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마칠 때까지 해승에게는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끝내 계산은 해승이 했다.
희윤은 반값이라도 내려고 했으나 상처받은 듯한 해승의 눈동자를 보니 차마 밀어붙일 수 없었다.
제 마음을 끊어 내기 위해 선을 긋는 건 맞다. 하지만 좋아하는 상대에게 상흔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미련하고, 이기적이야.’
정말 비겁한 행동이라는 걸 알아도 어쩔 수 없다. 식당을 나와 본부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형, 오후에도 수고하세요.”
엘리베이터에 내릴 때가 되어서야 해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투는 아까 만났을 때와 확연히 다르게 푹 가라앉아 있었다.
“응, 너도. 고생해.”
해승은 덤덤하게 대답하는 희윤을 물끄러미 보다가 돌아섰다. 어쩐지 어깨도 축 처진 것 같았다. 그대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희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무실에 돌아와 서류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종종 해승이 떠올랐다. 절로 한숨이 뒤를 이었다.
“연희윤 에스퍼. 왜 그래요? 무슨 일 생겼어요?”
옆에 앉아 고개를 꾸벅꾸벅하던 김동진이 맹한 얼굴로 물어왔다. 졸고 있던 것 같은데 용케 희윤의 한숨을 들은 듯했다.
“아, 아뇨. 별일 없었습니다. 저 조 이사님께 다녀올게요.”
마침 핑계도 있어 희윤이 서둘러 조사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제는 안면이 익은 이사실 비서와 인사를 나누고 안으로 들어섰다.
“음, 상황이 심각하네요. 벌써 일주일이 넘지 않았나. 그때 괴물체는 잡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통화 중인 조 이사가 손을 들어 보이더니 소파를 눈짓했다.
“걱정하는 마음 잘 압니다. 그럼요. 세계 문화유산인데 당연히 지켜야지요. 알겠습니다. 이숙경 지부장님과 얘기해서 파견할 인원을 정해 보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자 마침내 조 이사가 전화를 끊고 희윤에게 다가왔다.
“연희윤 에스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급한 연락이 와서.”
희윤에게 사과하며 조 이사가 대각선에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아닙니다, 이사님.”
희윤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조 이사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보내 준 보고서는 잘 받았어요. 오늘 중으로 검토 끝내죠.”
“네, 알겠습니다.”
“고생했어요.”
“고생은요. 덕분에 제게도 공부가 많이 됐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요. 솔직히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는데.”
그건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희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조 이사와의 연구 덕분에 어디까지 능력을 구현할 수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어쨌든 고마웠고…….”
조 이사가 말하면서 희윤을 가만 바라보았다. 어딘지 고민이 있는 눈빛이었다.
“말씀하세요. 이사님.”
희윤은 어쩐지 그게 조금 전 통화했던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음……. 사실 이건 지부장과 먼저 상의해야 하는 일이긴 해요. 그런데 논의한다고 해도 적임자로 연희윤 에스퍼만 한 사람이 없을 것 같군요.”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조 이사가 입을 열었다. 희윤은 듣고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지금 안데스산맥에 며칠째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고 해요.”
“안데스산맥이요?”
희윤은 이름도 생소한 지명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베네수엘라에서 시작하여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까지 길게 이어지는 세계에서 제일 긴 산맥입니다.”
조 이사가 알쏭달쏭한 빛을 감추지 못하는 희윤을 위해 간략하게 안데스산맥에 관해 설명했다.
“그중 페루 지역에 불을 지르는 괴물체가 나타나 계속 산불을 일으키고 있어요. 문제는 놈들이 마추픽추와 가까운 곳까지 영역을 확장했다는 겁니다. 이대로라면 세계 문화유산이 소실되게 생겼어요.”
어디선가 들어 본 내용인데. 희윤의 기억 속에 며칠 전 휴가 얘기를 하면서 나온 곳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쪽은 괴물체가 일으킨 산불을 진압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방금 전에 괴물체를 상대할 에스퍼를 보내 줄 수 있냐는 요청이 왔습니다.”
