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비켜 봐. 나 정말 물…….”
차마 화장실 핑계는 댈 수 없었다. 그랬다간 눈치 빠른 해승이 제 상태를 단번에 알아차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희윤은 시선마저 슬쩍 옆으로 피한 채 말했다. 덕분에 해승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동자가 짓궂게 빛나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그저 해승이 순순히 대꾸하면서 물러서니 안심했을 뿐이었다. 절로 기나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희윤이 주춤주춤 몸을 움직여 침대 밖으로 나갈 때까지 해승은 얌전히 앉아서 지켜보았다. 시선은 희윤이 어떻게든 감추려 하는 아래 중심부에 머물렀다.
“다녀올게.”
어찌나 어색해하는지 몸짓에서 다 티가 났다.
‘귀엽네.’
희윤이 알았다면 당장 얼굴을 붉힐 소리를 해승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저보다 연상이면서 가만 보면 정말 귀여울 때가 많았다.
지금도, 입을 맞출 때도.
해승도 그제야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희윤만 반응한 게 아니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자극을 받았다.
해승의 걸음은 희윤과 다른 곳으로 향했다. 곧 욕실에서 물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물 한 잔을 마셨다. 열기가 안 가라앉는다. 안 되겠다. 또 한 잔을 가득 따라서 벌컥벌컥 넘겼다.
“하…….”
물컵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던 희윤이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닦다가 움찔 멈추었다. 희윤의 시선이 촉촉해진 손등에 닿았다가 서둘러 떨어졌다.
의식이 입술로 향하자 조금 가라앉은 듯했던 아래쪽 사정이 또 달라졌다. 낭패감에 희윤이 입술을 움찔거렸다.
괜히 따끈따끈하게 느껴지는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다른 데로 신경을 옮겨야 할 듯해서 서둘러 타원형으로 뚫린 창밖을 보았다. 새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희윤의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과는 달리 참으로 맑고 고요한 풍경이었다.
덕분에 해승에게 가이딩 받을 때 급격하게 치솟는 제 안정도처럼 한없이 상승하던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희윤은 아예 창가로 걸어갔다. 출발할 때도 낮이었는데 꽤 오랜 시간을 이동한 지금도 여전히 사위가 밝았다. 아무래도 시간과 시간 사이를 비행하는 중이라 그런 듯했다.
“어디쯤이지…….”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희윤이 혼잣말을 흘렸다. 푸르게 출렁거리는 바다만 보이니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스마트 워치에 연결된 GPS로 좌표를 확인 후, 지도 앱을 켜서 찍어 보면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지금 창밖을 보는 이유는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였으니까.
망망대해를 보고 있자니 점차 온 얼굴을 덮쳤던 열기가 가라앉아 갔다.
“아직 태평양 위를 날고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알고 싶으시면 확인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희윤이 화들짝 놀라며 옆을 돌아보았다. 해승의 비서가 서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게 느껴져 희윤은 감정을 꾹 눌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다소 아귀가 맞지 않는 생각이 불쑥 튀어 올랐지만, 희윤은 인식하지 못했다.
“아, 안녕하세요.”
“푹 쉬셨습니까, 연희윤 에스퍼님.”
희윤의 인사에 비서도 담담하게 마주 답했다.
“네.”
뒤늦게 제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건넨 걸 깨달은 희윤이 목덜미를 쓱 문지르며 다시금 창으로 눈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위치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걸 오해했는지 비서가 말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그냥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궁금했던 겁니다.”
자꾸만 해승과의 일을 의식해서 신경을 돌리려 했을 뿐인 희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기껏 식혀 두었던 뺨이 도로 붉어진 건 덤이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그 모습을 가만 보던 비서가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아뇨, 없어요.”
희윤이 붕붕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물끄러미 비서를 봤다. 진작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말 걸 기회가 없었다.
“저기, 전에 해승이 집에 데려다주신 분 맞으시죠?”
혹시 설명을 더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때는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표해승 가이드의 개인 수행 비서, 김석민이라고 합니다.”
“네, 전에 저도 실례가 많았어요. 오래 기다리시게 했는데 사과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희윤은 야심한 밤에 불러 놓고 1시간이 넘게 밖에 세워 두었던 일을 뒤늦게 사과했다.
“아닙니다.”
비서는 괜찮았다느니 하는 말 대신 짧게 대꾸했다. 자로 잰 듯한 사무적인 태도라 희윤도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한 번 더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럼 이만 쉬십시오.”
더 용건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비서가 인사했다. 희윤도 마주 꾸벅하고 침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해승이 보이지 않았다.
“?”
