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덜컹.
비포장길을 달리는 차가 연신 덜컹거렸다. 흔들림이 얼마나 거센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몸이 다 들썩거릴 지경이었다.
“엇!”
돌연 차가 휙 방향을 틀었다. 어설프게 들썩이던 희윤은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대로 몸이 갸우뚱 기울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희윤의 볼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다.
“조심해요.”
해승이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희윤을 붙들었다. 아니, 붙든 게 아니라 머리 위에 손이 올라왔다. 희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낯선 체향을 맡고서야 제가 해승의 허벅지를 베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미안.”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희윤의 머리 위에 올린 해승의 손이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기, 해승아.”
희윤이 난처한 빛이 도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해승을 불렀다. 일어나고 싶다는 강력한 바람을 담아.
“눈 좀 붙여요, 형.”
그러나 돌아온 건 영 다른 소리였다.
‘아니, 어떻게 그래.’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데. 입맞춤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 후의 어색함에 몸부림치던 희윤에게 이건 큰 문제였다.
“아냐, 안 졸려. 일어날게. 괜찮아.”
볼과 귀에 닿은 촉감이 너무도 생생했다. 숨결도, 온기도, 체향도. 무엇보다 해승이 말할 때마다 머리에 닿은 부분이 조금씩 오르내리는 느낌 때문에 신경 쓰였다.
자꾸만 제 심장의 박동도 빨라져 가는 것 같아서 가뜩이나 난감한데 계속 이러고 있으라니.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 희윤이 기를 쓰고 고개를 들려고 하자 해승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아까와 달리 손을 순순히 물렸다.
가까스로 벗어난 희윤이 제 목덜미를 쓰는 척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어째 열기가 가라앉을 새가 없었다.
“어?”
어색한 기분에 슬쩍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던 희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자신들이 가는 방향이 쿠스코 시내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
“임무 다 끝났잖아요.”
해승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뭔가 불길한 기운이 희윤의 등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응, 그런데?”
“그럼 한국으로 돌아가야죠.”
맞는 말이긴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다름 아닌 쿠스코 공항이었다.
“여긴…….”
“형 피곤하시죠? 바로 이륙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라고 했어요.”
대체 그런 준비는 언제 한 걸까. 생각하던 희윤의 시선이 조수석에 앉은 비서를 향했다. 그의 어깨가 움찔 떨린 걸 보니 짐작이 갔다.
‘비서가 했구나.’
가만 보면 비서도 상사 잘못 만나 고생이었다. 늦은 밤 술 마신 상사의 호출을 받질 않나, 1시간을 길에서 기다리질 않나, 갑작스럽게 페루까지 날아오고.
심지어는 그 상사가 연애하는 티를 팍팍 내며 차 안에서 입맞춤을…….
“가, 가긴 어딜 가…….”
엉겁결에 이어진 생각의 끝에 희윤이 화르르 귀를 붉히며 얼른 말했다.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자꾸 생각의 흐름이 엉뚱하게 흐르니 말이다.
“조 이사님이랑은 이미 얘기가 다 됐으니까 괜찮아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말에 희윤은 당황한 얼굴로 해승을 보았다. 해승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희윤의 핸드폰이 세차게 울려 댔다. 희윤이 재빨리 액정을 확인했다.
“어?”
조 이사일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발신자명이 보였다.
“선배.”
희윤에게 전화한 건 다름 아닌 안효정이었다.
- 희윤 씨. 거기 상황 어때요? 아직도 전투 중이에요?
페루 소식을 전해 들은 안효정은 바로 파견을 신청했다. 그러나 본부 내 A급을 여럿 참여시킬 수 없다는 상부의 말에 희윤만 오게 된 것이었다.
“마침 오늘 끝났어요.”
- 그래요?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 홀가분하게 돌아오겠네요.
안효정이 한결 밝아진 투로 말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음, 돌아갈 채비 중이었어요.”
