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손을 계속 움직였더니 어느새 선물받은 쿠키와 마카롱을 전부 먹어 버렸다. 빈 상자를 보다 보니 간식을 핑계 삼아 보고 싶어 왔다던 해승이 생각났다.
‘넌 친분 있는 사람한테는 누구나 그렇게 친절하게 대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나 최관우나 가이딩 가능한 에스퍼라서 그런 걸까. 그 순간 또 언젠가 안효정의 말이 기억났다.
높은 매칭률 때문에 해승이 관심을 보이는 거라고.
정말 그 말대로라면 해승은 매칭률만 좋다면 언제든 최관우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래. 또. 유치하게.’
희윤은 동요로 술렁거리는 제 심장을 툭툭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 걸 먹었더니 손이 끈적거리는 것 같았다. 손을 씻으려 화장실로 향하는데 들어가지 못하고 우뚝 멈추어야 했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요즘 표해승 가이드랑 그 S급 에스퍼랑 같이 있는 거, 자주 보이네요?”
“전국 대회 문제로 인천지부에서 계속 와서 그런 거라는데요?”
하필 대화 주제가 해승과 최관우라서 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기엔 다른 지부는 거의 안 보이잖아요. 유독 인천에서만? 그것도 S급 에스퍼만 자꾸?”
한 사람이 의심스럽다는 듯 말하자, 다른 누군가가 냉큼 대꾸했다.
“그건 그렇다. 하필 S급 가이드 앞에 S급 에스퍼가 나타나는 건 심상찮은데.”
“왜 저 둘, 예전에 담당 맺기도 했잖아요.”
이번엔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 그래요? 언제요?”
“몰랐구나. 3년 전에요. 표해승 가이드 성인 되자마자 계속 요청했었어요.”
“왜요?”
“인천에 있는 S급도 그때 제대로 매칭된 가이드가 없었거든요. 근데 서울에 나타난 가이드가 S급이라니까 탐이 난 거죠.”
“헉! 그래요? 그럼 정말 다시 맺어질 수 있다는 건가? 아니, 그러면 지금 표해승 가이드로 있는 에스퍼는요? 아주 둘이 찰싹 붙어 다니잖아요.”
“그야…… 뭐. 표해승 가이드가 둘 다 하지 않겠어요? 근데 솔직히 A급보단 S급이잖아요.”
말하는 음성에는 조금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하긴. 솔직히 표해승 가이드가 뭐가 아쉬워서 A급한테 매달리겠어요.”
“맞아요. 그러면 남는 쪽이 좀 불쌍해지겠네요.”
“불쌍하긴. 다른 담당 가이드도 있잖아요.”
희윤은 대화를 더 듣지 못하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저들의 말이 맞는다. 어차피 매칭률에 따라서 에스퍼든 가이드든 다른 상대가 생길 수 있다.
전담이 아닌 담당이니까.
희윤도 해승 외에 둘이나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하더라도 해승에게 또 다른 누군가가 생긴다면, 그건 좀 괴로울 듯했다.
* *
퇴근할 때까지 희윤의 마음은 계속 가라앉아만 갔다. 하필이면 조금 전 해승에게 약속이 있어서 늦어진다는 연락을 받아 더 그랬다.
누구 만나는 거야? 혹시 최관우 에스퍼야?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들었고, 제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에 희윤은 또 씁쓸해졌다.
“대체 왜 이러냐…….”
분명 티 내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그냥 남들처럼 친한 사이로만 남겠다고 다짐해 놓고.
“네? 연희윤 에스퍼. 뭐라고 했어요?”
“아……. 아뇨.”
옆에 앉은 김동민이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보며 묻는 소리에 희윤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연희윤 에스퍼. 피곤해 보이는데 이만 퇴근하세요.”
그 말에 희윤은 어느덧 6시가 훌쩍 지났다는 것도 알았다. 정신을 놓고 있었더니 퇴근 시간이 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김동민 외에는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어차피 더 있어 봐야 일이 없긴 마찬가지라 희윤은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내일 봐요.”
