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하게 깔린 회색 구름을 뚫고 나서도 대기는 온통 희부연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비행기는 용케 시야가 좋지 않은 활주로에 안전히 내려섰다.
“도련님, 쿠스코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어 서자 비서가 조용히 다가와 도착을 알렸다. 해승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바깥으로 통하는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자 연락을 받았는지 차 한 대가 활주로에 대기 중이었다. 밖으로 나온 해승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긴 왜 이래?”
“화재로 인한 연기가 바람을 타고 이곳까지 오고 있다고 합니다.”
“화재로 인한 연기가 이 정도라고?”
해승이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불이 크다더니 주변 마을까지 영향을 크게 미친 듯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해승의 걱정이 한층 강해졌다. 희윤을 직접 보고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희윤 형은?”
“아직 산속에서 전투 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안정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어 곧 쉘터로 복귀할 것 같습니다.”
“쉘터는 어디 있는데?”
“마추픽추 아래에 있는 아구아스 깔리엔테스입니다.”
“얼마나 걸려?”
“차로 3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아직도 이동해야 할 거리가 남아 있다는 소리에 해승의 눈빛이 어둡게 변했다. 충직한 비서는 제 도련님이 희윤 걱정에 조급해한다는 걸 눈치채고 운전기사에게 얼른 출발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페루인 기사는 눈치가 좋은지 재깍 액셀러레이터를 꾹 밟아 차를 움직였다.
화재로 시야가 좁아진 데다 도로 사정도 썩 좋지 못해 목적지는 예상보다 1시간 늦게 도착했다.
덕분에 비서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찌르는 듯한 눈빛을 견뎌 내느라 목과 어깨가 다 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해승은 묵묵하게 풍경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차가 공터에 멈추어 선 후 비서가 재빨리 말했다. 해승이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문을 열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역시 화제의 영향으로 온 동네가 매캐한 연기에 뒤덮여 있었다.
“어디야.”
해승이 사람이 살지 않을 것같이 조용한 마을을 쓱 훑으며 물었다. 아마도 전투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언제 괴물체가 공격할지 몰라 주민들을 전부 피신시킨 듯했다.
“이쪽으로.”
비서가 서둘러 앞장섰다. 그 뒤를 해승이 따라갔다. 곧 해승은 이능력자 몇몇과 현장을 지원하는 비전투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척 보기에도 민간인처럼 느껴지는 해승을 의아한 눈으로 봤다. 본부에서 곧바로 출발했기에 입고 있는 곳이 전투복이 아닌 야상 점퍼에 청바지라 나온 오해였다.
“표해승 가이드!”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고함과 함께 익숙한 얼굴들이 달려 나왔다. 조 이사였다. 그 뒤에는 정소한도 있었다.
“너! 대체 여긴 어떻게.”
한달음에 해승 앞에 멈추어 선 조 이사가 소리 지르듯 말했다. 그는 낯선 차량이 마을에 들어섰다는 말을 듣고 진작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이미 지부장을 통해서 해승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그 차량에 해승이 타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해승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부리나케 움직인 것이었다.
“남쪽에 있는 연구소에 출장 갔다던 사람이.”
해승이 조 이사를 보며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주위를 쓱 훑어보는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정소한에게 머물렀을 땐, 미소가 더 짙어졌다.
“왜 여기 계실까요?”
분명 화사하고 곱게 보였지만, 주변 온도가 어쩐지 한겨울처럼 뚝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조 이사가 그런 해승과 눈을 마주하고 입을 열었다.
“왜긴, 위급한 상황이라는 얘기를 듣고 왔지. 에스퍼라면 당연히 이런 순간에 망설임 없이…….”
“아, 그렇죠. 에스퍼라면 그래야지. 근데 여긴 언제 왔어요?”
하지만 긴말을 더 들을 생각이 없는 해승이 조 이사의 말을 싹둑 자르며 물어왔다.
“언제가 뭐가 중요해.”
“그렇죠. 희윤 형이 연구소에 간다면서 거짓말하고 출발한 날이, 하필이면 페루로 향한 날이었다는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해승이 비꼬듯 꺼낸 말에 조 이사가 쯧쯧 혀를 찼다.
“알면서 뭘 물어봐. 알았어, 일단 이리 와.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
조 이사가 해승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어느새 주변에는 호기심과 흥미롭게 반짝이는 눈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이능력자들은 현재,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건 전부 뜻하지 않게 위력적인 능력을 보이는 희윤 덕분이었다.
A급이면서 S급 못지않은 실력을 선보이고 있으니 당연했다.
“어딜요?”
“어디든. 일단 가자, 가.”
