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워치에서 곧바로 괴물체의 위치를 알려 왔다. 하지만 워치를 통해 확인하지 않아도 희윤의 시야에는 진작 급박한 현장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에스퍼와 맞닥뜨린 괴물체가 놀라 도망치면서 시뻘건 불을 일으킨 탓에 그 주변에서 새카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치 확인했습니다!”
희윤의 물구름이 방향을 틀었다.
“피해!”
“이쪽으로 온다! 공격!”
“날려 버려!”
가까이 다가가자 에스퍼들의 고함과 괴물체들의 괴성이 한데 뒤엉켰다. 매캐한 탄 내와 홧홧한 열기는 덤이었다.
희윤은 물구름 위에서 전황을 빠르게 살폈다. 괴물체 두 마리가 연신 불을 뿜어내며 에스퍼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또 다른 양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에스퍼들이 괴물체를 상대하는 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미처 불길을 잡지 못해서 점점 더 범위가 확대되어 간다는 것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마지노선으로 정했던 지점 역시 아슬아슬했다. 저대로라면 곧 화마가 마추픽추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될 터였다.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아름답고 웅장한 고대의 유산은 쑥대밭이 되고 말 거다. 아무리 단단한 돌로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해도 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테니까.
첫날 저를 감동으로 몰아넣었던 세계의 유산을 떠올린 희윤이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연희윤 에스퍼!”
그때 물구름을 타고 있는 희윤을 발견한 물 속성 에스퍼가 소리쳤다. 도움을 바라는 간절한 외침에 희윤은 고민을 밀어내고 당장의 일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넓은 지역은 물줄기를 여러 개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는 잡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지난번 해수욕장에서처럼 어디선가 파도를 빌려 올 수도 없었다.
차라리 비가 내리면 모를까.
“아!”
희윤은 조금 전 제가 떠올린 생각에 낮게 탄성을 흘렸다. 그래, 차라리 세찬 비가 지금은 더 효과적일 것이다. 안정도도 어느 때보다 많이 회복되었으니 범위도 넓게 펼칠 수 있었다.
희윤의 눈이 맑고 쾌청한 하늘처럼 푸르게 빛나는 것과 동시에 주변으로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릉.
쿠르르르.
구름과 구름이 서로 부딪치며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어어?”
괴물체와 싸우고,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애쓰던 에스퍼들이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하늘을 봤다.
어느새 맑았던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깔려 있었다.
툭. 툭툭. 툭.
“……비다.”
“비가 내린다!”
한두 개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이윽고 줄기가 되고, 곧 비로 변했다.
꽤애애액.
불을 쏘아 대던 괴물체가 몸에 닿는 물방울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 정도의 비로는 불길을 완전히 잡을 수는 없었지만, 괴물체의 힘을 약화하고 점점 번져 가는 산불을 억제하는 데에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헉, 헉.”
어느새 물구름에서 내려온 희윤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렸다.
갑작스럽게 많은 능력을 사용한 후유증이었다.
“괜찮아요?”
괴물체를 상대하던 에스퍼가 달려와 희윤을 살폈다. 그는 희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파견 온 물 속성이었다.
“네 괜찮습니다. 상황은요?”
희윤의 희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에스퍼 여럿이 괴물체에게 능력을 퍼붓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비가 내려서인지 괴물체가 쏟아 내는 불의 기세가 아까보다는 확실히 약해진 것 같았다. 바닥도 수풀도 젖은 덕분에 불이 쉽게 옮겨붙지도 않았다.
“비 덕분에 괴물체들 움직임이 둔해졌어요.”
에스퍼의 말에 희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연희윤 에스퍼 안정도는 괜찮습니까? 이 정도 규모의 능력은 쓰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에스퍼의 표정은 불안했다. 이곳에 파견 온 에스퍼들 모두 만성적인 능력 사용 후유증을 겪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희윤의 후유증은 유독 정도가 심한 탓이었다.
희윤은 이곳에 와서 거의 한계까지 능력을 쓴 뒤로 안정도가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 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스마트 워치에 표시된 수치를 본 에스퍼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단한 능력을 구현한 후인데도 희윤의 안정도가 60%대인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해승이가 가이딩 해 줬어요.”
에스퍼의 시선이 스마트 워치에 있는 걸 알아챈 희윤이 덤덤히 상황을 알려 주었다.