빈 침대를 의아하게 보다가 욕실로 시선이 갔다. 물소리가 나고 있다는 걸 그때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더 잘 줄 알았더니.”
왜 씻는 거야. 별생각 없이 그런 생각을 하던 희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냐, 안 했어. 상상 안 했어.”
서둘러 휙휙 고개를 저은 희윤이 시선을 욕실에서 떼 침대 어딘가로 던졌다. 하필이면 헝클어진 시트와 삐뚤게 놓인 베개가 눈에 들어왔다.
틈 없이 맞물렸던 두 개의 입술이 떠올라…….
“으악!”
왜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이러는지 모르겠다. 희윤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이 장소에서 벗어나야 할 듯했다.
“형, 왔어요?”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수증기와 함께 물에 젖은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반쯤 몸을 돌리던 희윤의 시선이 저절로 그리 향했다.
해승이 보였다. 마치 안개에 휩싸인 듯 선 그가 물기를 털어 내려는지 수건을 머리에 가져다 댄 채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로는 해승의 맨몸이…….
“헉!”
희윤이 후다닥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또 벌렁벌렁 미친 듯이 뛰었다. 너무 심각해서 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걱정마저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턱 바로 아래에서 펄떡거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개운하네요. 형도 씻을래요?”
언제 다가왔는지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희윤은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눈동자만 사정없이 떨어 댔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허공에 해승의 모습이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어. 나도, 나도 씻어야겠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희윤은 부리나케 해승을 지나쳤다. 해승의 말대로 찬물이라도 맞아야 자꾸 이상하게 의식되는 걸 좀 가라앉힐 수 있을 듯했다.
차마 해승 앞에서 옷까지 벗을 엄두는 나지 않아 안에 들어와서야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해승이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욕실은 습한 공기가 맴돌았다.
은은한 보디 워시 향이 공기 중에 떠돌아 희윤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한데 그 미세한 향에 순간 몸이 훅 뜨거워졌다.
“희윤 형.”
“으악!”
희윤이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쿠당탕.
동시에 바닥에 있던 목욕용품이 희윤의 뒤꿈치에 걸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형? 무슨 일이에요?”
다행히 해승이 안으로 들어온 건 아니었다. 그저 문밖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
희윤은 숫제 고장이라도 난 듯 쿵덕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심호흡했다.
등이 축축했다.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욕실 벽에 기대 버렸기 때문이었다.
“별거 아냐. 목욕용품 아래에 내려 둔 걸 발로 찼어.”
“다친 건 아니죠?”
“응.”
다친 건 아닌데 그보다 더 아플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려서 문제다. 해승이 부디 제 떨리는 음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랐다.
“무슨 일이야?”
희윤은 가까스로 제 발랑거리는 심장을 다독이고 용건을 물었다. 해승과 페루에서 다시 만난 이후로 어쩐지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 것 같았다.
“갈아입을 옷 여기 두고 갈게요.”
“응.”
“정말 괜찮죠? 안 들어가 봐도 돼요?”
“어, 괜찮아. 정말 괜찮아.”
희윤은 해승이 보지 못할 걸 알면서도 휙휙 고개를 내저었다. 들어오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미 티셔츠도 벗어 던진 상태인데. 그러자 자연히 또 조금 전 보았던 해승의 몸이 생각났다.
“으악!”
“형?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아냐! 별거 아냐!”
다급하게 묻는 목소리에 희윤이 서둘러 외쳤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얼른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 아래 섰다. 뜨겁게 달아오르다 못해 빨개진 얼굴은 식을 줄 몰랐다. 몇 번이나 세수하고 나서야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희윤은 한참 동안 욕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남들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할 사정이 그를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분간 고군분투한 끝에 욕실을 벗어난 그가 해승의 얼굴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고민했다.
다행히 해승은 보이지 않았다. 희윤은 안도하며 문 옆에 반듯하게 개어 놓은 옷을 가져가 입었다.
옷을 입고 다시 방 안을 둘러봤지만, 여전히 해승은 없었다. 슬쩍 시선이 침대로 가 닿았다. 그 위도 깨끗하게 정리된 채였다.
아마도 밖에 있는 듯해 나가보니 소파에 앉은 해승과 곁에 서서 무어라 얘기하는 비서가 보였다. 먼저 희윤을 눈치챈 건 비서 쪽이었다.
눈인사를 건네는 사이 해승도 이쪽을 돌아보았다.
“형, 배고프죠? 식사해요.”
별것 아닌 말이다. 그런데 왜 또 두근거리지. 심장이 정말 고장 난 게 아닌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희윤은 목뒤를 매만지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