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당 가이드가 왜 있는지 알아요?”
해승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조 이사와 정소한에게 물었다. 본부에 소속된 이능력자라면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거야 전투를 치르는 에스퍼의 안정도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 주기 위해서지.”
조 이사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로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미심쩍은 눈빛을 했다. 어쩐지 해승이 저런 질문을 한 이유가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잘 아시면서, 지금 날 막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나온 대답이 저랬다. 삐뚤게 올라간 입꼬리는 시비를 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승아.”
보다 못한 희윤이 해승을 말리려 끼어들었다. 잡힌 팔을 돌려 해승의 손을 붙잡았다. 힐끔 맞잡은 두 손을 내려 본 해승이 잘 되었다는 듯 위로 들어 올렸다.
“어?”
“자, 봐요.”
살짝 각도를 비틀어 해승이 희윤의 스마트 워치를 조 이사에게 보였다.
‘뭐가.’ 하고 의문 섞인 눈을 하던 조 이사는 액정에 뜬 수치를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안정도 : 60%]
해승과 희윤이 만난 지 이제 고작 10분은 지났을까. 손을 잡은 건 그보다 짧다. 그런데 불과 몇 분 만에 안정도가 무려 10%나 오른 거다. 정소한보다 해승의 가이딩이 더 효율이 높다는 의미였다.
“이래도 담당이 어쩌고, 규정이 어쩌고 할 거예요?”
“해승아.”
다시 또 시비를 걸듯 삐딱하게 말하는 해승을 보며 희윤이 타이르듯 불렀다. 해승은 맞잡은 손을 내려놓기만 할 뿐 뜻을 따라 주지 않았다.
“그럼 난 현장 파견에 가장 적합한 담당을 배치하지 않은 조 이사님과 지부장님을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해야겠는데?”
법적 대응이라니. 해승이 그런 소리까지 하자 희윤의 안색도 달라졌다.
“표해승.”
성까지 붙여 제 이름이 불리자 해승의 눈길이 단번에 희윤에게 향했다. 왜 그런 식으로 저를 부르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희윤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지부장님과 조 이사님께 말씀드린 거야. 아까 얘기했잖아. 그러니까 정소한 가이드나 이사님은 이번 일에 책임 없어.”
해승의 눈썹이 움찔했다.
“상황이 급박했고, 최대한 빨리 와야 했어. 그래서 정부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고.”
“저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건요?”
“그건…….”
“일단 알겠어요. 그 얘긴 둘이 있을 때 해요. 여기서 할 건 아닌 것 같으니.”
해승이 희윤의 말을 끊어 냈다. 이 자리에서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윤에게 들어야 할 변명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조 이사님, 희윤 형 데려가도 되겠죠?”
해승의 시선이 연결된 두 손을 향했다. 자연히 조 이사도 그쪽을 봤다. 정확히는 희윤의 손목에 걸린 스마트 워치를.
그사이에도 가이딩이 진행되었는지 안정도 수치가 63%였다. 확실히 지금 희윤에게는 정소한보다 해승이 더 필요했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10분 내로 출동해야 해.”
조건이 걸린 승낙이 떨어지자 해승은 곧바로 희윤을 붙들고 차를 마시던 장소로 이동했다.
“조 이사님!”
정소한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조 이사를 불렀다. 엄연히 담당 가이드인 자신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희윤을 보낼 수 있을까!
“미안하네, 정소한 가이드. 하지만 연희윤 에스퍼를 생각해 줘야지.”
“하지만…….”
정소한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조 이사를 바라보았다.
“정소한 가이드.”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던 정소한은 조 이사가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다는 의미가 목소리에 담겨 있어서였다.
그러나 분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애초 희윤의 해외 파견에 동행한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고작 가이딩 효율성 때문에 해승에게 밀려나야 한다니.
‘일부러 현장 조사팀 직원의 동료한테 정보까지 풀었는데.’
나중에 사실을 안 해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것도 짐작했다. 애초에 그걸 노린 거였으니까.