“표해승 가이드가요?”
“네.”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궁금했지만, 에스퍼는 서둘러 관심을 몰아냈다.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자초지종을 듣는 것보다는 현장 상황에 집중하는 게 맞았다.
“연희윤 에스퍼는 지금처럼 계속 비를 조절해 주십시오. 다른 데는 신경 쓰지 마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해결하겠습니다.”
“네.”
희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도망 다니기 바빴던 괴물체가 태세를 전환해서 공격한 게 오히려 에스퍼들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괴물체 한 마리가 막 불을 쏘아 내려던 순간, 번개 속성 에스퍼가 전격을 내리꽂았다.
꽤애애애애액.
괴물체가 작살에 꿰인 듯 몸을 마구 비틀어 대자, 다른 한 마리가 그 광경을 보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녀석이 다시 또 도망치려 한다는 걸 에스퍼들은 바로 알아챘다.
“도망 못 치게 막아!”
- 쏴! 쏴요!
- 공격! 여기서 다 잡아 처리해야 해!
각 나라 언어로 외쳤지만, 스마트 워치에 내장된 실시간 번역기 덕분에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볼리비아에서 왔다는 B급 빙결 속성 에스퍼가 희윤이 만들었던 물의 장벽처럼 두꺼운 얼음 장벽을 세웠다.
꽝!
꾸액!
도망치던 괴물체가 장벽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장벽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제 역할은 톡톡히 했다.
물 속성 에스퍼가 괴물체에게 물 폭탄을 투여했고, 그 뒤로 빙결 속성이 두 다리를 얼려 버렸다.
“물러서요!”
한 마리를 해치운 물 속성 에스퍼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쩌저저적.
곧이어 괴물체 등에 거대한 얼음 창이 꽂혔다.
꾸에에에엑.
거대한 비명이 울려도 에스퍼들은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다. 두 마리 괴물체가 그대로 숨이 멎을 때까지 긴장의 끈을 풀지도 못했다.
“죽었어요!”
시간이 좀 흐른 후 에스퍼들은 괴물체 두 마리를 차례로 살폈다. 불도 연기도 뿜지 않았고, 나동그라진 몸체도 차가웠다.
“끝났다…….”
“드디어!”
여기저기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에스퍼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각자의 언어로 수고했다, 고생했다, 장하다 칭찬했다.
하지만 아직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자자, 얼른 불길도 마저 잡읍시다!”
그간 괴물체가 온 산을 헤치며 여기저기 내 놓은 화재를 진압할 때였다. 에스퍼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희윤이 비를 뿌려 둔 덕분에 작은 불씨들은 거의 잡혔지만, 제일 큰불은 아직 기운이 흉흉했다. 하지만 그것도 해가 거의 저물어 갈 때쯤에는 조금씩 잡혀 갔다. 이제 남은 건, 소방대원들이 할 일이었다.
무려 일주일을 끌어온 치열한 전투가 마침내 끝을 보였다.
잔불은 현지에서 출동한 소방대원들에게 맡기고 이능력자들은 전부 쿠스코로 철수했다.
희윤은 원래 그들과 같이 이동할 예정이었지만, 해승이 미리 준비해 둔 차량에 밀어 넣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해승과 둘만, 아니 정확히는 운전자와 비서를 포함해 네 사람만 있는 공간에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희윤 형,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이세요.”
돌아와서부터 내내 해승을 의식하고, 그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희윤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해승이 차분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희윤은 자신이 옆에 사람을 두고 계속 딴생각 중이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아냐. 괜찮아.”
“제대로 못 쉬었다면서요.”
희윤이 출동 나간 후 해승은 조 이사와 독대를 했다. 대체 일이 뭐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꼬치꼬치 캐묻기 위해서였다.
조 이사는 마치 이 순간이 올 거라는 걸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처음부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페루에서 연락이 왔던 것부터 희윤에게 그 내용을 전달한 것, 파견 동행 가이드를 정소한으로 선정하게 된 내용과 왜 그 사실을 숨겨야 했는지 등등.
하지만 정작 조 이사의 설명은 해승에게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미 들었던 얘기였으니까. 그보다는 이곳에서 희윤이 어떻게 지냈는지가 더 궁금했다.
