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쏟아져 들어올 것 같아.”
희윤이 홀린 듯 말했다. 선베드에 누워 올려다본 밤하늘엔 별이 빼곡했다.
“그러게요. 반짝반짝 예뻐요.”
대답하며 해승이 고개를 돌렸다. 정작 그에게 감흥을 준 건 밤하늘이 아닌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즐거워하는 희윤이었다.
해승이 상체를 비틀어 희윤에게 다가갔다. 볼을 감싸는 커다란 손에 곧 벌어질 일을 예감한 희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키스해도 되죠?”
고개를 끄덕였던가. 모르겠다. 그 전에 말랑한 입술이 꾹 눌려 왔으니까. 희윤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해승이 입술을 느릿하게 빨았다.
선베드에 어색하게 놓인 희윤의 손끝이 옴질옴질했다. 그때, 해승의 긴 팔이 등 밑으로 불쑥 들어왔다.
희윤은 놀라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해승의 목뒤에 둘렀다. 자연히 두 몸이 바짝 밀착됐고, 서로의 콧대가 부딪혔다.
당황한 희윤이 얼른 얼굴을 뒤로 물렸다. 맞닿았던 입술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해승의 날렵하게 뻗은 눈썹이 꿈틀했다.
“괜, 괜찮아?”
희윤이 해승의 콧날을 살피며 물었다.
“형. 혀 내밀어 볼래요?”
걱정은 엉뚱한 소리로 돌아왔다. 희윤이 멍하니 바라보자 해승은 입꼬리를 쓱 올리며 다시 말했다.
“혀 내밀어 보세요.”
엉겁결에 희윤은 혀를 꺼냈다. 해승이 잘했다는 듯 생긋 웃더니 비죽 튀어나온 귀여운 살덩이에 제 혀를 비볐다.
말랑하고 촉촉하게 달아오른 감촉에 움찔 놀란 희윤이 저도 모르게 혀를 입 안으로 물렸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해승이 따라 들어왔다.
혀가 혀끼리 얽히고, 숨결과 숨결이 뒤섞이며 질척하고 야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승이 희윤을 더 바짝 끌어안았다.
등을 감싸지 않은 다른 손으로는 희윤의 목덜미, 어깨, 팔, 옆구리, 아랫배를 쓸고 어루만졌다. 해승의 손길이 지나간 곳곳에 열꽃이 피어났다.
혀가 아리도록 빨리다가 입천장을 긁힐 땐 전기 자극이라도 받은 듯 짜릿짜릿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늘의 별 따위는 저 멀리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여름 볕 같은 열감은 몇 번이고 희윤에게 닿았다가 떨어졌고, 그때마다 깊이를 더해 갔다.
속수무책으로 강렬한 감각에 젖어 든 희윤은 숨조차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잊어버렸다. 이대로는 거친 풍랑에 떠밀리는 것처럼 의식마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하아, 하아, 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절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희윤은 푹 젖은 입가를 훔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형, 힘들어요?”
물어보는 음성이 어쩐지 평소보다 더 꿀처럼 끈적끈적하고 달게 느껴졌다. 희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해승이 눈꼬리를 해사하게 접으며 다시금 다가왔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자잘한 솜털이 다 일어날 것만 같아 희윤은 목을 바짝 움츠렸다. 해승이 희윤의 팔을 붙들어 당겨 일으켰다.
희윤은 비틀비틀 해승을 따라 걸었다. 망설이지 말라는 듯 바람이 뒤에서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별장은 어두운 조명 몇 개만이 빛을 내고 있어 그윽한 분위기를 풍겼다. 해승에게 잡힌 채 끌려간 곳은 커다란 침대가 놓인 침실이었다.
풀썩.
해승이 희윤을 그대로 침대에 밀어 눕혔다. 희윤은 등에 닿는 푹신한 느낌에 그제야 제가 어디에 왔는지 깨달았다.
쏴아아. 쏴. 쏴아.
바닷가가 훤히 보이는 침실은 폴딩 도어마저 활짝 열린 채라 바람과 파도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희윤 형.”