다만 여기까지 쫓아오리란 건 정소한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그저 오지도 가지도 못한 채 분노하다가 희윤에게 화를 내지 않을까 했지.
이 일로 둘 사이가 벌어진다면 그 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이미 희윤에게 최관우라는 카드를 꺼내 두었으니 불안해하는 그를 잘 달래어 앞으로 해승이 아닌 자신에게 의지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해승은 기어이 페루까지 온 데다 희윤을 가이딩 하는 일까지 빼앗아 버렸다. 그도 모자라 많은 이능력자가 보는 앞에서 희윤에게 소유욕까지 확실히 드러냈다.
그건 정소한이 굴욕적인 기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표해승 가이드가 무단으로 여기까지 온 일에 관해서는 본부로 돌아가는 대로 처벌하도록 하겠네.”
정소한의 어두워진 얼굴을 본 조 이사가 달래듯 말했다.
“마음 상했겠지만, 이번은 이해해 주게.”
조 이사는 결국 끝까지 해승의 편을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에스퍼를 먼저 생각한 것이었다.
전투 현장인 만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소한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저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 일은 저도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징계위원회에 정식으로 신고하겠습니다.”
그 말에 조 이사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해승에게 과연 그게 먹힐지는 그때 가 봐야알겠지만. 조 이사는 정소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시선이 희윤과 해승이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표해승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다고 하더니.’
정말로 뭔가 있기는 있는 건가. 드디어 저 망둥이 같은 S급 가이드에게도 고삐가 생긴 건가. 그게 긍정적인 건지 아닌지 아직 판단은 안 되지만.
부디 좋은 결과로 남기를 조 이사는 살짝 바라 보았다. 그래야 본부도 좀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을 테니까.
* *
마주 잡은 손을 통해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늘 그렇듯 상쾌하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 하지만 희윤은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
장소를 옮겨 마주 앉은 후 가이딩을 시작한 뒤로 해승이는 줄곧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희윤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차라리 아까처럼 따지듯 물어보면 대답이라도 할 텐데, 오히려 침묵하고 있으니 더 신경이 쓰였다.
“저기 해승아.”
“안정도 75% 회복됐네요.”
희윤이 해승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해승도 입을 열었다. 안정도를 알리는 말투가 사뭇 사무적이었다.
덕분에 희윤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다시 해승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손 떨림은 가라앉았고. 어지럽거나 울렁거리는 건 어때요?”
“괜찮아졌어.”
해승이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희윤을 바라봤다. 약간의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사실 이곳에 오면서 가졌던 불쾌한 기분은 희윤과 만난 후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앞으로 희윤이 이번 일처럼 제게 말도 안 하고 사라지는 상황이 없게 하려면 확실히 못을 박아야 했다.
“다행이에요.”
다만 제 평소 고집대로 희윤을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자각한 상태가 아닌가. 앞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희윤이 더 멀어지게 할 순 없었다.
“말 안 하고 와서 미안해.”
해승이 말을 고르는 사이, 희윤이 먼저 사과해 왔다. 해승은 더 망설일 때가 아니라 판단해 곧바로 입을 열었다.
“형.”
“응?”
“계속 생각해 봤어요.”
뭘? 희윤이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형이 왜 자꾸 제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는 걸까 하고.”
말하고 나니 조금 공격적인 말투인 듯해 해승이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다른 말로 포장하는 대신 희윤의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깍지를 꽉 꼈다.
“형은 처음부터 그랬죠. 늘 제가 생각한 것과 달랐어요.”
해승이 마치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리는 듯한 투로 말했다. 어쩐지 말투에 웃음기가 밴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그래서 형을 좋아한다고요.”
해승의 말이 귀를 파고들자마자 마치 급류에 휩쓸린 듯한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희윤은 아찔해지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해승이 저와 같은 감정으로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희윤은 더 깊이 제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
“근데 형은 아니었나 봐요.”
