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85)

바람을 피우고 새살림을 차리다 이혼한 후, 치매기가 있는 제 어머니에게 아들을 버리듯 떠맡기고 연락 한 번 하지 않더니 지금 와서.

해승은 돈 때문에 연락한 뻔뻔한 작자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표정을 바꿨다.

“말씀하신 대로 희윤 형이 도와드릴 여유는 아마 없을 겁니다.”

“에스퍼 초봉이 4천이라고 하던데? 출동 후 상여금도 넉넉하게 나오고. 그 녀석이야 돈 쓸 데도 없을 텐데…….”

“대신 제가 도움을 좀 드리죠.”

연동수가 입을 딱 다물었다. 어린놈이 멋대로 제 말을 잘라먹은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쪽…… 아니, 댁이 말이오?”

연동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지난번 만난 변호사를 통해, 제가 통화한 상대가 수호 그룹 회장의 손자라는 걸 알았다.

그런 재벌 아들이 도움을 준다니. 그럼 그간 얼굴도 안 보고 살던 희윤에게 돈을 받는 거랑은 차원이 다를 거라는 계산이 섰다.

해승이 욕심으로 번들거리는 연동수의 눈을 무심히 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오늘 저와 만난 일은 희윤 형이 모르게 하는 겁니다. 제가 돕기로 했다는 것도.”

연동수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더불어 앞으로도 희윤 형에게는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황금알은 낳는 거위까지는 아니어도 미래가 보장된 에스퍼다. 종종 써먹을 수 있는데도 만나지 말라는 소리에 연동수가 입맛을 쩝 다셨다.

“제가 원하시는 대로 지원할 텐데, 그거로는 부족합니까?”

“험…….”

연동수가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너무 파격적으로 나오니 도리어 고민이 됐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이유나 좀 들어 봅시다.”

아무리 돈이 급하다고 해도 까닭 모를 호의를 냉큼 챙길 만큼 연동수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비록 사업에 몇 번 실패하고 사기도 당해 봤지만, 본인은 스스로가 신중한 성격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형은 제 유일한 에스퍼입니다. 앞으로는 전담을 맺을 예정이고요.”

“오…….”

연동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감탄을 흘렸다. 담당이니 전담이니 하는 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유일하다는 게 어떤 뜻인지는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형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제가 책임집니다.”

“그 녀석을 그쪽이 책임지겠다?”

“그럼요. 제 에스퍼니까요.”

해승이 미소를 피워 올렸다. 상대가 누구든 홀릴 만큼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연동수 역시 조금 넋을 뺐다.

“아버님도 아시겠지만, 형이 이런 걸 달가워할 성격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 입 싹 다물고 있지.”

연동수가 호언장담했다. 해승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차피 이 남자가 희윤과 연락할 일은 앞으로 없을 거다.

해승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제 비서랑 진행하도록 하세요.”

그 말에 연동수는 뒤늦게 다른 사람이 테이블 근처에 와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흠칫 놀라 그쪽을 보니 깐깐한 인상을 한 비서가 눈인사를 건네 왔다.

“전 이만 본부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

해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동수가 서둘러 그 뒤에서 고맙다며 인사했다. 해승은 끝까지 무표정을 유지하며 밖으로 나왔다.

희윤에게 점심을 같이하자고 말할 겸 스마트폰을 터치하는데 불청객이 먼저 끼어들었다. 지부장의 연락이었다.

“네.”

해승이 짤막하게 전화를 받자 스마트폰 너머에서 지부장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 내가 다른 건 안 바란다. 받는 말이라도 좀 성의 있게 해 주면 안 되겠어?

“예의 있는 인사 받으면 뭐가 달라집니까?”

해승의 까칠한 대꾸에 지부장이 또 쯧쯧쯧 소리를 냈다.

“어떻게 됐어요?”

해승은 일절 그쪽엔 신경도 쓰지 않고 제 용건만 꺼냈다. 먼저 전화를 건 지부장이었는데, 그쪽이 왜 연락했는지는 궁금해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 네 말대로 하기로 했어. 사실 우리야 두 팔 벌려 환영이지. 근데 웬일이냐? 네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하고.

해승의 시선이 잠시 카페로 향했다. 2층에 있는 연동수는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우리 형이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 뭐?

“형한테 필요 없는 사람들만 어찌나 우글우글 꼬이는지. 이러니 내 거라는 못을 확실히 박아야죠.”

- 어. 그래.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결정해 줬다니 고맙다.