그러나 곧 희윤의 의식은 침실로 돌아왔다. 제 뺨에 닿는 온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을 굴려 위를 보았다.
은은하게 흐르는 상앗빛 조명 덕분에 해승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본래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따라 더 매혹적으로 보였다.
“키스할게요?”
뺨에 올려진 손이 서서히 움직였다. 살짝 튀어나온 광대를 지나, 날렵하게 선 콧날과 매끈한 미간을 스친 손은 반듯한 이마까지 올라갔다.
온 신경이 제 얼굴을 훑는 손길에 집중되고 만다.
“응.”
입이 마르는 것 같다. 꿀꺽 침을 삼키는데 이마를 매만지던 손이 목울대에 닿았다. 희윤은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
마치 그게 신호였다는 듯 해승이 다가왔다.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닿았다. 아까와 달리 키스는 짧았다. 대신 해승은 도장을 찍듯 희윤의 얼굴 곳곳에 촉, 촉 짧게 입술을 내렸다.
해승에게 닿은 부분이 간질간질했다. 희윤은 코를 찡긋거리고 입술을 옴질거리다가 슬며시 닫았던 눈꺼풀을 열었다.
“형.”
얼굴에 도장을 찍던 입술이 턱을 지나 목에 닿았다. 해승의 숨결 때문에 오소소 솜털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괜찮죠?”
뭐가 괜찮으냐는 의문은 올라오지 못했다. 희윤은 그저 열 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해승의 입술에 또 꽃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좋아요. 대신 형은 오늘 처음이니까 천천히 할게요.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끝까지는 안 할 테니까.”
끝까지라니? 무슨 소리야?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희윤의 머릿속을 채웠으나 이는 흐르는 물처럼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 그보다는 제 셔츠를 올리는 손길에 의혹이 뚝 끊겨 버린 것이었다.
“뭐 해?”
“안 돼요?”
해승이 매끈한 피부 위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물어 왔다. 아직도 희윤은 해승이 말한 끝까지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저를 내려다보는 해승의 눈빛을 보니 어떤 깨달음이 왔다. 곧 키스보다 더 농밀하고 뜨거운 행위로 이어지게 되리라는 걸. 순간 희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마치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진 희윤의 얼굴을 가만 보던 해승이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형.”
희윤에게 대답이 나온 것도 아닌데, 해승은 용케 그가 허락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옷자락을 쥐던 손이 위로 올라갔다.
상반신에 닿아 오는 손길에 희윤의 몸이 또 바르르 떨렸다. 긴장감과 흥분이 동시에 몰려왔다.
해승은 본인이 말한 대로 아주 천천히 행동했다.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희윤의 정신을 홀려 놓고 그의 몸 곳곳을 탐했다.
희윤은 제게 있는 줄도 몰랐던 감각을 자각했고, 몇 번이나 해승에게 잡힌 채 절정에 올랐다.
나중에는 침대를 적신 게 자신의 땀인지 눈물인지 타액인지 그도 아니면 쾌감의 잔재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형, 힘들어요?”
입 안이 말라 침을 삼키던 희윤이 움찔하고 눈을 돌렸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온 힘을 다 쥐어짠 듯 탈력감이 대단해서 손가락 하나 꿈틀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저와 달리 해승은 아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는 듯 보였다. 얼굴은 평소보다도 더 해사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내 기운이 다 쟤한테 갔나 봐.’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희윤 형?”
해승이 다시 부르는 소리에 희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서둘러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힘들다는 뜻을 격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해승의 입술에서 픽 실소가 새어 나왔다. 어지간해서는 내색하지 않는 희윤이 저러는 걸 보니 적당히 물러설 때긴 한 듯했다.
그래야 다음에 또 하자고 할 때 겁먹지 않겠지.
해승의 시선이 희윤의 몸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의 입술과 손이 닿았던 곳곳에 붉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특히 턱 바로 아래는 깃 있는 셔츠를 입어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선명하게 자국이 남았다. 그걸 보니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식욕을 닮은 적나라한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해승은 꾹 눌러 참았다.