김동민과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복도는 퇴근하려는 에스퍼들로 북적거렸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도 꽉 차긴 마찬가지였다. 두 번 더 허탕을 치고서야 비로소 올라설 수 있었다.
내려가다가 멈추어 선 층에는 정소한이 있는 게 보였다. 정소한도 희윤을 발견하고는 옆으로 다가왔다.
“연희윤 에스퍼, 퇴근하세요?”
“네.”
“표해승 가이드랑 같이 안 가시나 보네요.”
항상 퇴근 때 해승이 희윤이 있는 에스퍼 사무실로 올라가 함께 움직였기에 묻는 말이었다. 물론 정소한은 희윤이 해승의 집에서 지낸다는 건 알지 못했다.
“네. 약속이 있다고 해서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정소한이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는 몇 번 더 멈추었다가 가기를 반복한 끝에 로비에 도착했다.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 틈에 희윤도 밖으로 나왔다. 해승도 없으니 오늘은 오랜만에 전에 살던 집에나 가 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전에 살던 집이라니. 좀 이상한데.’
그러다 제가 조금 전 떠올린 것에 어이가 없어졌다.
“연희윤 에스퍼!”
엉뚱한 생각을 털어 내려 고개를 젓는데 정소한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추어 돌아보니 정소한이 서둘러 다가왔다.
“혹시 시간 괜찮으면, 저녁 먹을래요?”
희윤은 곧바로 거절하지 못하고 조금 망설였다.
“비싼 커피 사 준다고 하셨잖아요. 그거, 오늘 저녁으로 대신해 주세요.”
“아…….”
아예 잊고 있던 약속을 정소한이 입에 올렸다. 번번이 약속을 미뤘던 희윤으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그랬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었다.
희윤이 긍정하자 정소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혹시 가리는 음식 있어요?”
“아뇨. 뭐든 잘 먹어요.”
“그럼 근처에 좋은 식당 알고 있는데 그리로 갈까요?”
“네.”
상대의 질문에 희윤이 성실히 대꾸했다. 두 사람이 옮긴 곳은 정소한 말대로 편하게 식사하기 좋은 일식집이었다.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차분한 분위기인데 무엇보다 손님 접대를 위한 개인실이 따로 있었다. 식사는 회덮밥으로 했다. 회를 별로 먹어 본 적 없다는 말에 정소한이 추천한 것이었다.
정소한은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 있어서 디저트까지 먹은 후 시간을 확인했을 때 깜짝 놀랐다.
“벌써 이렇게 됐네요.”
“그러게요. 연희윤 에스퍼와 얘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희윤의 말에 정소한도 스마트폰에 뜬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좋아요.”
희윤과 정소한은 소지품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윤이 문을 열고 정소한에게 먼저 나가라는 눈짓을 했다.
“고마워요.”
정소한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밖으로 나섰다. 곧 희윤도 뒤를 따랐다.
“연희윤 에스퍼. 이대로 헤어지긴 좀 아쉬운데 술 한 잔…….”
“희윤 형?”
술 한 잔 더 하자는 정소한의 제안은 희윤을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희윤의 시선이 단번에 그리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승이 서 있었다.
“형. 왜 여기에 있어요?”
그것도 정소한이랑. 그 말은 속으로만 했다. 희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해승은 곁으로 단숨에 다가왔다. 아니, 희윤을 알아보았을 때 이미 움직이던 중이었다.
정소한을 보는 눈빛이 싸늘했다.
“저녁 먹으러 왔지. 그러는 너는. 약속 장소가 여기였어?”
대답하며 희윤은 해승의 뒤를 보았다. 일행은 개인실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그럼 오신 김에 합석할까요?”
“어? 아니. 지금 다 먹고 나가는 길이었어.”
해승의 제안에 희윤이 고개를 저었다. 먹으러 왔다고 했더니 이제 막 도착한 거로 오해한 듯해서 상황도 설명했다.
“그래요?”