지부장은 해승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뭐가 되었든, 서로에게 좋은 방향으로 결정되었다니 그거면 된 게 아닌가.

- 근데 연희윤 에스퍼랑은 상의한 거지?

대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이미 간부들과도 얘기를 다 한 상태라 인제 와서 안 된다고 무르지는 못했다.

“아뇨. 아직요.”

- 야!

지부장이 바락 소리쳤다.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귀가 다 따가울 지경이었다. 해승은 눈살을 찌푸리며 스마트폰을 멀찍이 떼 놨다.

- 너 얼른 말해.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번 일은 억지로 진행 못 하니까. 알겠어?

“걱정 말아요.”

해승은 지부장이 무어라 더 하는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 *

[형, 오늘은 근사한 곳에서 점심 먹어요. 오전 11:48]

희윤은 해승이 보내온 메시지를 보고 픽 웃었다. 또 뭘 사 주려고 이런 소리를 하나 싶었다.

“희윤 씨는 오늘도 표해승 가이드랑 먹는구나? 오…… 뭐야, 근사한 곳이라니. 어디서 먹는 거야?”

옆에서 희윤의 모니터를 힐끔 곁눈질한 김동수가 짓궂게 물었다.

“글쎄요?”

“부럽다. 나도 점심에 스테이크 썰고 싶어.”

희윤은 그 농담에 엷게 웃기만 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나니 어느덧 정오에 가까워졌다. 먼저 가 보겠다고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해승의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서님?”

희윤이 왜 여기에 계시냐는 눈으로 알은체했지만, 비서는 눈인사만 하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안에는 이미 해승이 타 있었다.

“희윤 형.”

얼른 타라는 재촉 대신 이름이 불렸다. 희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얌전히 차에 올랐다. 본부를 빠져나간 차가 도착한 곳은 특급 호텔 앞이었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 최종 목적지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점심 먹으러 오는 것치고는 거창한데?”

직원의 안내를 받아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은 희윤이 어이없다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해승을 바라봤다.

“오늘 중요한 날이라서 왔어요.”

해승이 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중요한 날?”

희윤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해 봤다. 해승의 생일인가. 아니다. 해승은 11월생이라 아직 3개월이나 남았다. 그렇다고 희윤의 생일도 아니었다. 희윤은 3월생이었으니까.

“네. 일단 식사부터 하고요.”

해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직원이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따로 주문하지 않았는데 가지고 온 걸 보니, 해승이 미리 요청해 두었던 듯했다.

희윤이 최근 즐겨 먹는 채끝살 스테이크부터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버무린 샐러드, 고소한 크림 스파게티와 담백한 빵.

거기에 함께 놓인 길쭉하고 매끄러운 와인병을 발견한 희윤의 눈이 커졌다.

“술?”

어쩐지 평소와 달리 기사를 호출해 차를 타고 왔더라니. 이것도 다 계산에 있던 행동이었나 보다.

이쯤 되니 슬슬 대체 해승이 말하는 중요한 날이 뭔가 궁금증이 커졌다. 혼란스러워하는 희윤과 달리 해승은 태연했다.

“가 보세요. 제가 할 테니.”

직원이 코르크를 빼 주려 하자 해승이 저지했다. 그러더니 직접 오프너를 쥐고 능숙하게 와인병을 열었다. 희윤의 잔을 채워 주는 모습도 그림처럼 유려했다.

“자, 건배.”

본인 잔을 채우고 자리에 앉은 해승이 희윤의 앞에 와인 잔을 가져갔다. 희윤은 이게 뭐 하는 건가 의구심이 들었지만, 얌전히 해승과 건배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뭐야.”

희윤이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 성급한 질문에 해승이 빙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 우리 사귀는 사이죠?”

그게 특별한 일이랑 관련 있는 건가. 생각하면서도 희윤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짧은 대답에도 해승의 미소가 더 해사하게 변했다.

“전 그래서 앞으로 형 외에 아무도 가이딩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 말에 희윤의 심장은 속절없이 술렁거렸다. 희윤은 제 동요를 감추려 와인으로 입술을 적셨다.

“아무도?”

“네.”

“음……. 본부에서는 원치 않을 텐데.”

“형은 제게 다른 에스퍼가 담당으로 배정돼도 괜찮아요?”

“……아니.”

괜찮을 리 없다. 해승이 최관우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도 가슴이 철렁했는데.

“전 형이 페루에 저 말고 정소한을 데려간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기분이 나빠요.”