차마 해승의 독단적인 행보로 공항에 도착했단 소리는 할 수 없었다.
- 그렇구나. 근데, 희윤 씨. 표해승 가이드가 거기 쫓아갔다면서요.
목소리 톤도 낮추고, 볼륨도 확 줄인 안효정이 물었다. 아무래도 전화한 이유는 이거였나보다. 희윤의 시선이 절로 해승에게 향했다.
“왜요?”
눈을 마주친 해승이 웃으며 물었다. 희윤은 고개를 저었다.
- 괜찮아요?
마침 안효정의 걱정이 들려왔다.
“네. 혹시 본부에 무슨 일 있었어요?”
- 아! 아뇨, 없어요. 오히려 희윤 씨가 걱정이었죠. 본부에서 나가는 표해승 표정이 무시무시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해승을 바라보는 희윤의 눈빛에 왜 그랬느냐는 질책이 들어 있었다. 해승이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해승이가 일하다 말고 나갔다는 거예요?”
- 네, 그것 때문에 지부장님 심기가 많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래서 희윤 씨도 복귀 전에 미리 알아 둬야 할 거 같아 연락했어요.
“아…….”
조 이사도 해승에게 돌아가면 지부장과 징계에 관해 얘기하겠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을 듯했다.
안효정에게 고맙단 말과 작별 인사를 전한 후 통화를 종료한 희윤이 한숨을 푹 쉬었다.
“무슨 일이에요? 안효정 에스퍼가 또 무슨 헛소리 했어요?”
“헛소리라니. 그런 거 아니야. 그보다 너 일하던 중에 여기 온 거야?”
해승이 눈을 깜빡였다. 대답은 딱히 없었는데 어쩐지 무슨 소리가 나올지 짐작이 갔다. 저절로 또 긴 숨이 흘러나왔다.
“왜 그랬어.”
아무리 S급 가이드라고는 해도 무단으로 직장을 이탈하다니.
“형이 절 두고 멀리 가 버렸잖아요.”
해승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했다. 검은 눈동자가 찰랑찰랑 흔들리는 게 또 침울한 빛을 띠었다. 희윤은 이상하게도 심장이 또 술렁거리는 기분을 맛보았다.
“두고 가기는.”
“절 속이고 여기 온 거잖아요. 그럼 두고 간 거죠.”
“미안해.”
이렇게 나오면 희윤에게는 할 말이 없다. 잘못한 게 맞으니까. 사과밖에 꺼낼 게 없지 않은가.
해승을 달래려 손을 끌어왔다. 아까 그가 했듯 손가락 사이사이를 맞물려 틈 없이 꼭 쥐었다.
“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이죠?”
“응.”
아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입술까지 겹친 사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승에게는 다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이딩은요.”
“응?”
“가이딩도 저한테만 받으셔야죠.”
“어…….”
그게 그렇게 되나. 희윤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래도 담당이 둘이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저랑 사귀면서 다른 가이드에게 신체 접촉을 허락하겠다는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고백은 하긴 했는데. 우리가 사귄다고 했던가. 딱히 오늘부터 시작이라는 말은 안 했는데. 그래도 사귀는 건 맞지.
‘아니, 지금 이제 중요한 게 아니잖아.’
또 엉뚱한 곳으로 빠진 생각에 희윤은 서둘러 정신을 추슬렀다.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속도가 느려서 효율성도 안 좋고……. 뭣보다 제가 있는데 왜요.”
효율성이야 확실히 해승을 따라갈 가이드가 없긴 했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정소한이 할 때는 60%도 간신히 넘기던 안정도가 해승의 도움을 받을 때는 고작 1시간도 안 돼서 80% 가까이 회복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제하더라도.
“전 싫어요, 형.”
네가 싫다고 해도.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데. 일단 본부 규정이라는 게 있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희윤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전과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희윤과 해승의 관계가 지금 같지 않았다.
‘사귀는 사이니까.’