‘뭐, 다른 에스퍼들이랑 비슷하지. 3교대로 돌아가면서 괴물체들을 추격하고 불을 끄러 다녔어. 안데스산맥이 워낙 넓고, 괴물체가 만나기 무섭게 도망치다 보니 위치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거든.’
그러다 보니 사실 제대로 쉬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고등급 에스퍼들은 특히나 탐색과 추격은 물론 전투까지 벌이느라 안정도가 푹푹 깎여 나가는데 희윤은 그게 잘 회복되지 않아서 더 문제였다고.
“음, 아냐. 그래도 정소한 가이드가 꾸준히 가이딩해 줘서 견딜 만했어.”
“흠.”
부득불 정소한의 편을 드는 희윤이 마음에 들지 않은 해승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아까처럼 따지지는 않았다.
“정말이야, 물론 네가 가이딩해 준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참, 아까 정말 고마웠어. 덕분에 전투에서 제대로 활약할 수 있었거든.”
해승이 먼저 입을 열어 준 덕분에 희윤도 쉘터에 도착하고서부터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가이드라면 당연히 정도는 해야 하는 거예요, 형.”
해승이 불퉁한 투로 대꾸했다. 희윤은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게, 확실히 다르긴 다르더라.”
계속 안정도가 제대로 회복되지 않으니 희윤은 쓰고 싶어도 능력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희윤은 남모를 죄책감이 생겼고, 그 탓에 후유증을 앓으면서도 편히 쉴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초반에 제대로 판단을 못 해서 능력을 마구 써 버렸거든. 그 후로 회복이 잘 안 되는 바람에 현장에 오히려 방해만 되는 것 같아서 미안했었어.”
물론 희윤은 그 탓을 정소한에게 떠밀지는 않았다. 순전히 제가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에스퍼가 그렇게 능력을 써도 안정화를 책임지는 게 가이드의 본분이에요. 정소한이 제 일도 확실히 하지 못한 걸 두고 형이 편들어 줄 거 없어요.”
그간 가이드만 믿고 능력을 펑펑 써 대는 에스퍼에게 온갖 독설과 비난을 퍼붓던 S급 가이드가 뻔뻔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한계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 건 내 실수 맞아.”
“자기 객관화 잘하는 건 좋은데, 남 잘못까지 형이 떠안을 필요는 없다니까요.”
“알았어, 알았어.”
못 말리겠다는 듯 희윤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네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였는데.”
이어진 말에는 웃음기마저 배어 나왔다. 해승 역시도 입술을 끌어 올려 미소를 그렸다. 희윤이 피곤해 보이는 것과 별도로 안색은 한결 편해졌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제가 와서?”
“응, 고맙고…… 미안해. 정말로. 말 안 하고 와서.”
희윤이 시선을 아래로 끌어 내리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시선이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매끈한 입술에 머물렀다. 순간 심장이 물이라도 찬 듯 울렁거렸다.
그때 해승이 희윤의 손을 붙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헉.”
“뭘 그렇게 놀라요?”
희윤이 입까지 벌리며 놀라자 해승은 도리어 픽 실소를 흘렸다. 대체 잠깐 사이 어디에 정신이 팔렸던 건지.
“아, 아냐.”
심지어 눈동자는 흔들리고, 귓불은 발갛게 변해 있었다. 해승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저 아직 못 들었어요, 형.”
이상하게 목이 마르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키던 희윤이 눈을 들었다. 검은 눈동자가 상냥한 빛으로 희윤을 맞이했다. 뭘? 말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입 속에서 맴돌았다.
“할 말이 있다면서요.”
붙잡은 희윤의 손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해승은 모른 척 살짝 힘을 주었다. 혹시 물러서는 게 아닐까 했는데 다행히 손은 제자리에 있었다.
놀란 중에도 여전히 저와 닿아 있으려는 희윤이 기특해 해승의 미소가 더 화사하게 변했다. 그건 희윤의 심장을 더 빠르게 펌프질하게 했다.
두근. 두근. 두근.
쿵. 쿵. 쿵.
어찌나 요란하게 뛰던지 소리가 귀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이제는 숫제 귀뿐 아니라 뺨과 목까지 달아오르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사정없이 떨리는 눈동자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평소 희윤은 덤덤한 표정에서 변화가 거의 없었다. 화를 내는 경우도 별로 없었고. 하지만 그건 착해서라기보단 그가 조금 무심한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가끔 이런 모습을 보여 줄 때가 있었다. 자신을 의식해서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는.