해승의 눈빛이 침울하게 변했다. 표정도 조명이 꺼진 것처럼 어둑해졌다.
“아, 아냐. 나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그랬기에 더 문제였다. 이 멀리까지 날아와서도 계속 희윤의 머릿속에는 해승만 가득했다. 전투 중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끝나고 나서는 매번 스마트폰부터 확인했다.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는 걸 보면 미안한 마음이 생겼고, 해승이 언제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면 그 시간만 기다렸다.
기껏 정리하려고 왔는데 자꾸만 생각나서 곤란했건만.
“거짓말. 그럼 왜 그랬어요? 왜 제게 말 안 했어요? 왜 본래 지내던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어요?”
“그건…….”
질문이 결국 처음으로 돌아왔다. 각오했던 일인데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핑계를 댈 수도,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으니까.
자신이 한 말이 해승에게, 이 먼 곳까지 찾아온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희윤은 알았다.
“좀 더 신중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희윤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해승을 봤다.
“뭐?”
“좀 더 준비된 후에 고백하려고 했다고요.”
어쩐지 뾰로통해진 얼굴로 해승이 다시 말했다.
“저 형 좋아해요.”
뭐? 희윤의 눈이 커졌다.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황한 눈동자를 똑바로 보며 해승이 마저 고백했다.
“연애 감정으로 형을 좋아한다고.”
사람이 너무 놀라면 할 말을 잃는다는데 지금 희윤이 그랬다. 도리어 해승과 마주한 채 흔들리는 눈빛에 더 많은 말이 담긴 듯했다.
몇 번이고 입술만 열었다가 떼었다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희윤을 보며 해승이 빙긋 웃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형 부담스럽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알아만 주세요.”
물론 마음만 전하고 끝낼 생각은 일절 없다. 이미 해승의 머릿속에는 희윤을 제 곁에 붙들어 둘 계획 수십 개가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하지만 고작 좋아한다는 고백 하나에 저렇게 경악한 반응을 보이는 희윤에게 앞으로는 제 옆에 붙들어 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난…….”
희윤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고작 한 음절 뱉고 다시 또 망설였다.
나도 그렇다고 할까.
사실은 너보다 더 오래 좋아했을 거라고 고백할까.
이곳에 오게 된 이유도, 네게 향하는 마음을 잡을 방법이 없어서였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까.
망설이던 희윤이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막 입을 열 때였다.
“연희윤 에스퍼! 아직 멀었습니까?”
밖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곧이어 벌컥 문이 열리며 현장 지원팀 직원이 나타났다.
“얼른 출동해 주세요. 지금 괴물체들이 날뛰고 있다고 합니다.”
전투 상황이 급변했다는 소리다. 희윤은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80%는 채우려고 했는데.”
따라 일어난 해승이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막 달려가려던 희윤의 시선이 절로 스마트 워치로 향했다.
[에스퍼 안정도 : 77%]
잠깐 사이 안정도는 2%가 더 상승했다. 그도 모자라 1시간도 안 된 사이에 무려 17%를 더 채운 것이다. 그간 정소한과 함께 할 때는 고작해야 60%를 간신히 채운 수준으로도 만족했어야 했다.
이렇게 안정도 수치가 70% 이상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구현할 수 있는 능력도, 지속 시간도 더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희윤을 차분하게 해 주는 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사람 때문이었다.
“다녀오세요, 형. 기다리고 있을게요.”
해승이 맞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아까보다 진지해진 눈빛을 보다가 희윤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나도 할 말 있어. 다녀와서 할게.”
해승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부드럽게 휘며 웃음을 그렸다. 희윤은 심장이 쿵쿵 울리는 걸 느꼈다.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이를 꽉 깨물고 돌아섰다.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현장 지원팀 직원이 희윤에게 어서 가 달라고 사정했다.
희윤은 빠르게 물구름을 구현해 냈다. 허공에 떠오른 물구름이 급류를 타듯 점차 빠른 속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좌표 37.115684, 120.3065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