“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쉬어요.”
해승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희윤의 볼을 쓰다듬고 몸을 돌렸다. 침대 옆 선반에 물이 가득 담긴 유리병과 물컵이 놓여 있었다.
“아, 고마워.”
희윤이 해승의 손에 들린 물컵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해승은 건네주는 대신 입가에 물컵을 가져다 댔다.
“…….”
그도 모자라 목뒤에 받쳐진 해승의 손바닥에 희윤은 그가 원하는 게 무언지 단숨에 이해했다.
“알아서 마실…….”
알아서 마시겠다는 말은 다 나오지도 못했다. 해승이 이미 컵을 기울인 탓에 물이 입술을 타고 안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윤의 목울대가 바삐 움직였다. 꼴깍. 꼴깍. 물이 넘어갈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한동안 입 안을 적시던 물은 컵이 물러서고 나서야 끝났다.
해승이 엄지로 젖은 입술을 쓱 문질러 주었다. 그러더니 당연하다는 듯 제 입술을 꾹 가져다 붙였다.
희윤은 저도 모르게 숨을 “흡.” 하고 참았다. 윗입술이 눌리고, 아랫입술이 뜨끈한 살덩이에 눌려 밀리는 느낌이 났다.
벌어진 틈 사이로 해승의 호흡과 향기가 고스란히 넘어왔다. 어쩐지 다시금 불이 지펴지듯 흥분감이 올라오는 듯했다.
질척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 때마다 희윤의 볼이며 귀가 조금씩 달아올랐다. 이미 정신은 몽롱하게 변한 지 오래였다.
두 뺨이 커다란 손에 붙들렸다. 한창 희윤의 입술만 맛보던 해승이 좀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희윤의 상체가 조금씩 뒤로 밀려가다가 기어이 침대에 등이 닿았다.
“이제 괜찮죠?”
입가가 온통 물기로 반들거릴 정도로 욕심껏 맛보던 해승이 자잘한 키스를 남기며 물었다. 희윤은 멍한 눈을 깜빡였다.
“희윤 형.”
어찌나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달콤한지 귀가 녹아내릴 듯했다.
“으응.”
그랬기에 희윤은 제가 무얼 허락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해승이 기쁜 듯 웃으며 제 가슴에 입술을 붙이고, 아래쪽에 손을 댔을 때야 해승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일이었다. 조금 전보다 더 타오를 듯한 격렬한 열감이 희윤을 휘감았다.
희윤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흰 천장을 바라보았다. 분명 잠에서 깨어났는데 의식이 또렷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다 늦은 밤까지 해승이 놓아주지 않아서였다.
‘악!’
간밤의 일을 떠올린 희윤의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해승은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걸까. 저보다 무려 4살이나 어린 연하에게 희윤은 휘둘리기만 했다.
‘키스 잘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그게 문제는 아니겠지만, 반쯤은 혼이 나간 희윤은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는 휙, 옆을 돌아봤다.
저를 고뇌에 빠뜨린 원흉은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희윤은 해승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하필이면 밤새워 저를 괴롭히던 입술에 눈이 딱 멎었다.
“키스할래요?”
“헉!”
대체 언제 깨어난 거야. 희윤은 태연하게 제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해승에게 헛숨만 들려주고 후다닥 일어났다.
그야말로 맹수에게서 줄행랑치는 작은 동물처럼 쌩하니 사라지는 희윤의 등엔 간밤에 해승이 남긴 붉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 *
느지막이 일어난 둘은 해변이 보이는 테라스에서 식사하고, 해변 산책로를 걸었다. 그리고 정오를 지나 가볍게 샌드위치로 허기를 해결하고 스노클링을 했다.
처음 바다에 들어온 희윤은 초반엔 어색해서 해승의 손을 잡고 있더니 어느 순간엔 혼자 찰박거리며 파도를 신나게 밟았다.
그 모습이 천진하고 밝아 보여서 해승의 입가에도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두 사람은 등이 뜨거워질 정도로 해변에서 놀다가 선베드에 나란히 누워 시원한 음료수를 마셨다.