해승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상태로 희윤과 정소한을 빠르게 훑었다. 덤덤한 희윤과 떨떠름해하는 표정을 한 정소한.
“근데 어떻게 둘이 만나서 식사를 한 거예요?”
“퇴근길에 만났어.”
해승이 왜 하필 정소한과 밥을 먹으러 왔느냐고 마음에 들지 않아 묻는 걸 알면서도 희윤은 슬그머니 표면적인 이유만 설명했다.
“연희윤 에스퍼가 제게 밥 살 일이 있어서 오늘 함께한 거예요.”
정소한이 대화에 끼어들자 해승의 눈빛이 다시금 쨍하게 얼어붙었다. 정소한도 지지 않고 해승을 바라봤다.
그때 희윤은 해승과 같이 왔다는 일행이 신경 쓰여 둘 사이에 불꽃이 튀는 걸 몰랐다.
“그나저나 표해승 가이드. 이만 가 봐야지 않겠어요? 일행분이 기다리고 계실 것 같은데. 인천지부에서 온 손님이랑 온 거 아닌가.”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했지만, 희윤이나 해승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특히 희윤을 동요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인천지부에서 온 손님이라면 최관우를 말하는 거였으니까.
“형. 식사 다했으면 집으로 가는 거죠?”
“아뇨. 아직 좀 이른 것 같아서 술 마시러 가려고 했어요.”
정소한이 희윤의 대답을 가로챘다. 이제는 아예 눈살까지 찌푸린 해승을 보고 희윤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정소한 가이드. 술은 어려울 것 같아요. 그건 다음에 해요.”
“음……. 바쁜 일 있으세요?”
“그건 아닌데…….”
“그럼 지금 가요. 다음에 할 거면 오늘 다 해치워도 되잖아요.”
희윤이 머뭇거리며 거절하자 정소한이 구슬리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해승에게 시선을 던지며 도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니면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곤란하세요?”
그러나 다시 희윤을 볼 때는 배려심 넘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정작 해승을 신경 쓰느라 희윤은 알아채지 못한 일이지만.
“그건 아니지만. 죄송해요. 정소한 가이드님.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희윤은 더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 정소한은 조금 실망했고, 해승은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입술에 걸었다.
정소한이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갈 때까지 해승은 희윤 곁을 떠나지 않았다. 희윤이 몇 번이나 먼저 들어가 보라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대체 정소한이랑 저녁은 왜 먹었어요?”
“그냥 시간이 나서.”
“시간이 나면 집에서 편히 쉬지 왜요.”
해승의 말투가 삐딱했다. 아무래도 미리 말하지 않고 정소한과 저녁을 먹은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정소한이 커피를 사 주겠다고 했던 일을 들먹였다는 얘기는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는 해승도 없는 집에 있기 싫어서였다는 게 진실에 가까웠으니까.
“정소한 가이드, 내 담당이야.”
희윤이 한숨처럼 꺼낸 말에 해승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그걸 몰라서 하는 말 아니잖아요.”
“아는데 왜 그래.”
너도 지금 최관우와 있지 않으냐고. 순간 그런 유치한 말이 나올 뻔했다. 희윤은 가까스로 뒷말을 삼키고 입 안 살을 깨물었다.
“정소한이랑 밥 먹는다고 저한테 연락이라도 했어야죠.”
“내가 왜?”
“왜냐니요? 당연히…….”
“당연히 뭐. 왜 그래야 하는데, 너랑 내가 무슨 사이여서.”
“무슨 사이냐니요. 어떻게 그런 말을…….”
희윤의 따지는 듯한 말에 해승이 표정을 더욱 굳혔다. 무슨 사이냐니. 그럼 지금까지 희윤과 제가 쌓아 온 시간은 다 무의미했단 말인가.
“아니, 아무 사이 아니라는 말은 아냐. 그렇지만 내가 일거수일투족을 너한테 말해야 하는 거야? 그럴 필요 있어?”
“그래도요. 그동안 이런 적 없었잖아요, 왜.”