속으로 되뇌니 또 심장이 제멋대로 술렁거린다.
“형은 제가 다른 에스퍼 가이딩 해도 아무렇지 않아요?”
순간 희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해승에게 새로운 에스퍼가 생긴다니.
저 말고 다른 사람과 단둘이 한 공간에 있게 되다니.
순간 최관우와 함께 있던 해승이 떠올라 이번에는 심장이 얼음물에라도 담긴 듯 차게 굳어 버렸다.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희윤이 단단히 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깍지 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놓치기 싫다는 듯. 다른 사람에게 가지 말라는 듯.
해승은 그 의미를 손쉽게 읽어 냈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해승이 손을 뻗어 희윤의 뒷머리를 붙들었다.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쪽.’ 경쾌한 소리가 입술에서 났다.
“아.”
뒤늦게 희윤이 입을 벌렸다. 그러자 이번엔 해승이 더 깊이 밀고 들어왔다.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하고 희윤은 돌처럼 굳어 버렸다.
마치 물속에라도 들어간 듯 귀가 먹먹해졌고, 시야는 부옇게 흐려졌다. 정신이 혼미해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남은 건 뜨겁게 휘몰아치는 감각뿐이었다.
“헉.”
마침내 해승이 멀어졌을 때, 희윤에게서 거친 숨이 쏟아져 나왔다. 해승은 희윤의 젖은 입가 주변을 제 엄지로 문질러 주었다.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윤기 있게 빛나고 있었다.
“형, 자꾸 그러지 말아요.”
뭐가. 아직 호흡이 가다듬어지지 않아 희윤은 말도 못 하고 올려다보기만 했다.
“저 참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뭘. 이번에도 눈으로 물었다. 해승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푹 한숨을 쉬었다.
“다 왔네요.”
그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희윤은 그제야 자신들이 차 안이라는 것과 앞에는 운전자와 비서가 앉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희윤이 벌컥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 뒤를 해승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따라갔다.
비행은 순조로웠다. 전용기는 침실과 거실, 욕실, 심지어 주방까지 완벽하게 갖추어 있어서 마치 집에서 지내는 듯한 안락함을 주었다.
페루로 출발할 때도 비즈니스석이라 제법 편하게 왔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해승의 전용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문제는 희윤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어색함이었다. 고백도 받고, 사귄다고도 했는데 왜 단둘이 있을 수 없는가.
“형, 졸리면 들어가서 주무세요.”
“으응…….”
거실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는 듯 조는 듯 연신 고개를 들었다가 떨어뜨리기를 반복하던 희윤이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시선을 들었다.
잠이 제대로 가시지 않아서인지 시야가 흐리멍덩했다.
“침대에 누워서 편히 쉬세요.”
이마에 따듯한 손이 닿았다. 머리칼을 쓸어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희윤은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서서히 의식이 또렷해지면서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가 떠올랐다.
“아. 아냐, 괜찮아. 너야말로 피곤할 텐데 얼른 가서 자.”
희윤이 서둘러 고개를 붕붕 저으며 거절했다. 애써 떨구어 낸 잠기운이 도로 달라붙을까 봐 눈가에도 바짝 힘을 줬다.
“저보단 형이 자야 할 것 같은데요.”
해승이 희윤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부드럽고 가벼워 도로 수면을 유발하는 손길은 희윤으로서는 고마우면서도 원치 않는 친절이었다.
“영화 마저 보고 자려고. 잠 다 깼어, 고마워.”
해승의 시선이 TV로 향했다. 희윤이 말한 영화는 이미 끝나서 엔딩 크레디트가 한창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희윤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낭패라는 듯한 눈을 했다. 화면이라도 한 번 본 후에 말할걸. 의식하고 있단 티를 혼자 다 내고 있었다.
“형, 혹시 제가 불편한 거예요?”
“어? 아냐, 불편하긴. 몇 달 동안 같은 침대에서도 잤는데!”