“저 잠깐만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해승이 스마트폰이 진동하는 걸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다녀와.”
희윤이 선글라스를 슬쩍 위로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쪽.
이젠 아주 습관적이다. 희윤은 자연스럽게 제 입술에 도장을 찍고 가는 해승을 흘겨보다가 슬쩍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그때, 마치 해승이 자리를 비우길 기다렸다는 듯 희윤에게도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나다. 너 에스퍼가 됐다면서? 그런 일이 있으면 아비에게 먼저 알려 줬어야지. 얼굴 좀 보자. 오후 2:17]
여전히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보낸 사람은 아버지였다. 희윤이 에스퍼가 된 걸 이제야 안 듯했다.
그만큼 그간 제 아들에게 관심도 없었다는 소리인데.
‘만나자고?’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희윤은 답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꺼 버렸다. 때마침 업무 전화를 받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해승도 돌아왔다.
“형. 저녁 준비가 다 됐다는데, 갈까요?”
“응.”
희윤은 찜찜한 기분을 애써 누르고 해승을 따라갔다. 이 좋은 곳까지 와서 제게 무언가를 바라기만 하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
꿀 같은 휴가를 끝내고 본부로 복귀하는 날. 희윤을 태우고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던 해승의 눈에 후줄근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보였다.
“형, 먼저 올라가세요.”
“음?”
“잠깐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알았어. 이따 봐.”
“네, 점심 때 봐요.”
해승은 생글생글 웃으며 희윤을 먼저 올려 보내고 비상계단을 이용해 1층으로 올라왔다. 그는 출근 중이던 사람들이 곁눈질하는 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입구로 갔다.
해승의 시야에 누군가를 찾는지 바쁘게 시선을 옮기는 남자가 들어왔다. 구겨진 셔츠에 헐렁한 바지,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은 50대 중년.
“연동수 씨 되시죠.”
대뜸 불린 제 이름에 남자가 휙 몸을 돌렸다. 해승을 살피는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하긴 희윤과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비서를 통해 전달받은 자료에는 희윤의 아버지 연동수의 사정이 썩 좋지 않다고 되어 있었다.
“누구요?”
연동수는 저보다 한참 어린 청년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제게 알은척할 만큼 안면이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희윤 형 찾으러 오신 거죠? 저 따라오세요.”
희윤을 아는 듯한 투에 연동수는 움찔했다. 해승이 바로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가는 거요?”
그런데 하필 방향이 본부가 아니라 반대쪽이라 연동수의 의심이 도로 비쭉 올라왔다.
“따라오세요.”
해승이 돌아보지도 않고 걸음을 옮기자 연동수는 결국 뒤를 따랐다. 둘이 도착한 곳은 본부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골목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댁은 누구요?”
2층 창가 자리에 따라 앉은 연동수가 그때까지 꾹꾹 눌러 왔던 질문을 다시 한번 꺼냈다.
“뭐 드시겠어요?”
돌아온 건 전혀 다른 소리였다. 연동수의 볼이 불쾌감에 꿈틀거리는 모습을 해승은 빤히 쳐다보았다.
사진에서 볼 때도 느꼈지만, 희윤은 아무래도 어머니 쪽 피를 좀 더 진하게 타고난 듯했다. 둥그런 눈매를 빼놓고는 아버지를 닮은 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드실 만한 것으로 가져오라고 하죠.”
연동수의 얼굴 감상을 끝낸 해승이 태연하게 전화를 걸어 비서에게 커피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때까지 연동수는 앞에 앉은 어린 청년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살폈다.
“너 아까 희윤이 보고 형이라고 했지. 둘이 친한 사이야?”
연동수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말은 어느새 반 토막 난 상태였다. 해승은 불쾌한 빛 하나 보이지 않으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재개발 관련해서는 변호사와 상의하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도리어 그 말을 들은 연동수의 눈동자만 번뜩 빛났다.
“변호사를 만났다고 하던데, 여긴 왜 찾아오셨습니까?”
그 질문에 연동수가 재깍 대꾸했다.
