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85)

당연하게도 호수에서의 일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워낙 짧은 시간에 벌어져서 사진이 없을 줄 알았는데 웬걸.

누군가의 스마트폰 동영상에 그 장면이 찍히는 바람에 크게 화제가 됐다. 밤인 데다 영상 화질이 좋지 않아 얼굴이 잘 안 보인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런데 안심하기도 전, 곧바로 익명 커뮤니티에 아이를 구한 에스퍼가 희윤일 거라는 주장이 올라왔다. 증거로 해승과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는 사진이 여러 장 첨부되었다.

그 때문에 본부 입구는 또 기자가 우글우글하고, 문의 전화가 폭발 중이라고. 희윤은 안효정을 통해 전해 들었다.

‘휴가라 다행이다.’

희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이 사진도 잘 나왔네요.”

옆에서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승이 싱글싱글 웃으며 액정을 보고 있었다. 희윤도 슬쩍 그쪽에 시선을 주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해승이 보여 준 것은 한 게시글이었다. 자신을 봤다는 내용과 함께 올라온 것은 하필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사진이었다. 희윤으로서는 잊고 싶은 장면이건만.

“저장해야겠어요.”

해승은 마음에 든다는 듯 콧노래까지 부르며 사진을 내려받았다.

“야. 저장은 무슨 저장이야. 이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왜 남의 사진을 이렇게 무단으로 올려.”

근데 더 가관은 이런 게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익명 커뮤니티에 주장 글이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본인들도 목격했다며 놀이동산 사진이 잔뜩 업로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악.”

심지어 손을 잡고 걷는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 희윤이 작게 비명을 흘리며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췄다.

역시 이마며 귀는 발긋해져 있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넌 괜찮냐. 물어보려고 얼굴을 든 희윤이 허탈한 숨을 흘렸다. 질문이 필요 없었다. 해승은 도리어 뿌듯한 표정이었으니까.

계속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보니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열심히 받는 중인 듯했다.

“다들 우리한테 관심이 많았나 봐요. 이렇게 많이 찍힐 줄 몰랐는데.”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손잡는 걸 계속 말렸을 텐데. 설마 누가 지켜보고, 사진까지 찍고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아니 찍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건 해승의 외모 때문인 줄 알았다.

이게 다 해승 탓인 것 같아서 희윤의 눈꼬리가 뾰족하게 변했다. 그에 못지않게 본인도 유명하다는 걸 정작 당사자는 몰랐다.

“본부는 어떻대요?”

“지난번이랑 비슷하대.”

“음……. 내일 출근할 땐 조심해야겠네요.”

“그러게.”

고작 이틀 쉬는 동안 뭐가 이렇게 사건·사고가 잦은지. 희윤은 또 폭 한숨을 쉬었다. 해승이 그 모습을 가만 보다가 희윤의 얼굴을 붙들었다.

“뭐…… 읍.”

뭐 하는 거냐는 질문은 다 나오지도 못하고 겹쳐진 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접촉은 짧지만 강렬했다.

“야, 너 진짜 아무 때나 그러지 마.”

희윤이 눈을 세모꼴을 한 채 해승을 노려보았다.

“뭐, 어때요. 볼 사람도 없는데.”

없긴. 희윤의 시선이 거실에 서서 이쪽을 외면하고 있는 비서에게 향했다. 어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해승이 부른 것이었다.

본부도 본부대로 움직이겠지만, 이번에는 해승도 연관되어 있다 보니 수호 그룹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본래 해승은 본부에서 촬영하는 공익 목적의 광고 외에는 하지 않는다는 걸, 희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 비서가 조금 전 집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해승이 직접 와서 말하라고 해서.

그렇게 사람을 불러 놓고 해승은 일 처리를 위한 논의는커녕 마치 먹이를 찾는 맹수처럼 인터넷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희윤이 나온 사진이나 수집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입을 맞추기까지.

“없긴. 저기 비서님 있으시잖아.”

비서님은 뭐야. 해승은 희윤의 우스운 호칭에 입꼬리만 움찔하고는 장승처럼 서 있는 비서에게 명령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게시글들 파악했어?”

“네, 말씀하시는 대로 전부 정리하려고 대기 중입니다.”

“흠……. 좋아, 그럼 지금 다 내리라고 해. 저장 다 했으니까.”

뭘 저장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비서는 해승의 옆에 앉은 희윤에게 잠깐 눈길을 주었다가 곧바로 뗐다.

에스퍼도 아닌데 감이 짐승보다 좋은 해승이 알아챌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본래도 희윤에 대한 해승의 흥미는 특이할 정도로 집요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건 관심을 넘어서 집착으로까지 발전했다. 희윤이 저를 속이고 해외 파견을 가 버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정부의 허가도 없이 페루로 날아가 버린 것만 보아도 그의 집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법했다.

그 때문에 비서는 요즘 표 회장과 해승의 부모에게 대체 그 에스퍼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있었다. 아마 조만간 그들이 희윤을 초대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해승 역시 눈치챘으리라 예상했다.

