며 말하라고 대답하면서도 희윤의 시선은 해승에게 떨어질 줄 몰랐다. 마침내 해승이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자칫 다시 눈이 마주칠지 몰라 서둘러 다른 쪽으로 옮겼다. 하필이면 간식으로 먹으라며 받은 상자였다.

“오, 이건 웬 거야?”

때마침 김동민이 상자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 저희 이능력자 관리 본부에서는 해마다 두 번씩 자원봉사를 나가는데요. 하반기 자원봉사를 연희윤 에스퍼가 참여해 주셨으면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자원봉사요?”

- 네. 물론 연희윤 에스퍼의 일정을 먼저 확인하고 진행 여부를 판단해 주셔도 됩니다. 다만 연희윤 에스퍼님께서 요즘 본부 내외로 가장 주목을 받고 있으신 만큼 함께해 주시면 의미가 더 클 것 같습니다.

홍보팀 직원의 말을 들으며 희윤은 얼떨떨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

자원봉사라니. 평생 생활을 위해서 돈을 받고 일은 해 봤어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가 없던 희윤이었다.

물론 예전에 해승이 아동 보호 시설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제가 할 일이 있을까요?”

하지만 에스퍼인 제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봉사가 뭐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차라리 전에 소방서처럼 산마다 돌아다니면서 웅덩이에 물을 채우는 거라면 모를까.

- 자세한 봉사 활동 내역과 일정은 다시 연락을 드릴 겁니다. 그때 확인해 보시고 참여해 주실지 고민 후 연락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나서도 희윤은 여전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통화를 종료하고 나니 엘리베이터 문은 닫히고, 해승도 사라지고 없었다.

“오, 간식이었네. 연희윤 에스퍼. 이거 하나 먹어도 돼요?”

희윤이 통화를 하고, 해승을 신경 쓰는 새 상자 안을 확인한 김동민이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희윤도 시선을 내렸다.

상자 안에 먹음직스러운 쿠키와 마카롱이 가득 들어 있었다.

‘차라리 친절하지라도 않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자꾸만 이랬다가 저랬다가 갈팡질팡하지 않을 텐데.

“네. 드세요.”

“고마워요. 그래도 연희윤 에스퍼가 먼저 하나 먹어요. 주인이 있는데 내가 손대기는 좀 그러니까.”

허락도 받기 전에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던 김동민이 그제야 눈치를 보듯 말했다.

하지만 정작 희윤은 멍하니 고개만 끄덕이고, 안에 들어 있는 쿠키 하나를 꺼내 들었다. 까맣고 동그란 초콜릿이 박힌 쿠키였다.

그대로 한입 베어 물었다. 달착지근한 첫맛 뒤에 씁쓰레한 뒷맛이 이어졌다. 어쩐지 해승이 무언가 행동할 때마다 제가 보이는 감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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