조 이사가 휙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소한이 못마땅한 얼굴로 해승을 보다가 조 이사의 뒤를 따랐다.
해승은 눈썹을 까딱거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는 눈들이 아주 반짝반짝했다.
“흠…….”
해승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보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다 진작 멀어진 조 이사를 따라 쉘터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도착한 곳은 쉘터 내에서도 비교적 조용한, 다과가 준비된 공간이었다. 조 이사와 정소한이 나란히 원형 테이블에 앉아 다가서는 해승을 무거운 눈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알고 왔어?”
“설마 들통 안 날 줄 안 건 아니죠?”
조 이사의 물음은 삐딱한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조 이사는 ‘끙.’ 앓는 소리를 하고 앞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안에 오자마자 한 잔 비웠는데, 속이 타니 두 번째 것도 단숨에 바닥을 보였다. 내내 침묵하던 정소한이 그 틈에 입을 열었다.
“표해승 가이드. 이렇게 무단으로 움직이는 건 본부에도 연희윤 에스퍼에게도 폐가 된다는 거 모릅니까?”
해승은 저를 비난하는 정소한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조 이사님이 시켰어요?”
“뭘?”
해승의 까칠한 질문에도 조 이사는 불쾌한 빛 하나 없이 되물었다. 반대로 해승에게 무시당한 정소한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한테 알리지 말라고. 형한테 지시한 거 아닌가요?”
오는 내내 생각했다. 희윤이 왜 페루로 파견을 가게 됐다는 걸 숨겼을까. 그리고 담당 가이드를 자신이 아닌 정소한으로 택했을까.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해승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저히 희윤이 저를 떼어 놓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올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희윤이 아닌 다른 요소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조 이사의 명령 때문이라고. 조 이사가 뜨끔한 표정을 하는 걸 보니 의심은 확신이 섰다.
“딱히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 그냥 일이 급하게 돌아가니 네가 동행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을 뿐이지.”
한숨을 쉰 조 이사가 마저 말했다.
“솔직히 그렇잖아. S급 가이드는 이런저런 절차 밟으려면 출국까지 오래 걸리니까. 그보다는 당장 갈 수 있는 정소한 가이드가 낫다고 판단한 거지.”
“어떻게 변명들이 하나같이 똑같아. 참신하지를 못하네.”
“뭐?”
“그렇게 말하기로들 짰어요?”
짜긴 누가 짰다 그래. 조 이사는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가 오간 건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변명을 하려면 말이 되게 해요. 절차가 복잡하다니.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해요?”
네가 누군데. 그렇게 따지기에는 조 이사가 아는 게 많았다. 희윤이 페루에 있다는 걸 알자마자 곧장 공항으로 달려가 전용기를 타고 이리로 날아온 것만 봐도.
아무리 허가가 어떻고, 정부에서 달갑지 않다는 둥 해도 해승이 원한다면 출국을 막을 수 없었을 거다.
그만큼 해승의 뒤에 있는 수호 그룹이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표해승 가이드가 그만큼 연희윤 에스퍼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는 거겠죠.”
불쑥 정소한이 말을 던졌다. 그건 해승의 시선을 돌리고도 남는 주제였다.
“뭐?”
해승이 비로소 제게 관심을 돌리자 정소한이 지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쫙 펴고 다시 말했다.
“자신을 잘 돌아봐요. 표해승 가이드. 그간 연희윤 에스퍼에게 어떻게 했는지. 그럼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스스로 알겠죠.”
“정소한 가이드. 그만하게.”
조 이사가 정소한을 말렸다. 하지만 이미 말은 쏟아지고 난 후였다. 해승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네가 뭘 안다고, 나랑 희윤 형 사이를.”
“뭐긴요. 에스퍼와 담당 가이드 중 하나죠.”
설마 그것도 몰랐냐는 듯 정소한이 입술을 비틀어 비웃음을 만들어 냈다. 담당 가이드 중 하나. 결국 너도 희윤에게 유일하지 않은 존재라는 의미였다.
“너.”
해승이 차게 식은 얼굴로 막 입을 열던 순간.
삑. 삑삑. 삑.
- 경고! 연희윤 에스퍼의 안정도가 50% 이하입니다. 가이딩이 시급합니다.
짧고 강한 알림과 동시에 정소한의 스마트워치에서 부족한 안정도를 알리는 경고가 실내에 파고들었다.
경고음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정소한의 관심은 당장 해승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연희윤 에스퍼! 얼른 돌아오세요. 가이딩해야 해요!”