“아, 그래. 당신이 그 수호 그룹 자제분이시구먼. 맞아, 변호사와는 잘 만났지. 보상 문제도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하더이다.”
해승을 이리저리 살피는 게 신기한 마음 반, 제가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속셈 반이었다.
변호사는 일을 의뢰한 사람이 표해승이며, 그가 거대 군수 회사인 수호 그룹 회장의 손주라는 정보를 연동수에게 서슴없이 밝혔다.
물론 해승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더는 희윤 형을 찾을 일이 없으실 텐데요.”
“아비가 자식을 찾는 데 뭐 꼭 그런 문제만 있는 건 아니지.”
어느새 연동수는 비굴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내 아들이 그 대단한 에스퍼가 되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만나려고 한 거요.”
“희윤 형이 본부에서도 주목받는 에스퍼긴 하죠. 각성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활약이 대단했거든요.”
해승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만들면서 대꾸했다.
“그렇구먼. 그럼 연봉도 꽤 받나?”
연동수가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그렇죠. 희윤 형의 가치를 생각했을 때 앞으로도 더 오를 거고요.”
“오호라…….”
연동수의 입술이 비쭉 올라갔다. 웃음을 감추려 일부러 턱을 만지는 척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입가가 자꾸만 씰룩거렸다.
평생 신경도 쓰지 않고 남처럼 지내 온 자식이었다. 만약 연동수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어머니가 살던 동네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면 계속 그랬을 거다.
‘내가 제대로 연락했구나!’
그러다가 변호사를 만난 날 노인네 집을 찾아갔을 때 우연히 만난 슈퍼 여자한테 희윤이 에스퍼가 되었다는 얘길 들은 것이었다.
그때 번뜩 연동수의 머릿속을 스친 건 억대를 훌쩍 넘긴다는 에스퍼의 연봉이었다. 그만하면 자식이 제 부모를 도와주고도 남을 만한 금액이 아니던가.
“그런데 형과는 오래 연락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는 게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그래서 이제라도 좀 잘 지내보려고 하고 있지.”
“그러십니까.”
“그럼.”
“재혼하고 슬하에 자녀도 있다고 하던데, 희윤 형을 그 집에서 반기겠습니까.”
“어, 그걸 어떻게. 커흠흠.”
제 정보를 해승이 알고 있는 것에 놀라 저도 모르게 대답하던 연동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는 슬쩍 해승의 눈치를 봤다. 무심한 표정을 보니 별로 제 말에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안심한 연동수가 재빠르게 입을 나불거렸다.
“뭐 그거야 성인 된 자식과 꼭 같이 살 필요 있나. 그냥 서로서로 연락이나 자주 하고, 오고 가면서 챙기면 되지.”
“그래요? 하긴 형도 그 집이 재개발되면 갈 데가 마땅치 않아지니 아버님께서 새로 옮길 곳을 알아봐 주면 좋겠군요. 이왕이면 사시는 데 근처로.”
그 말에 연동수가 펄쩍 뛰었다. 희윤의 돈에 관심은 있어도 그를 지금의 가족에게 보일 생각이 없으니 당연했다.
“그건 아니지! 아니,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 녀석이야 이 근처에서 지내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거네. 보아하니 내 처지를 잘 아는 것 같은데, 그럼 알 거 아니오.”
연동수는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제 어려운 사정을 해승에게 떠벌렸다.
“내가 기막힌 사업 아이템이 있어서 진행하다가 최근에 좀 어려워졌어. 험험, 그래서 솔직히 가까이 사는 건 좀…….”
30년이 훌쩍 넘은 다세대 주택에 세 들어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걸까. 그도 아니면 제가 오래전에 버리고 외면한 전처 자식과 지금의 자식들을 만나게 할 생각이 없는 걸까.
해승은 뭐가 됐든 그쪽엔 관심이 없었다.
“그러면 희윤 형에게 도움을 받고 싶으시겠네요.”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험…… 그 녀석이 여유가 된다면 그래 주면 고맙다는 거지.”
연동수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