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85)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희윤은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지부장이었다.

- 연희윤 에스퍼, 고생 많았어요. 내일하고 모레, 특별 휴가로 해 뒀으니까 푹 쉬고 출근하세요.

“휴가요? 감사합니다, 지부장님!”

이틀간의 휴가 소식에 희윤이 기쁘게 웃으며 해승을 봤다.

- 그리고 옆에 표해승 있죠? 좀 바꿔 줄래요?

마치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듯 나온 지부장의 용건에 희윤은 움찔했다.

“잠시만요.”

그리고 희윤은 혼자 민망한 표정을 하며 얼른 스마트폰을 건넸다. 해승이 의문 섞인 눈초리를 했지만 얌전히 건네받았다.

“뭐예요?”

희윤의 뺨을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이 가볍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정작 지부장에게 묻는 말투는 삐딱했다.

희윤은 해승의 손을 끌어와 잡으며 그러지 말라는 의미로 살살 문질러 주었다. 해승이 싱긋 미소 짓는 걸 보며 본인도 입꼬리를 올렸다.

- 뭐긴. 넌 진짜……. 에효, 말해 뭐 하겠냐. 너 감봉 6개월이야! 그렇게 알아!

“감봉 6개월? 뭐, 그래요.”

해승은 태연한데, 도리어 감봉이란 소리에 희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알겠고. 저도 희윤 형이랑 같이 휴가 쓸게요.”

- 야! 넌 이 와중에 무슨 휴가야!

“못 쓸 건 뭐예요. 어차피 남는 연차.”

- 아오, 저걸 진짜!

성질을 부리는 지부장에게 픽 실소를 날린 해승이 미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감봉이라니? 얼마나 줄어드는 거야? 6개월이나?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

“뭘요, 괜찮아요.”

어차피 해승에게 돈은 항상 넘쳐 났다. 하지만 제 걱정을 하는 희윤이 좋아서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다.

“가요, 집으로. 휴가 즐기러.”

이걸 이렇게 가볍게 넘겨도 되나. 희윤은 고민이 되었지만, 타격 하나 없는 얼굴을 보다가 결국 얌전히 따라 걸었다.

* *

“형, 이거 먹어요.”

멍하니 TV를 보는 희윤 옆에 해승이 앉으며 팔을 뻗었다. 낮은 거실 테이블에 알록달록 과일이 올라간 접시가 놓였다.

해승은 포크에 토마토 하나를 찍어 희윤 앞에 내밀고 있었다. 희윤이 뭐 하냐는 눈빛을 보내자 토마토로 입술을 툭 건드리며 장난쳤다.

지금 상황이 어지간히 즐거운 듯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토마토가 쏙 들어왔다. 희윤은 탱글탱글한 껍질과 톡톡 튀는 알갱이를 음미하면서 해승을 흘겨봤다. 그런 희윤과 눈을 마주며 해승도 토마토를 입에 쏙 넣었다.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요. 아직 피곤해요?”

“아냐.”

사실은 잠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일어나게 된 건 바로 옆에 심장을 이상하게 뛰게 하는 원흉이 바짝 붙어서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윤은 해승과 다른 방에서 자려고 했다. 그래야 둘 다 편히 쉴 수 있을 거라는 핑계도 나름대로 생각해서 꺼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아직 방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희윤이 믿지 못하고 손님방 문을 열어 보았지만 곧 허탈한 숨을 흘리고 말았다.

침대에는 시트고 이불이고 아무것도 없었고, 방 안에는 마치 창고처럼 온갖 박스며 물건이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늦은 밤 이제 와 치울 수도 없는 일. 그래서 희윤은 어쩔 수 없이 해승과 다시 한 침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잠은 제대로 오지 않았고, 간신히 눈을 감고 나서도 새벽이 되자마자 도로 뜨고 말았다.

희윤은 결국 거실로 나가 케이블 방송에서 하는 영화만 내리 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래요? 그럼 형, 우리 외출할까요?”

“외출?”

“네, 모처럼 쉬는 날인데 이렇게 보내긴 아쉽잖아요.”

“아.”

절로 시선이 창 너머로 향했다. 날씨가 쨍하니 맑긴 했다.

“야외는 별로죠?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실내로 놀러 가요.”

해승이 귀가 쫑긋해지는 제안을 던졌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있자니.

“저랑 같이 놀아 준다면서요.”

아예 희윤이 거절할 수 없게 과거의 약속까지 끌어왔다. 이쯤 되면 희윤도 더 머뭇거릴 수 없었다.

“그래, 가자.”

지난번 바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을 떠올리며 희윤은 해승이 데리고 가는 데라면 전부 괜찮은 곳이리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꺄아아아아아.

우아아아악.

빠른 속도로 열차가 바닥으로 추락하자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무서워서인지 즐거워서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희윤은 조금 넋을 놓은 얼굴로 고개를 들고 롤러코스터를 구경했다.

“형?”

여기가 어디더라. 내가 왜 여기에 왔더라. 희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중, 팔이 붙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반짝반짝 웃고 있는 해승이 보였다.