나도 그래.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당장 쫓아갈지 몰라.

희윤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제 속에 이런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항상 스스로가 무심하고 무언가에 크게 애정을 바라지 않는 성격이라고 여겨 왔는데.

“그래서 고민해 봤어요.”

“뭘?”

해승이 조금 긴장한 듯한 희윤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대뜸 팔을 뻗어 와 어설프게 와인 잔을 쥐고 있는 희윤의 손을 끌어갔다.

“형, 저랑 각인해요.”

잠깐 잡힌 손으로 시선을 내렸던 희윤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각인?”

좀처럼 지금 들은 말이 와닿지 않았다.

“네. 형이랑 저랑, 서로에게 유일할 수 있도록.”

해승이 그런 희윤에게 확신을 주듯 손을 꽉 붙들었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보는 희윤의 눈빛이 몽롱했다.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만 생각의 방향이 해승과의 대화로 흘러갔다.

서로에게 유일할 수 있도록 각인하자고.

그 말을 떠올리자마자 얼굴에 훅 열기가 올랐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 할 듯했다. 마른세수한 희윤은 곧장 사무실을 벗어났다.

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별생각 없이 안으로 들어서려던 희윤과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던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아…….”

“연희윤 에스퍼? 반가워요. 저 기억하시죠?”

“네, 최관우 에스퍼님.”

“기억해 주셨구나. 이렇게 기쁠 수가!”

희윤의 알은체에 최관우가 활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더니 눈을 반짝이며 물어 왔다.

“그런데 어디 가세요?”

“커피 한잔하려고요.”

희윤이 층수 표시를 눈으로 훑으며 대꾸했다. 최관우와는 딱히 접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해승과의 일이 있어서인지 단둘이 있는 게 썩 편치 않았다.

“로비에 있는 카페 가시는구나. 잘됐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어르신들 커피 심부름 가는 중이었는데, 도움 좀 받을게요.”

그런 희윤의 마음을 모르는 최관우가 살갑게 대답했다. 정작 최관우가 카페로 간다는 말에 희윤은 멈칫했다.

“아뇨, 전 외부로 다녀오려고요.”

유치하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같이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산책 겸 바람 쐬러 가기에는 외부가 낫지.’

속으로 변명도 했다.

“그래요? 이런…… 그럼 도와달라고 부탁도 못 하겠네요. 어르신들이 독촉해서 그 멀리까지 따라는 못 가겠어요.”

최관우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보니 성격이 참 사교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루에서의 활약은 들었어요. 연희윤 에스퍼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대체 그동안 어디에서 뭐 하고 살았어요?”

그때 최관우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희윤은 숫자가 바뀌는 스크린을 보면서 덤덤히 대꾸했다.

“그냥 남들 일하는 만큼 일하고 살았어요.”

“일? 학생 아니었어요?”

희윤이 무슨 의미냐는 눈으로 최관우를 돌아봤다. 시선을 마주친 그는 의외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연희윤 에스퍼 나이를 잘못 생각했나 보다. 몇 살이에요?”

그러면서 희윤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기분 나쁜 눈빛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았다.

“스물일곱이요.”

“그래요? 아니 정말. 표해승이 형 형 하길래 스물넷쯤 된 줄 알았거든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동안이네요.”

스물일곱이나 넷이나. 그다지 차이도 안 나 보이는데. 자신이 어딜 봐서 대학을 다닐 얼굴로 보이나 의문이었다.

희윤은 엘리베이터에 비친 저를 슬쩍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딱 제 나이로 보였다. 그러다 또 괜히 최관우의 말에 의식한 것 같아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눈을 돌렸다.

하필이면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최관우가 씩 웃으며 다시 질문해 왔다.

“그랬구나. 그럼 직장인이었어요?”

“아뇨.”

“아, 그럼 아르바이트?”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지. 희윤은 슬슬 저 질문에 모두 대답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본래도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닌 데다 자꾸 제 일을 물으니 솔직히 귀찮기도 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예의 없이 꼬치꼬치 물었죠.”

희윤이 슬쩍 스크린을 보며 답하지 않자 그제야 제 잘못을 눈치챈 최관우가 사과해 왔다.

“아뇨, 괜찮습니다. 일은 그냥 돈이 되는 건 뭐든 되는 대로 했어요. 서빙도 해 보고, 배달도 해 보고, 공사장에서도 해 보고….”