정소한이 스마트워치에 대고 외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자 정소한은 더 기다리지 않고 듣고 있느냐고 희윤을 재촉했다.
- 네. 지금 돌아갈게요.
마침내 정소한의 스마트워치에서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해승의 눈썹이 꿈틀했다.
희윤이 제가 아닌 정소한과 소통한다는 것도, 그의 말에 움직인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흘린 해승이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냐?”
조 이사가 당장 해승을 불러 세웠다.
“어디긴요.”
해승이 성의 없이 말하며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러자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대체 쟤가 여길 어떻게 왔냐는 경악 어린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놀라워하는 건 당연히 서울지역 중앙지부의 이능력자들이었다.
해승은 그들을 지나쳐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희윤이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니 섣불리 장소를 옮길 수 없었다.
페루에 도착한 직후 희윤과 정소한의 스마트워치 동기화가 이루어졌다. 그랬기에 희윤은 GPS로 정소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 거고, 당연히 가이딩을 위해 이곳으로 오게 될 거다.
그러니 해승이 희윤을 만나려면 정소한과 먼 곳에 있어서는 안 됐다. 그렇다고 보고만 있어도 부글부글 끓는 상대와 마주 앉아 있을 생각도 안 들었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해승의 귀에 들려왔다.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등등 온갖 언어가 뒤섞여 정신이 없었다.
“다 왔나 보군.”
언제 나왔는지. 조 이사가 뒤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뿐만 아니라 쉘터에 남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까 해승이 등장했을 때처럼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위를 보았다.
해승 역시 그들과 같은 방향에 시선을 던졌다. 설마 하면서도 어쩌면 하는 어떤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저 멀찍이서 물체 하나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예상보다 속도가 빨랐고, 어떤 것인지 확인이 가능할 만큼 가까워졌을 때 해승의 표정이 변했다.
그건 물구름을 탄 희윤이었다.
“연희윤 에스퍼!”
조 이사와 마찬가지로 밖으로 나왔던 정소한이 해승을 지나쳐 걸어갔다. 손을 휘휘 저으며 날아오는 희윤에게 제 위치를 알리기까지 했다.
약 3층 높이를 날아오면서도 희윤은 두려운 빛이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제 능력을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희윤의 시선이 곧 정소한을 지나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존재를 발견해 내고야 말았다.
“희윤 형.”
희윤과 눈이 마주친 순간 해승이 그제야 입을 뗐다. 크게 부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소와 같은 음량이었다.
그런데도 희윤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 튀어 올랐다. 찔리는 게 있다는 티를 다 내고 있었다.
“희윤 형!”
해승이 아까보다 크게 희윤의 이름을 불렀다. 동시에 희윤을 태운 물구름이 보글보글 물방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물구름은 희윤이 바닥에 착지할 때쯤에는 완전히 흩어졌다.
“어떻게 여길…….”
희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해승을 바라보았다. 저를 애타게 불렀던 정소한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관찰하는 사람들도 의식 밖으로 밀려났다.
오로지 시야에 해승만 가득 찼다.
“제가 할 말이에요. 형, 왜 여기 있어요?”
해승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희윤을 봤다. 기분 탓인지 조금 창백하게도 보였다.
“아.”
희윤은 그제야 제가 해승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거짓으로 행선을 알린 채 이곳에 왔다는 걸 알았다. 곧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그건…….”
“일단 가죠.”
무어라 말하려는 희윤의 손을 해승이 낚아채듯 붙들었다. 감싼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희윤의 후유증을 단번에 알아챈 해승의 눈썹이 다시금 찌푸려졌다.
“표해승 가이드!”
그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해승의 앞을 정소한이 막아섰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화가 나 있었다.
“비켜.”
“무슨 짓입니까!”
해승의 경고에도 정소한은 물러서지 않고 쏘아붙였다. 해승은 대꾸도 없이 정소한의 옆을 지나치려 했다.
“아.”
그러다 뒤에서 들린 신음에 우뚝 멈추었다. 돌아보니 정소한이 희윤의 다른 팔을 잡고 있었다.
“놔.”
해승이 차갑게 말했다.
“표해승 가이드야말로 놓으시죠.”
정소한도 지지 않고 외쳤다. 가운데 낀 희윤만 난감한 얼굴로 해승과 정소한을 번갈아 봤다. 졸지에 가이드 둘에게 붙들린 상황이었다.
물론 에스퍼인 희윤이 두 사람의 손을 뿌리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상황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둘 다, 일단 놔.”
그들 사이에 조 이사가 끼어들었다. 어이없고, 부끄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일단 사람 없고 조용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승이고 정소한이고 조 이사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정소한.”