“그거야.”
그거야 네가 항상 곁에 있었으니까. 속으로 생각하고 나서야 희윤은 깨달았다. 에스퍼로 각성하고 나서는 언제나 옆에 해승이 있었다는 걸.
그래서 그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다. 언제나 그럴 줄 알았다.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 이제야 알았다.
저에게 해승은 유일하겠지만, 해승에게는 자신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걸. 언제든 저 말고도 다른 사람이 그의 옆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최근 일을 봐도 그랬다. 업무 때문이기는 해도 해승은 벌써 자신보다 최관우를 우선순위에 두었다.
“굳이 이런 일로 너랑 부딪쳐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네가 나한테 이러는 거, 솔직히 이해가 안 가.”
“형.”
희윤이 차분하게 말한 탓에 해승에게는 더더욱 타격이 컸다.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지. 이해가 안 간다고? 부딪칠 이유가 없었다고?
항상 저를 먼저 생각하고, 제 말에 따라 주던 희윤에게서 들어 본 적도, 들으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한 얘기였다.
“미안. 이런 말 할 자격이 나한테는 없는데. 말하다 보니까 실수했네. 나 먼저 가 볼게.”
“아뇨, 형. 그러지 말고 저랑 더 얘기해요.”
“아냐. 그리고 오늘은 일단 집에 갈게.”
해승이 붙잡으려고 했지만, 희윤은 단호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뒷모습에 해승은 차마 잡을 시도도 하지 못했다.
대신 희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뭐 하는 거야, 안에서 기다린다며?”
몇 발 걷지도 못한 희윤이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한숨을 쉬면서 돌아보았다.
“어디 집이요?”
일부러 모호하게 말했는데, 아무래도 해승은 희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걸 바로 알아챈 듯했다.
“어디긴, 내 집이지.”
희윤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거긴 왜요.”
“정리할 것도 좀 있고.”
“이 밤에 무슨 정리요.”
그냥,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해승이 정말 최관우의 담당이 된다고 확정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
뭐가 되었든 혼자서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저런 거. 재개발 문제도 좀 있고.”
재개발은 솔직히 핑계였다. 사실 그건 희윤의 손을 거의 떠났다고 보는 게 맞았다. 동의서도 해승이 처리해 주었고, 그 이후도 그가 붙여 둔 대리인이 해결하고 있었으니까.
“하…….”
희윤이 어떻게 해도 돌아갈 생각이라는 걸 알아챈 해승이 긴 한숨을 쉬었다. 억지로 붙잡아 두는 거야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 봐야 희윤의 반발심만 더 키울 것 같았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지?
어느 날부터 희윤이 이상해졌다. 조금씩 거리를 벌리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이유는 오리무중이고, 시간이 갈수록 틈만 더 벌어지는 것 같았다.
해승은 초조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 그게 마음이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제가 붙잡을 순 없죠.”
그러면서도 한껏 우울한 표정을 짓는 걸 잊지 않았다. 그게 희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아니까.
예상했던 대로 당장이라도 돌아설 듯하던 희윤이 해승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고민하는 듯해 보여서 좀 더 눈을 내리깔았다.
혹시 지금이라도 집에 간다는 말을 거두어 줄까.
약간 기대감이 생겼다.
“응, 너도 이만 들어가 봐. 연락할게.”
그러나 돌아오는 건 무정한 작별이었다. 심지어 희윤은 해승에게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다시 걸음을 떼었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 해승의 얼굴에 믿기지 않는다는 빛이 서렸다. 덕분에 해승은 조금 전 희윤이 언제 돌아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점점 더 멀어지는 희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야, 표해승. 너 여기서 뭐 해?”
그건 안쪽에서 해승이 오기를 기다리다 지친 최관우가 찾으러 올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형이 이상해.”
최관우는 엉뚱한 대답에 눈썹을 삐죽 올렸다.
“뭐? 형? 네 형이 왜? 전에 미국 순방 갔다고 했잖아. 일이 잘 안 풀렸대?”