이틀 특별 휴가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희윤은 민망하게도 또 하계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휴가 잘 다녀와요, 연희윤 에스퍼.”

전 팀장이 옅게 웃으며 희윤을 배웅했다. 그 옆에서 김동민이 몸을 배배 꼬며 저도 가고 싶다는 티를 팍팍 냈다.

“부럽다. 나도 가고 싶다.”

김동민은 희윤이 페루에 있는 동안 다녀와 놓고도 부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잘 다녀오세요. 여긴 우리한테 맡겨 놔요.”

다른 팀원이 제 가슴을 탕탕 치면서 희윤을 안심시켰다.

“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자꾸 자리 비워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요즘 연희윤 에스퍼 덕분에 매일매일 즐거웠는데.”

김동민이 빙글빙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까지도 본부는 희윤이 놀이동산 호수에서 활약한 일로 시끌시끌했다.

그런 중에 긴 휴가를 가게 되었으니, 희윤에게는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부디 다시 복귀할 때는 조용해졌기를 바라며 희윤이 꾸벅 인사하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며 액정을 터치해 보니 해승에게서 차에서 기다리고 있단 메시지가 와 있었다.

“뭘 벌써 갔대.”

저도 57분부터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 나온 주제에 희윤이 핀잔을 흘렸다.

지이잉.

“그새를 못 참고 또.”

투덜거리면서도 냉큼 메신저를 열었다. 당연히 해승인 줄 알았는데, 연락해 온 것은 전혀 뜻밖의 사람이었다.

희윤은 액정에 뜬 이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저장하지 않았지만, 번호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사람.

“네, 아버지. 전화 받았습니다.”

느릿하게 통화 버튼을 누른 희윤이 덤덤하게 말했다.

- 희윤이냐.

“네.”

- 어, 그래. 아버지다.

희윤이 먼저 말했는데, 아버지는 굳이 본인이 누구인지 한 번 더 밝혔다.

“네, 건강히 잘 지내셨죠?”

- 잘이 다 뭐냐. 요즘 아주 골치 아프다.

아버지는 희윤이 예의상 묻는 안부에 긴 한숨과 넋두리를 돌려주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희윤은 걱정스럽게 생각하며 아버지의 뒷말을 기다렸다.

- 뭐, 그건 그거고. 너는 어떠냐. 얼마 전에 내가 집에 들렀는데 빈집 같더만. 요즘 거기서 안 사냐?

“아뇨, 살고 있죠.”

- 그래? 근데 왜 그렇게 휑해 보여. 관리 잘해 둬라. 그래야 제대로 값을 받지. 참 재개발 일은 어떻게 돼 가던? 보상은 언제쯤 나온다고 하더냐?

마치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람처럼, 아버지는 안부를 묻는 일 없이 할머니 집의 재개발 일에 관심을 보여 왔다.

애초 희윤에게 연락한 이유도 그것 때문인 듯했다. 그리 오랜 세월 전화도 문자도 없다가 불쑥 연락해서 묻는 게 고작 돈 얘기라니.

“저야 그쪽 일은 잘 몰라서요.”

희윤은 한숨을 속으로 꾹 내리누르며 차분히 대답했다. 그때 동의서를 해승에게 준 후 잘 처리되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

그 후에는 이런저런 일로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희윤이 잘 모르는 건 당연했다.

- 그래? 하긴 너야 일하느라 바쁘겠지. 그럼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말아라.

마치 희윤이 그 말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가 냉큼 대꾸했다.

- 내가 아는 사람이 그쪽으로 아주 빠삭한 전문가야. 보상도 다른 집보다 더 잘 받아 주겠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나한테 맡겨라. 돈 들어오면 적당하게 나눠서 줄 테니까.

희윤이 잠자코 있자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아버지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괜찮아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 괜찮긴. 이럴 땐 부모가 다 해 주길 기다리는 거야. 물정 모르는 너 같은 애들은 괜히 집만 뺏기고 제대로 보상도 못 받는다.

“아뇨, 그게 아니라 변호사에게 대리를 맡겼어요. 그러니 신경 안 쓰셔도…….”

- 뭐? 그런 일을 왜 네 멋대로 처리해?

희윤이 말을 다 맺기도 전, 스마트폰 너머에서 버럭 아버지의 고함이 들려왔다. 귀가 다 울릴 정도로 커다랬다.

“형.”

슬쩍 귀에서 스마트폰을 떼고 한숨을 쉬던 희윤은 익숙하게 들리는 음성에 눈을 들었다.

“어…….”

언제 도착한 걸까.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멈추어 서서는 문까지 활짝 열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 해승이 문을 붙잡은 채 희윤을 보고 있었다.

“이리 주세요.”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 해승이 희윤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희윤이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액정을 확인하는 해승의 눈빛은 서늘했다.

- 내가 연락하라고 한 지가 언제야. 너 왜 전화 안 했냐. 내가 집에다가 쪽지까지 써 뒀잖아. 너 나 모르게 집 팔아 버리려고 했지? 그게 네 집이냐? 내 어머니 집이지. 그걸 홀랑 혼자 먹어 치우려고 해?