해승은 정소한을 당장 손을 놓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노려보았다.
“표해승 가이드. 이거 엄연히 월권입니다.”
그건 정소한도 마찬가지인 듯 차디차게 응수했다.
“월권?”
“아니면 규정 위반이죠. S급 가이드면서 그것도 모르는 겁니까?”
누가 들어도 명백한 조소였고, 시비였다. 바짝 독기를 드러내는 정소한이 가소로웠다. 해승의 입술도 삐뚤어졌다.
“정소한 가이드님.”
해승이 막 입을 연 순간, 희윤이 정소한을 불렀다. 당황스러움이 담긴 눈에는 그만해 달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정소한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낄 데와 빠질 데는 확실히 알아야죠. 이곳에서 연희윤 에스퍼를 책임지는 건 납니다. 그러니까 그 손 놓으세요. 표해승 가이드.”
해외로 파견하면서 희윤의 담당 가이드로 등록된 건 정소한 뿐이다. 그러니 현장에서 우선순위 역시 그라는 말이었다.
“윽.”
희윤이 눈살을 찌푸리며 해승에게 잡힌 손을 보았다. 아까보다 힘이 더 가득 들어가 아픔마저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저절로 희윤의 시선은 해승의 얼굴로 향했다. 해승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는데 눈빛이 아주 살벌했다.
“해승아.”
희윤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다정했다. 그것은 성이 난 짐승을 달래는 주인의 부름과 무척 비슷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다행히 옥죄던 손아귀의 힘이 조금 풀렸다.
“표해승, 일단 그 손 놔. 뭐가 됐든 지금 중요한 건 연희윤 에스퍼의 가이딩이야.”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희윤의 스마트워치에서 안정도가 50% 이하로 떨어졌으니 당장 가이딩하라는 경고가 울렸다.
해승의 눈썹이 꿈틀했다.
“정소한 가이드 말이 맞아. 이 자리는 네가 끼어들 데가 아냐. 지금은 정소한 가이드가 책임져야 해.”
물론 해승이 그 얘기를 들을 거라고는 조 이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희윤에게로 옮겨갔다. 본인이 말려 보라는 의미를 알아챈 희윤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해승아, 놔 줘. 정소한 가이드한테 가이딩 받고 나서 얘기하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사실대로 털어놔야 한다. 사실 그간 여기서 지내고 해승의 문자에 회신하면서 희윤 속에서는 죄책감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해승을 속이고 이곳에 왔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특히 안정도가 불안전해져 정소한에게 가이딩을 받아야 할 때면 더더욱.
“싫어요.”
해승이 단칼에 거절했다.
“다른 사람한테 형의 가이딩을 맡기라니. 어떻게 형이 걱정되어 찾아온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해승이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말투에도 서러운 기운이 잔뜩 묻어났다. 그 모습에 희윤은 당황스럽게도 설레고 말았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이 멀리까지 날아왔는데.’
왜 해승은 제 노력을 이렇게 쉽게 무너뜨리는 걸까. 기껏 무거운 죄책감을 가슴에 품고 떼어 두고 왔는데.
해승이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제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가이드와 동행했는데.
“내가 이번 파견에 담당으로 정한 게 정소한 가이드니까.”
희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해승의 가슴 언저리를 보면서 말했다.
“형.”
다정한 부름이 들렸다. 희윤의 귀가 움찔 떨렸다. 해승이 잠시 그곳을 보다가 좀 더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간 안정도 최대 몇이에요?”
질문은 다소 뜬금없게 들렸다. 그래서 계속 피하던 시선을 저도 모르게 해승에게로 향했다.
“안정도?”
“네. 여기 온 이후로 기록한 최고 안정도가 몇이냐고요.”
“어…….”
“90%?”
희윤은 고개를 저었다. 해승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80%?”
이번 역시 희윤은 눈만 끔뻑였다. 해승이 설마 하는 투로 또 질문을 던졌다.
“설마 70%는 아니죠?”
희윤이 도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저도 모르게 정소한을 바라봤다. 70%는 고사하고 대부분 60% 초반대였다.
그나마도 전투를 끝내고 숙소에 와서 잠들기 전까지 해서 그 정도이다. 낮에 한창 바쁠 때는 50% 중반까지만 올리고 다시 달려가기 일쑤였다.
희윤은 이곳에 와서야 정소한이 지난번 물 모이 때 가이딩을 3시간을 하고도 제 안정도가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됐어요. 대답 안 해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해승이 말했다. 정소한과 조 이사를 돌아본 눈이 말하고 있었다. 이래 놓고 저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거냐는 비난과 조소가 섞인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