“무슨 소리야.”
“니네 형이 이상하다며.”
둘은 서로를 보면서 어이없어했다. 그러다가 해승은 뒤늦게 최관우가 말하는 형이 희윤이 아니라 제 친형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새끼가 뭘 하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그럼 형이 누군데. 아……. 설마 그 A급 에스퍼 말하는 거였어?”
최관우도 그제야 해승이 지칭한 형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곧장 머릿속으로 잠깐 마주쳤던 에스퍼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분하고 단정한 미인형이었다. 연한 갈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보고는 혼혈이 아닐까 짐작했다. 분위기가 조금 묘하기도 했고.
그가 물 속성이라고 했을 때, 참 제 능력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 사람이 왜?”
해승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구긴 채 희윤의 말과 표정을 곱씹었다. 그러나 역시 짐작 가는 바는 없었다.
“갑자기 거리를 두려고 해. 심지어는 오늘은 그냥 본인 집으로 가 버렸어.”
“너 뭐 실수했냐?”
최관우가 대뜸 물었다.
“실수?”
“그래. 아니면 화나게 했거나. 보니까 마음 상하는 일 있으면 차분히 혼자 생각하면서 정리할 타입이던데.”
해승이 인상을 썼다. 고작 한 번 만났을 뿐인 최관우가 희윤에 관해 잘 안다는 듯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마저도 잊었다. 혹시 형을 화나게 한 게 있었나. 실수한 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차츰 차지해 갔다.
“표해승 많이 달라졌다? 에스퍼 챙기기도 하고.”
“희윤 형이니까.”
“호오?”
장난스럽게 말하던 최관우가 냉큼 돌아온 답변에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진짜 평소랑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른데?”
아예 해승의 앞으로 가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에 진지함은 한 톨도 없었다.
“설마 해서 묻는 건데. 절대 그럴 리 없는 거 알지만.”
한참 해승을 이리저리 관찰하던 최관우가 영 찜찜하다는 듯 길게 서론을 뺐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최관우보다 저를 두고 떠난 희윤을 생각하느라 신경이 그리 가 있던 해승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않았다.
“너 그 에스퍼 좋아하냐?”
해승의 시선이 곧장 최관우에게 날아가 꽂혔다. 어찌나 매섭던지 에스퍼인 최관우가 저도 모르게 반걸음 물러섰을 정도였다.
“왜, 왜 그렇게 봐. 살벌하게. 너 그러면 내가 쫄 줄 알…….”
“너 무슨 의미로 한 소리야.”
해승이 최관우의 말을 싹둑 잘라 내며 물었다.
“뭐? 뭘?”
“조금 전에 한 말.”
“어?”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최관우가 그런 표정으로 해승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제가 꺼낸 얘기를 천천히 떠올려 보았다.
그가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해 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 그 형, 혹시 좋아하느냐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승의 낯이 확 굳었다.
“어, 미안. 실언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또 저렇게 무섭게 보고 그래. 최관우는 얼른 제 말실수를 사과했다. 아무렴, 다른 누구도 아닌 표해승이다.
표해승이 에스퍼를 좋아한다고?
그건 해가 서쪽으로 뜨거나 달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됐고, 무슨 의미로 그런 말 했느냐고. 왜 이렇게 사람 질문을 이해를 못 해.”
까칠한 말에 최관우가 입을 삐쭉거렸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이유를 설명했다.
“네가 하는 꼴이 딱 그렇잖아. 상대한테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아니면 화나게 한 일이 있나 고민하는 거, 그건 좋아하는 상대한테 보이는 행동이지.”
해승의 표정은 점점 더 딱딱해져 갔다. 최관우의 머릿속에 설마 하는 의혹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내가 그렇다고?”
“어. 너, 너요. 네가 지금 하는 말이며 행동이 딱 그렇다고요”
최관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속 해승을 살폈다. 아무래도 설마가 맞나 보다.
천하의 표해승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정작 본인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을 이제야 타인을 통해 확인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