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85)

어떻게 그 창피한 시간을 견뎠는지 모르겠다. 빙글빙글, 흥얼흥얼, 빙글빙글, 흥얼흥얼. 희윤은 오로지 앞만 뚫어지도록 바라보며 어서 끝나기를 바랐는데 옆에 앉은 해승은 노래까지 따라 하며 상황을 즐겼다.

가끔 카메라로 희윤과 돌아가는 풍경을 찍는 여유로움도 즐겼다. 그중 제일 괴로운 건 해승이 함께 찍자며 어깨동무를 하고, 허리에 팔을 감고, 손에 깍지를 끼는 거침없는 스킨십이었다.

‘부끄럽다고!’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희윤이 발버둥 쳐 봐야 갈 데가 한정되어 있다는 게 가장 문제였다. 마침내 회전목마가 멈추었을 때, 희윤은 고산증에 시달리며 안데스산맥을 뛰어다니던 때와 비슷한 피로감을 느꼈다.

“재밌었다. 그죠, 형?”

해쓱해진 희윤과 달리 해승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어찌나 환한지 온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희윤은 그런 해승을 힐끔 곁눈질하고는 뒷머리를 쓸었다.

‘그래, 뭐. 네가 좋으면 괜찮은 거지.’

마음이 바뀌고 나니 회전목마 타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형, 잠시만요. 여기 서 봐요.”

근데 아직 회전목마와의 이별할 때가 아니었나 보다. 두 걸음 뗀 희윤을 해승이 도로 붙들었다.

“저기 보세요.”

얼떨떨하게 해승의 손가락을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장식으로 감싼 거울이 보였다. 그 속에 멍하니 선 희윤과 해사하게 웃고 있는 해승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하나, 둘, 셋!”

숫자와 함께 다시금 찰칵. 사진이 찍혔다. 이제는 하도 많이 당해 봐서 그러려니 할 지경이었다. 해승은 액정으로 찍힌 사진을 확인하더니 웬일인지 희윤에게 불쑥 내밀었다.

“형, 봐요. 잘 나왔죠?”

“……응.”

제 표정이 좀 바보처럼 나오면 어떤가. 해승이 정말 즐거워 보이니 만족했다. 그 순간 희윤의 스마트폰에 알림이 울렸다.

뭔가 하고 꺼내 보았더니 해승이 보낸 메시지였다. 내용은 사진 한 장.

“이게 제일 마음에 드니까 프로필 사진으로 같이 써요.”

“프로필 사진?”

그런 걸 따로 설정해 본 적 없는 희윤이 어리둥절해하는 눈을 했다. 그 사이 메신저 앱을 실행해 대표 사진을 바꾼 해승이 희윤의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자요.”

빠르게 툭툭 손가락으로 액정을 터치한 해승이 도로 스마트폰을 희윤에게 내밀었다. 뭘 했나 했더니 메신저 창에 뜨는 사진이 바뀌어 있었다.

항상 이모티콘이 차지했던 자리에 희윤과 해승의 사진이 들어갔다.

‘이거 다른 사람들도 볼 텐데…….’

이제는 대부분 본부 사람들로 채워진 메신저. 안효정, 정소한만 아니라 조사팀이나 조 이사까지도 이 프로필을 볼 확률이 높았다.

에라, 모르겠다.

해승이 일부러 보라고 설정해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희윤은 그대로 액정을 꺼 버렸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제 사귀는 사이인데.

남들이 물어보면 당당하게 그렇다고 말할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희윤의 귀가 또 붉었다.

* *

해승은 보기보다 열정적이었다. 아니면 자유 이용권을 끊었으니 본전은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건지.

‘본전은 아니겠구나.’

대한민국도 아니고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어마어마한 대기업의 손자가 그런 걸 염두에 두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랬다면 감봉 6개월 소리에 이렇게 태연하지는 못했겠지.

“희윤 형?”

막 티켓을 직원에게 보여 주던 해승이 무슨 일인가 하고 희윤을 돌아보았다.

“아, 아냐. 그냥 좀 재미있는 생각이 잠깐 들어서.”

“뭔데요?”

티켓을 건네받은 해승이 희윤의 손을 마주 잡으며 물었다. 당연하다는 듯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처음에는 사람 많은 곳에서 이러는 게 부끄러워서 손을 슬그머니 뺐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해승이 손을 끈질기게 끌어가는 데다 ‘제가 부담스러워요?’, ‘싫으세요?’라며 공격하니 차마 떼어 낼 수 없었다.

이제는 손이 떨어지면 허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거든?’

불쑥 제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에 희윤이 기겁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전하다니. 그럴 리 없다.

절로 시선이 꽉 잡힌 두 손으로 향했다. 뭐가 됐든. 그다지 떼어 놓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게 중요했다.

신나게 놀이기구를 섭렵하느라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으니 저녁은 든든해야 한다며 해승이 희윤을 끌고 간 곳은 커다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해가 길어 7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아래 풍경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희윤은 해승이 썰어 준 스테이크를 먹었다.