기나긴 설명 끝에 조 이사가 좀 더 확고해진 목소리로 희윤에게 말했다.
“연희윤 에스퍼, 안데스산맥으로 파견 부탁합니다.”
“연희윤 에스퍼. 퇴근 안 해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희윤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김동민의 얼굴이 보였다.
“뭐 남아서 할 일 있어요? 아니면 표해승 가이드 기다리는 거?”
“아, 아뇨, 가야죠. 퇴근해야죠.”
그제야 상대의 말을 이해한 희윤이 서둘러 대답했다.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더니 새하얀 화면에 까만 커서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저 먼저 갑니다. 내일 봬요!”
“저도 퇴근할게요. 좋은 저녁 보내세요.”
6시가 막 지나자마자 여기저기서 부산스러운 소란이 일어났다. 조사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연달아 에스퍼들이 퇴근하려고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희윤도 천천히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컴퓨터를 끈 후 스마트폰과 지갑을 챙겨 들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오늘 야간 근무를 할 에스퍼들에게도 고생하라고 말하고는 움직였다.
걸어가는 얼굴은 여전히 다른 생각에 빠져서 다소 멍했다. 그건 퇴근하는 사람이 꽉 찬 엘리베이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희윤은 누군가가 제 옆에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도,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관심을 보인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어이 만차 표시가 뜬 엘리베이터가 버겁게 로비에 멈추어 서자 문 앞에 있던 이들부터 우르르 빠져나갔다.
멀거니 인파를 보던 희윤도 그들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 막 한 발 내디딜 때였다. 발이 바닥에 닫기도 전에 팔이 꽉 붙들렸다.
“형, 어디 가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희윤의 동그란 눈이 더 둥그렇게 변했다.
“해승아? 여긴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있느냐고 묻던 희윤은 뒤늦게 이곳이 엘리베이터 안이라는 걸 인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메시지 읽은 표시가 안 뜬다고 했더니. 역시 읽지 않으셨구나. 오늘은 정시에 끝나니까 지하 주차장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아…….”
다른 생각에 빠져 아예 스마트폰의 존재를 망각했던 희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갈색 눈동자가 당황으로 떨리는 게 다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 희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고민 중 하나가 바로 해승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몇 시간 전 조 이사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안데스산맥으로 파견을 가 달라고 한 요청과 관련이 있었다.
* *
〈아직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출동한 경험도 많지 않으니 연희윤 에스퍼에게 이 일이 부담될 수 있다는 것 이해합니다.〉
조 이사가 복잡해 보이는 희윤의 눈을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한국 본부의 적극적인 파견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다른 에스퍼들도 물론 참여하겠지만, 이번 일이 연희윤 에스퍼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서 부탁하는 겁니다.〉
〈저는 전투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되지는 않을까요?〉
희윤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전혀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조 이사가 굳건한 눈으로 대답했다. 그는 최근 희윤의 능력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이다. 어떤 요구를 해도 어렵지 않게 구현해 내는 모습을 봤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희윤은 분명 잘해 낼 거다. 아니, 잘 해내는 것을 넘어 이번에도 역시 모두를 놀라게 할 모습을 보여 줄 거라 예상한다.
〈물론 연희윤 에스퍼 외에도 전국 각지에 있는 고등급 에스퍼들에게 파견 요청이 갈 겁니다. 연희윤 에스퍼가 함께 가길 바라는 물 속성이나 빙결 속성 에스퍼가 있다면, 추천해도 좋아요.〉
그 순간 희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안효정이었다. 처음 본부에 왔을 때 그를 책임져 주었고 늘 든든하게 함께해 오던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희윤이 조사팀으로 옮기면서 대련할 때 외에는 만나기 쉽지 않아졌지만.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은 들려온 목소리에 끊어졌다. 듣고 있다는 의미로 가만 바라보자 조 이사가 곧 입을 열었다.