당황해서 횡설수설 대답하던 희윤은 조금 전 제가 뱉어 낸 말을 떠올리고 속으로 ‘악.’ 비명을 질렀다.
같은 침대에서 잤다니.
단어 선택이 좋지 않았다. 해승을 슬쩍 곁눈질했지만 자세 때문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탓에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전에도 희윤은 옆에 누운 해승이 신경 쓰이긴 했다. 그렇지 않은가. 마음에 품은 사람이 가까이 있는데 시선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이제는 서로의 마음을 깨닫고 사귀기 시작한 때 아닌가. 그때처럼 나란히 누워 있는데 평정심을 유지할 자신이 희윤에게는 없었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다행히 해승은 자라는 말만 반복했다. 못 들은 건지 들어도 별생각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희윤은 안심했다.
“넌?”
“전 할 일이 있어서요.”
혹시 일부러 그런 건가? 희윤이 미심쩍게 보다가 거실 한쪽에 서 있는 비서를 발견했다. 해승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할 일이 있다는 건 핑계가 아닌가 보다.
“그럴게.”
“푹 쉬세요.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으니까.”
해승이 희윤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물리며 말했다.
“으응.”
희윤도 그제야 아직 해승이 제게 머물러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사이 몸을 일으킨 해승이 비서를 대동하여 침실 반대편에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사무 공간으로 사용되는 서재였다. 잠시 희윤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다 뒷머리를 슬슬 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느릿느릿 움직인 곳은 당연히 침실이었다. 서해만 갯벌 이후 전용기를 탔을 땐, 여기는 구경만 했었다.
널찍하고 푹신해 보이는 침대와 은은한 조명이 희윤에게 얼른 오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음…….”
슬금슬금 침대로 올라와 폭 파묻힌 듯 폭신폭신한 베개에 머리를 괴자 금세 솔솔 졸음이 밀려왔다.
사실 피로감은 진작 몰려든 상태였다. 이대로 잠들었다가 깨면 거의 도착해 있으려나 싶을 지경이었으니까. 그렇게 희윤의 정신은 꿈결 너머로 흘러갔다.
그렇게 얼마나 잠들었을까.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제가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는 감각이 전해졌다.
희윤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잠든 섬세하고 고운 해승의 얼굴이 보였다.
“!”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이 덜컥 멈추었다.
‘왜, 왜, 왜, 어, 언제?’
왜 여기에서 잠든 거지. 언제 내 옆에 와서 자기 시작한 거지. 의문은 제대로 떠오르지도 못하고 마치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버벅거렸다.
당황한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던 희윤 입을 벌리고 조용히 숨을 뱉어 냈다. 어찌나 놀랐던지 가슴이 다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자다 깨서 마주치면 누구나 이런 거 아니겠는가.
“…….”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속눈썹이 참 가지런한데다 촘촘하고 길었다. 곡선이 매끄럽게 그려진 모양을 보니 자꾸 손끝이 움찔거렸다. 만지고 싶어서.
희윤은 서둘러 시선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도 있었다.
‘으악!’
하필이면 눈길이 멎은 곳이 몇 번이나 해승과 맞물렸던 입술이었다. 보는 순간 절로 머릿속에 입 맞추던 순간이 그려졌다.
희윤의 귀 끝이 스위치를 켠 조명처럼 또 불그스름하게 변해 갔다. 이제는 거의 조건 반사 같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꿀꺽. 별안간 마른침이 목으로 넘어갔다.
‘안 되겠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사고라도 칠 듯한 위기감이 들었다. 마침 목도 마른 것 같으니 물도 한 잔 마시고, 어디쯤 왔는지 확인도 하고 싶었다.
‘비행기에 타고서는 한국까지 대략 23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희윤은 채 몸도 다 일으키지 못했다. 매트리스를 짚은 손목이 길고 커다란 손에 붙들렸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요?”
곧이어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이 절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직 해승은 눈을 감고 있는 채였다.