“이거 먹고 호수에 보트 타러 가요.”

“보트?”

아직 일정이 끝난 게 아닌가. 놀이공원 입장 시간에 맞춰서 왔기에 거의 온종일 논 기분이 들었던 희윤이 물었다.

“네, 저거.”

해승이 손가락으로 창 아래를 가리켰다. 희윤도 눈길을 그리로 돌렸다. 마치 모형처럼 작달막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초승달 모양으로 된 배였다.

에스퍼인 희윤도 처음엔 저게 뭔지 한참을 바라봐야 했는데, 해승은 일반인과 비슷한 신체를 가졌음에도 저게 눈에 들어왔나 보다.

“그래.”

아니면 처음부터 저것까지 아예 일정에 넣고 왔거나. 뭐가 되었든 희윤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둘은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호숫가로 왔다. 의외로 대기 줄에는 가족이 많았다.

“엄마! 배! 배!”

서너 살 되었을 법한 사내아이가 엄마 손을 휙휙 흔들며 호수에 뜬 초승달 모양 배를 가리켰다.

“응, 탈 거야. 우리도 저거 타자.”

사내아이 옆에 선 여자아이의 옷매무새를 고쳐 주며 엄마가 건성으로 대답해 줬다.

“배! 배!”

사내아이는 배를 탄다는 거에 흥분했는지 손가락으로 계속 호수를 가리키며 소리치듯 말했다.

고작 서너 살 되어 보이는데 목청이 제법 컸다.

“위험해.”

급기야 보트가 세워진 길쭉한 덱으로 달려가려는 사내아이를 희윤이 얼른 붙잡았다. 뒤늦게 사태를 알아챈 엄마가 희윤에게 미안한 얼굴로 꾸벅 숙이며 사내아이를 데려갔다.

“우린 이거 탈 거야.”

“싫어! 저거! 배! 배!”

희윤은 저와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지붕이 막힌 UFO 모양 보트가 아닌 초승달 모양 배를 타겠다며 떼를 쓰는 사내아이를 보았다.

“희윤 형.”

어지간히 고집이 센지 엄마가 난감한 얼굴로 이리저리 달래도 소용없어 보였다.

“응.”

결국에 엄마 말을 이기지 못한 사내아이가 보트에 오르는 걸 보고서야 희윤도 해승과 함께 초승달 보트에 올라탔다.

해 질 녘 풍경을 보며 호숫가에서 보트를 타는 건 제법 괜찮았다.

“형.”

희윤은 조명이 들어와 반짝반짝 빛나는 놀이공원을 보다가 해승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찰칵. 또 현재 모습을 박제당했다.

“너 오늘 몇 장 찍었어?”

“음…… 300장?”

“헉! 정말이야?”

아니, 무슨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었어. 대체 언제. 희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해승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제야 희윤은 해승이 저를 놀리려고 일부러 한 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긴 농담이겠지. 아무렴 그렇게 사진 찍을 시간이 있었을 리가. 틈만 나면 손을 잡고, 이것저것 놀이기구 타기 바빴는데.

찰칵. 찰칵.

해승이 연신 사진 촬영하는 걸 보며 희윤은 미심쩍으나마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을 기울였다. 해승의 스마트폰에 200여 장이 넘는 제 모습이 담긴 걸 몰랐기 때문이었다.

“오늘 덕분에 즐거웠어.”

희윤이 찰랑거리는 물결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해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도요. 항상 이 시끄럽고 사람 많고, 정신없고 유치한 곳에 왜들 오나 했거든요?”

온종일 희윤보다 더 즐기면서 놀이동산을 휘젓고 다닌 해승이 신랄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근데 재미있네요.”

조소가 가득 담긴 말을 길게 뱉은 해승의 긍정적인 감상은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니 희윤이 할 말도 그다지 길지 않았다.

“다행이네.”

“정말요. 다 형 덕분이에요.”

“뭐가?”

“형이 같이 가 준다고 해서 왔잖아요. 아니었다면 놀이공원이 이렇게 즐거운 곳이라는 걸 몰랐겠죠.”

해승이 불쑥 손을 뻗어 왔다. 희윤은 움찔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금세 다가온 손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나도 고마워.”

제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희윤이 말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경험해 볼 일 없었을 거야.”

어렸을 적 부모님과도 한 번 오지 못한 놀이동산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일이 바빴고, 형편도 되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더더욱 올 일이 요원했다. 그런 곳에 오게 된 건 다름이 아니라 해승이 이곳에 데려와 주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희윤이 경험한 모든 건 다 이 앞에 앉은 해승 덕분이다. 희윤에게 해승은 특별한 존재였다.

“저도, 형도, 처음이네요. 여긴.”

해승이 머리칼에서 손을 떼며 생긋 웃었다. 눈동자가 호수처럼 찰랑찰랑 윤기 있게 빛났다. 어쩐지 이다음에 있을 일이 짐작이 갔다.