〈이번 파견은 최소 4일 이상 소요될 예정입니다. 물론 현지 사정에 따라 더 걸릴 수도 있어요.〉
그건 희윤도 짐작하는 바였다. 벌써 열흘이나 되었는데 괴물체를 잡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다고 했다.
그만큼 만만찮은 상대이니 추가 병력이 투입되더라도 곧바로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또 격렬한 전투와 매우 어려운 탐색이 예상되기 때문에 반드시 담당 가이드가 동행해야 합니다.〉
〈아…….〉
그것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희윤이 놀라 입을 벌렸다.
〈그런데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곤란한 일이요?〉
조 이사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승이는 우리나라 유일한 S급 가이드라서 말이지요. 그 때문에 해외로 파견을 나가야 하는 경우 여러 제약이 따라요.〉
〈제약이라면.〉
〈정부의 허가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유일무이한 자원인 만큼 외부 유출이 우려되어 쉽게 승낙해 주지는 않을 거예요.〉
희윤은 그 말까지 듣고 조 이사가 곤란해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지금 페루 정부는 한시라도 빨리 안데스산맥에 에스퍼가 추가 투입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괴물체는 잡히지 않고, 장대한 산맥은 계속 타오르고 있으며, 세계 문화유산의 안전이 위협당하는 상태다. 그런 중에 가이드 한 명을 파견하기 위해서 지지부진 시간을 버릴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정소한 가이드와 함께 가겠습니다.〉
〈괜찮겠어요?〉
조 이사가 희윤을 가만 보며 물었다. 그도 희윤과 해승의 소문을 모르지 않았다. 희윤을 데려다가 가르쳐 보라고 말을 꺼낸 게 다름 아닌 해승이었으니까.
에스퍼에게 관심은커녕 혐오감을 지닌 해승이다. 그런 사람이 내내 붙어 다니다 못해 일일이 간섭한다는 것은 무척 의외로운 일이었다.
새로운 A급 물 속성 에스퍼의 등장 소식에 가뜩이나 흥미를 갖고 있던 조 이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희윤과 만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건 그래서였다.
〈네. 중요한 일인데, 시간을 지체할 순 없죠.〉
조 이사는 고민 많은 얼굴로 담담하게 앉은 희윤을 보았다. 아무래도 저 에스퍼는 해승이 그에게 보이는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는 듯했다.
그러니 저렇게 쉽게 대답하는 거겠지.
〈표해승 가이드한테는.〉
〈제가 잘 말할게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해할 거예요.〉
글쎄, 과연 그럴까. 해승을 오래 알아 온 조 이사였다. 그간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과 눈빛, 행동을 해승은 희윤 때문에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희윤이 저를 두고 다른 가이드와 해외 파견을 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그래요. 꼭. 잘 설득해 주길 바라겠습니다.〉
조금은 간절함을 담아 말한 조 이사가 그래도 불안했던 모양인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연희윤 에스퍼.〉
〈네?〉
〈차라리 내 개인적인 부탁으로 지방에 출장을 가는 것으로 하지요. 그럼 어려운 얘기를 꺼낼 필요도 없을 테니. 연희윤 에스퍼도 불편한 마음을 덜 거고요.〉
무엇보다 희윤이 다른 가이드와 움직이는 걸 해승에게 숨길 수 있으니 더 괜찮을 거다. 짧은 순간 발휘해 낸 기지에 조 이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
희윤도 크게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죄책감은 들었지만, 해승을 떼어 놓으려 한다는 걸 알리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스스로 위안했다.
〈어차피 지금 나와 연구도 하고 있으니 핑계로는 충분할 겁니다. 뭐, 아예 나와 함께 간다고 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조 이사는 즉흥적으로 몇 가지를 더 제안했다. 희윤이 듣기에도 그쪽이 해승에게는 더 잘 먹힐 듯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중에 이 일이 해승에게 발각되었을 때 어떤 파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완전 범죄…… 아니, 안전 파견을 위한 계획을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