그제야 여기가 어디인지 기억이 났다. 놀이공원이다. 서울에서 가장 크고, 사람도 제일 붐비는.

“우리도 타러 가요.”

해승의 미소는 평소보다 더 밝고 환했다. 잡아끄는 손길에도 한껏 흥분이 전해졌다. 얼떨결에 끌려가면서 희윤은 훌쩍 큰 뒷모습을 보았다.

해승은 뒤태마저 빛이 나는 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걸어갈 때마다 주변의 시선이 절로 쏠렸다.

‘연예인 아니야?’

‘영화배우? 아이돌? 아니면 모델인가?’

‘완전 예쁨잘이다. 사진 찍어도 되나?’

소곤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찰칵. 누군가 기어이 카메라를 켰는지 셔터음이 들렸다. 희윤이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누가 찍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워낙 주위에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지워 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둘까.

“이거 타요.”

희윤이 망설이는 사이 해승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길쭉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봤다.

“……저거?”

해승이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저걸…….”

“원래 필수로 타는 거라고 해서요.”

“대체 누가?”

“영화나 드라마에 항상 나오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건 좀. 희윤의 시선이 도로 해승이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발랄한 음악이 흐르는 그건 놀랍게도 회전목마였다.

“가요, 형.”

해승이 경쾌한 목소리로 걸음을 뗐다. 당연히 그에게 잡힌 희윤도 끌려갔다. 줄이 길지 않아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한 타임이 끝난 뒤 대기 시간, 앞에 3팀을 먼저 들여보내고 희윤과 해승도 직원 앞에 섰다. 웃으면서 아이들에게 인사하던 직원이 두 사람을 봤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희윤은 차마 직원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슬그머니 외면했다. 그러다 그대로 해승에게 끌려 회전판 위에 섰다.

“어떤 거 탈래요?”

“…….”

어떤 것도 안 타고 싶다. 그렇지만 인제 와서 그런 말은 해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빨리 아무 데나 앉는 게 편할 듯했다.

희윤은 재빠르게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걸 골랐다. 휘황찬란한 말들 사이에 간간이 끼어 있는 뚜껑 없는 마차였다.

“저거 탈게.”

목표를 찾아낸 희윤이 서둘러 걸어가 앉았다. 해승은 천천히 그 뒤를 따르다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었다.

“뭐 해?”

‘해?’ 하고 희윤이 말하던 순간. 찰칵. 셔터 소리가 들렸다. 눈꺼풀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뒤늦게 이해가 됐다.

“웃어 봐요, 형. 너무 어색해 보여요.”

심지어 해승이 뭘 하는지 본인 입으로 알려 주었다. 어이가 없어 절로 피식 실소가 흘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또 찰칵 소리가 났다.

해승이 액정에 뜬 사진을 보더니,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형은 실물이 더 낫네요. 사진이 제대로 못 담아내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지울 생각은 안 했다.

“나도 보여 줘.”

정작 사진이 찍힌 희윤은 제가 어떻게 나왔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 퍼레이드가 곧 시작됩니다. 서둘러 착석해 주시고, 120cm 미만 어린이 여러분은 안전을 위해 마차에 올라 주세요. 탑승하지 않는 분들은 퇴장 부탁드릴게요!

직원의 안내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해승아.”

희윤은 그때까지도 제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해승을 불렀다. 해승이 그제야 스마트폰에서 눈을 뗐다. 희윤이 너도 얼른 올라타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때 음악이 바뀌었다. 곧 회전목마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안에 서 계시는 신사분. 얼른 앉아 주세요.

기어이 해승에게 주의가 떨어졌다. 보다 못한 희윤이 결국 해승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해승은 희윤에게 이끌려 마차에 올랐다.

성인 둘이 탔으니 비좁은 건 당연했다.

“…….”

희윤은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형, 가만 계세요. 위험해요.”

해승이 희윤에게 상체를 기울여 속삭이듯 말했다. 입술이 귀에 닿을 듯 바짝 다가와 있었다. 솜털이 오소소 돋았다.

그러나 고난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야. 뭐 해.”

해승이 긴 팔로 희윤의 등허리를 감아 제게 당겼기 때문이었다. 놀란 희윤이 해승의 팔을 꽉 붙들었다.

“놔.”

혹시 누구라도 들을까 소리를 잔뜩 죽여 말했다. 물론 두 사람 근처에는 다른 승객은 없었다.

본래도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데다 근처에는 말이며 마차는 다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희윤은 목소리를 크게 키울 수 없었다.

“자, 형. 여기 보세요.”

안절부절못하는 희윤과 달리 해승은 태연했다. 심지어 희윤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붙이며 스마트폰을 든 팔을 쭉 뻗어서 올리기까지 했다.

사진을 촬영하려는 듯했다.

“웃어요.”

활짝 웃으며 해승이 말했다. 동시에 찰칵. 또 셔터음과 함께 사진이 찍혔다. 액정에는 어색해하는 희윤과 환하게 미소를 지은 해승이 마차에 앉은 장면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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