곧 해승이 서서히 희윤에게 가까워져 왔다. 희윤은 조용히 숨을 참았다. 그 상태를 알아챘는지 해승의 눈꼬리가 더욱 부드럽게 휘었다.

괜히 민망해진 희윤이 막 고개를 돌리는 찰나 입술이 닿았다. 그대로 해승이 각도를 달리해 더 깊이 파고들려던 순간.

풍덩.

무언가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

곧이어 비명이 귀를 파고들었다. 희윤의 시선이 절로 그리로 향했다. 아까 엄마를 보채던 사내아이가 호숫가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보였다.

희윤의 눈동자가 푸르게 반짝였다. 동시에 둥실 떠오른 물구름이 사내아이를 띄워 올렸다.

희윤의 관심이 제게서 떨어지자마자 해승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물구름에 주저앉아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한 사내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은 살얼음이 낀 호수처럼 차가웠다.

“하아…….”

마침내 사내아이가 본래 보트 속으로 들어가자 희윤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었다. 보트 안에서 엄마가 울며 사내아이를 껴안는 게 보였다.

“다행이다.”

희윤의 시선은 아직도 그곳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 물에 빠진 아이를 바로 구출해 낼 수 있었으니까.

“형은 진짜 대단하네요.”

불쑥 해승이 입을 열었다. 어느덧 눈빛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말투도 차분해졌다. 그러나 속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갈등하고 만다. 희윤이 부디 활약하지 않기를. 오로지 제 곁에만 있기를.

한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제 에스퍼라고, 제게 웃어 주고 저만 바라보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엔 망설이지 않고 움직이는 영웅이라고.

“각성했던 것도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였잖아요.”

눈을 감았다가 뜬 해승의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희윤은 해승의 속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랬지.”

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승이 말하고서야 자신이 각성했을 때와 비슷하다는 게 떠올랐다.

“누구나 하는 일이잖아, 위험에 빠진 사람을 보면.”

“하지만 정말로 그 순간에 뛰어드는 사람은 많지 않죠. 그러니까 대단한 거예요. 형이.”

분명 칭찬인데. 해승이 잘했다며 웃는데,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희윤이 해승의 손을 붙잡아 제게 끌어당겼다.

“근데 왜 화가 났어.”

“……알았어요?”

“응.”

희윤의 고개가 상하로 움직이자, 해승이 픽 웃었다.

“정의로운 형은 자랑스러워요. 이런 멋진 사람이 내 에스퍼라고 여기저기 광고하고 싶고요.”

해승이 희윤에게 잡힌 손의 방향을 바꿨다. 마주 잡은 모습을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죠. 한편으로는 형이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게 싫어요.”

해승의 시선은 겹친 손에서 떨어져 나와 호수 주변을 훑었다. 희윤도 그쪽을 봤다.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사내아이가 물에 빠지고 도로 보트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0초. 그 짧은 순간 사람들은 에스퍼가 능력을 구현하여 사람을 구해 내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놀라고, 환호하고, 주인공을 찾으려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보트까지 들려왔다.

“형은 내 건데.”

해승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퉁한 투였다. 희윤이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기에는 충분한 소리였다.

입술까지 비쭉거리는 걸 보니 자꾸 웃음이 새 나오려 해 꾹 힘을 주었다. 희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해승에게 고스란히 다 보였다.

해승이 희윤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팔을 뻗어 와 뒷머리를 붙들었다.

어쩐지 조금 전 상황이 다시 벌어질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읍.”

희윤이 숨을 참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포개졌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도, 그들이 이쪽을 보고 있으리라는 것도 아는데, 해승을 밀지 못했다.

보트 시간이 임박했다는 알림이 들려와 해승이 부지런히 운전하여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물에 빠졌던 사내아이의 가족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훌쩍훌쩍.

사내아이는 놀라기도 놀란 데다 엄마에게 제법 혼났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팔로 얼굴을 박박 문지르고 있었다.

어찌나 울었는지 눈시울도 코끝도 온통 빨갰다.

“아이는 괜찮나요?”

안쓰럽고 귀여운 마음에 작게 웃은 희윤이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 네. 괜찮아요.”

아이 엄마가 희윤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사내아이의 손을 꼭 잡은 게 어지간히 놀란 듯했다. 하긴 사고가 벌어진 직후이니 그럴 만하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네. 어느 에스퍼분이 구해 주셨는지,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은데 나타나질 않으시네요.”

아이 엄마가 선착장을 돌아보며 사내아이를 구해 준 은인을 찾았다. 정작 능력을 쓴 희윤은 모른 척 몸을 돌렸을 뿐이었다.

“누구야, 에스퍼가?”

“능력 쓰면 눈동자 색이 바뀐다며. 찾았어?”

“안 보이는데. 그냥 지나가다가 발견했나.”

선착장을 벗어나는 중에도 에스퍼를 찾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희윤은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바닥만 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또 손이 잡혀 깍지가 끼워졌다.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가요, 형.”

나직한 목소리가 귀가 고였다가 사라졌다. 희윤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 저를 잡아끄는 방향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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