스마트폰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엘리베이터가 쩌렁쩌렁 울렸다.

저 험악한 소리를 해승이 듣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리 줘.”

엉겁결에 해승에게 스마트폰을 줬던 희윤이 이를 돌려받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해승은 스마트폰 대신 제의 손만 가벼이 올렸다.

‘해승아!’

희윤은 혹시나 저 너머에서 아버지가 해승의 이름을 알아들을까 속삭이듯 그를 불렀다. 돌아온 건 사이사이에 꼭 맞게 얽히는 손가락이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해승이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희윤을 제 가까이로 당겼다.

- ……누구야?

엉겁결에 끌려간 희윤이 당황해 눈을 깜빡이는데, 스마트폰 너머에서도 당혹감에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희윤 형 아는 동생인 표해승이라고 합니다.”

- 뭐? 그런데? 그쪽이 왜…….

“말씀하신 일은 제가 변호사를 통해서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아버님 핸드폰으로 변호사 연락처를 알려 드릴 테니 자세한 건 그쪽과 상의해 보세요.”

해승이 아버지가 더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본인의 용건만 꺼냈다.

“아버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런 일은 전문가를 통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일을 처리하는 분은 박영권 변호사로 아버님께서도 잘 아는 법무법인 BK 소속입니다.”

잘 모르더라도 인터넷을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곳이다. 해승이 말한 법무법인은 유명 로펌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정·재계 거물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으로.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이만 끊습니다.”

해승은 아버지가 대꾸하는 말도 듣지 않고 그대로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요, 형. 받으세요.”

희윤은 얼떨떨하게 제 스마트폰을 건네받으며 해승을 봤다.

“뭘 계속 듣고 있어요. 변호사 연락처만 주면 되지.”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기 전에 해승이 끼어들었을 뿐.

“그러게. 고맙다.”

희윤은 저도 그럴 예정이었다는 말 대신 시원하게 쏘아붙여 준 해승을 향해 웃어 보였다. 해승도 미소를 띤 채 얼굴을 붙여 왔다.

이제는 이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희윤은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입술이 가볍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정말이지, 이제는 입맞춤이 습관이 되어 버린 듯했다.

나쁘진 않았다.

* *

그 길로 둘을 태운 차가 공항으로 향했다. 퇴근 후에 곧바로 떠나자고 얘기가 된 상태라 캐리어도 뒤에 실려 있었다.

“날씨 맑았으면 좋겠다.”

희윤이 창밖의 푸른 하늘을 보며 말했다. 해승과의 첫 휴가니만큼 내내 쾌청하기를 바랐다. 두 사람이 가는 곳은 처음 계획했던 제주가 아닌 남국의 섬이었다.

해승이 호수에서의 활약으로 제주에서는 편히 쉴 수 없을 거라며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진 한 장을 보여 주는데 그림 같은 풍경에 희윤은 홀랑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좋을 거예요.”

해승이 당연한 사실을 전하듯 말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희윤은 두근두근한 심장에 손을 올리고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구경했다.

공항에 도착한 희윤은 조금 긴장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벌써 두 번째 방문인데도 공항 내부는 아직 낯설었다.

“오셨습니까.”

승무원 복장을 한 남성이 나란히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누구인가 하고 희윤이 의아해하자 해승이 설명했다.

“오늘은 전용기 타고 갈 게 아니라서요. 이쪽에서 안내해 줄 거예요.”

“아, 응.”

전용기를 타지 않는다는 건 이미 해승에게 들었다. 페루에 다녀온 후 해승의 전용기가 점검에 들어가서 당장 이용할 수 없어 다른 비행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승무원이 해승과 희윤을 안내했다. 페루에 갈 때는 기나긴 줄에 서서 보안 검색과 출국 심사를 했는데, 오늘 승무원과 함께 가는 방향에는 대기도 없었다.

가볍게 심사를 끝낸 후 오고 가는 항공기가 내려다보이는 라운지에서 대기하던 두 사람은 안내 방송이 나온 후 다시 이동했다.

“불편해요?”

“아니, 전혀.”

물론 해승의 전용기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두 다리를 편히 뻗고, 이리저리 움직여도 걸릴 게 없는 널찍한 일등석은 비즈니스석보다도 훨씬 편했다.

무엇보다 승객이 별로 없어 해승과 바짝 붙어 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6시간 후, 희윤은 해승이 사진으로 보여 주었던 아름다운 섬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작은 헬리콥터로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올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아름답다.”

에메랄드빛으로 찰랑거리는 바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모래밭. 진녹색 널찍한 잎을 하늘하늘 뽐내는 야자수.

그야말로 그림에서나 보았던 풍경이었다. 희윤이 고개를 돌렸다. 옆에는 이렇게 멋진 곳으로 기꺼이 저를 초대해 준 사람이 있었다.

“갈까요?”

해승이 희윤의 손을 마주 잡고 환히 웃었다. 희윤의 입가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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