“깼어?”
“아뇨, 아직요.”
해승이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않고 대꾸했다. 안 깼다면서 대답은 꼬박꼬박 잘했다. 손목을 감싸 쥔 엄지가 슬금슬금 여린 살갗을 어루만졌다.
별거 아닌 접촉인데 희윤은 또 목 뒤가 달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더 자.”
은근슬쩍 해승의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물론 해승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다른 손마저 그에게 붙들렸다.
“형은요?”
해승이 몸을 반듯하게 고쳐 누우며 물었다. 아직도 눈이 감긴 얼굴은 일어나기 싫다는 듯 보였다. 희윤은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걸 느꼈다.
웃음이 날 듯 말 듯 했다.
“물 한 잔 마시고 오려고.”
그 소리에 기어이 해승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검은 눈동자가 곧바로 희윤을 찾았다. 마치 잠든 적 없다는 듯 차분하고 조용하고, 또렷한 빛으로.
순간 또 갈증이 이는 듯 입 안이 말랐다. 역시 물을 마시고 와야겠다.
“넌 더 자.”
해승이 희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희윤의 손을 잡아끌어 그 위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살갗에 닿는 온기에 희윤이 입가를 움찔거렸다.
해승과 닿은 부위가 뜨겁고 간지러웠다.
“형도 더 자요.”
마치 희윤이 이대로 침대를 벗어나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해승이 매달렸다. 심지어는 희윤의 손등을 제 뺨에 문질러 댔다.
그게 꼭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반려동물처럼 보였다. 이러면 반칙인데.
“물만 마시고 올 거야.”
희윤이 웃음기 어린 투로 말했지만, 해승은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찌푸려진 눈매가 보였다.
아직 스물셋밖에 안 된 애가 저 매끈한 피부에 자꾸 주름을 만들려고 한다. 희윤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손 하나를 풀어내 해승의 눈꼬리를 위로 쭉 치켜올렸다.
“……뭐예요?”
그러게. 지금 나 뭐 했니. 희윤은 조금 전 제가 한 행동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움찔했다. 아까 그렇게 의식해 놓고 이게 무슨 짓인가.
“앗!”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 희윤은 다시 누운 상태였다. 어느새 해승이 위에 엎드려 있었다. 붙들린 손목도 커다란 손에 눌린 채였다. 희윤의 시선이 절로 압박당한 제 손목으로 향했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해승이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물론 완전히 물러선 건 아니었다. 대신 언제나 늘 그렇듯 손가락이 자물쇠를 채우듯 하나씩 끼워졌다.
“우리 형은 잠에서 깬 모습도 예쁘네요.”
해승이 생긋 웃으며 말한다. 그건 내가 할 소리라고, 희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보다 대체 이게 무슨…….
“모닝 키스해도 되죠?”
미소를 띤 얼굴이 건넨 말이 뜻밖이었다.
“뭐?”
희윤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마음대로 숨도 못 쉬게 하던 얼굴이 단숨에 거리를 좁혀 왔다.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희윤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덜컥. 호흡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눈도 질끈 감겼다.
그 순간 입술에 말캉한 느낌이 닿아 왔다. 조금은 건조하지만 열기를 품은. 그러면서도 어쩐지 단맛이 나는.
해승과 하는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
두 번이 맞나. 처음에도 몇 번이나 접촉이 이어졌던 탓에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야, 말이라도 좀 하고 해.”
마침내 해승이 물러갔을 때, 희윤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싫었어요?”
가만 보면 해승은 꼭 제가 불리할 상황에 저런 질문을 던졌다. 싫었냐느니 불편하냐느니. 희윤이 어떤 말을 할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아니, 안 싫었어.”
매번 좋아서 문제지. 진짜로, 곤란하다. 가뜩이나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엄청난 자극을 받지 않았나.
희윤은 부디 해승이 제 흥분한 아랫도리 사정을 모르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