‘그저 귀엽다고만 생각해 왔는데.’
이제는 사랑스럽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해승은 부푸는 기대감을 애써 누르며 희윤이 더 말하기를 기다렸다.
희윤은 튀어나올 듯 두근거리는 심장을 두 손으로 꾹 누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랬어.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야.”
고작 그 짧은 몇 마디 하는 게 어찌나 힘이 들었던지 마지막 말은 꼭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아마 너보다 더 먼저 자각했을 거야.”
차마 해승과 마주 볼 용기가 없어 바깥을 봤다. 아직 사위는 연기로 부옇게 보였다. 하지만 괴물체도 제일 큰 불길도 잡았으니 조금 더 지나면 연기는 전부 흩어질 거고, 시야는 환해질 거다.
방황하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제 마음처럼.
이제는 개기 시작하는 바깥 풍경처럼 제 속에서 휘몰아치던 고민도 정리가 되었다.
“형.”
해승이 손가락 하나하나에 족쇄를 채우듯 깍지를 꼈다. 단단하게 마주 잡은 손을 내려다보는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건 지금까지 해승이 보였던 어떤 미소보다도 더 사람을 홀리는 것이었다.
“정말이에요?”
목소리마저 사탕이라도 문 듯 달콤했다. 어쩐지 그 달콤함이 제 입 안까지 스며든 듯해 희윤은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 혀끝을 해승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다행이에요.”
해승이 속삭이듯 말했다. 마주 잡은 손을 들어 제 입술로 가져가 댔다. 희윤은 손등에 닿은 온기에 놀라 움찔했다.
시선이 단번에 해승의 입술이 닿은 제 손등에 꽂혔다. 어쩐지 한번 그리로 움직이고 나니 다시 돌릴 수가 없었다.
“형도 날 좋아한다는 거죠?”
입술을 뗀 해승이 다시 웃음을 피워 내며 물어 왔다. 희윤은 믿기지 않아서 그런 건가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해.”
행동뿐만 아니라, 말로도 확실히 전했다. 어느덧 희윤의 얼굴과 목, 귀가 발긋해졌다. 심장은 진작 바삐 뛰고 있었다.
희윤은 또렷해진 눈으로 해승을 보며 제 뜻을 확실히 전했다.
“좋아해, 해승아.”
오래도록 고민하고 널 멀리 두었던 만큼, 더 헷갈리지 않도록. 네게 더는 미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게.
희윤이 단단해진 눈빛을 해승과 다시 맞추었다. 해승은 마치 홀린 듯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남은 건 본인들에게만 들리는 작은 심장 소리뿐.
그때였다.
해승이 점차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희윤은 제게 조금씩 다가오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것 같은데도.
“형.”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 숨결이 먼저 느껴졌다. 희윤은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제게 묻는 목소리는 그 뒤에나 알아챘다.
“응?”
“해도 돼요?”
뭘? 멍해진 머리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물음표만 띄웠다. 한데 마치 그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했다는 듯 해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키스요.”
뭐? 이번에도 답은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그보다는.
“할게요.”
마치 이미 허락이라도 받은 듯 해승이 입술을 겹쳐오는 게 더 먼저였으니까. 따듯한 감촉을 느끼며 희윤이 눈을 감았다.
몇 번이고 해승은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촉. 촉. 가볍고도 물기 어린 소리가 이어졌다.
어쩐지 그 감촉에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희윤은 감은 눈꺼풀을 속절없이 파르르 떨었다.
한참 이어지던 입맞춤은 차체의 거친 덜컹거림에 간신히 끝났다. 희윤의 얼굴은 어느새 잘 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변해 있었다.
희윤은 해승에게 닿아 촉촉해진 제 입가를 가리려 손으로 막았다. 그러고도 부끄러운 기분이 가시지 않아 눈을 밖으로 슬쩍 돌렸다.
사위를 뒤덮었던 연기는 어느새 사라져 시야가 맑게 개어 있었다.
‘다행이다.’
그대로 마음을 접지 않아서. 해승에게 사실대로 전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희윤은 입가를 가리던 손을 아직도 두근두근 뛰는 제 심장 위에 올리며 생각했다.
슬그머니 드러난 입술엔 미소도 잔잔히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