적당히 그간 해 온 일을 무심하게 풀어놓던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아, 도착했네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잘됐다 싶은 생각에 희윤이 빠르게 말을 뱉어 내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 제가 들은 말이 뭐였지 하는 생각에 멍하니 서 있던 최관우도 서둘러 내려왔다.

“인제 보니 사회 경험 만렙 형님이셨네. 저기, 형님. 언제 한번 같이 술 한잔해요. 저 형님한테 관심 많아요. 묻고 싶은 것도 많아요!”

이제 고작 두 번 봐 놓고 어느새 최관우는 희윤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어이없을 정도로 사교성이 좋았다.

“희윤 형.”

희윤이 대답하기 위해 막 뒤로 돌려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표해승!”

정작 반응은 최관우가 더 빨랐다. 번쩍 손까지 들며 알은척하는 그를 해승은 가뿐하게 무시했다.

“형, 여긴 어쩐 일이에요? 커피 마시러 왔어요?”

“응. 넌?”

“저도요. 잘됐다, 저랑 같이 가요. 근데 쟤도 데려가려고 그러신 거예요?”

해승이 최관우에게 턱짓했다.

“응? 아니.”

희윤이 딱 잘라 선을 긋자 해승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반대로 최관우는 연극적으로 상처받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해승만 보는 희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가요, 형.”

해승이 최관우를 향해 조소를 날리고, 희윤의 손을 낚아채 갔다.

“어, 뭐야. 표해승. 무시하기냐?”

최관우는 희윤과 해승이 손을 잡는 거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제 인사를 외면한 해승에게 투덜거렸을 뿐이었다.

“오전에도 봤는데 무슨.”

아, 오전에 두 사람이 따로 만났던 거구나. 새삼 알게 된 일에 또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일 때문이라는 걸 아는데도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그건 그거고. 넌 어디가? 설마 본부 밖 카페 가냐?”

“응. 희윤 형이랑 데이트할 거야.”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나온 소리에 희윤은 방금 해승이 최관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데이트? 뭐야, 둘이 그런 사이였어?”

최관우는 그제야 눈치챘다는 듯 희윤과 해승이 마주 잡은 손과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허. 연희윤 에스퍼, 솔직하게 말해요. 표해승이 뭔 짓 했어요?”

놀라기는 놀랐는데, 희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무슨 소리예요?”

“혹시 당장 제 말대로 안 따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거나?”

“아뇨.”

“그래요? 그러면 원하는 건 다 준다고 했어요? 차? 집? 돈?”

“그런 적 없습니다.”

희윤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해승과의 사이에 금전적인 거래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그를 불쾌하게 했다.

“내가 형한테 고백했거든. 좋아한다고.”

해승이 불쑥 말했다. 폭탄선언에 최관우가 경악한 얼굴을 했다. 웃고 있는 해승의 얼굴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해사했다.

아니다. 그보다 더 화사했다. 어찌나 환한지 꼴도 보기 싫을 정도였다. 최관우는 못 볼 걸 봤다는 얼굴로 홱 고개를 비틀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건 놀라서 입을 떡 벌린 희윤이었다.

“연희윤 에스퍼, 진짜예요? 저놈이 한 말?”

최관우의 물음에 희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봤다.

“허어. 표해승, 왜 그래? 너 뭐 잘못 먹었어?”

“글쎄? 내가 굳이 너한테 이런 얘기를 더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데. 아, 아니군.”

대충 대답하던 해승이 별안간 떠오른 생각에 도로 최관우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짓궂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형.”

“응?”

“결정하셨죠?”

주어가 나오지 않았어도 희윤은 해승이 뭘 묻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더불어 최관우에게 해승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응.”

“할 거죠?”

사실 희윤은 이미 해승이 질문했던 직후에 결심을 마쳤다. 그래도 바로 말하지 않았던 건. 이왕이면 해승과 단둘이 있을 때 차분하게 꺼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해승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했다.

“응. 하자, 각인. 하고 싶어.”

단단해진 눈이 해승을 마주 보았다. 해승의 검은 눈동자가 참 예쁘다고 생각하던 순간.

“아!”

몸이 휙 앞으로 끌려갔다. 가까워진 얼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쉽게 짐작이 갔다. 눈을 꽉 감았다. 입술이 부드럽게 눌렸다.

최관우는 도저히 지금 제 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본부 사람들이 오가는 건물 입구 앞에서 당당하게 입을 맞추는 표해승이라니.

상대가 아플까 살짝 붙든 턱, 설탕이 녹아 흐를 듯한 눈빛, 예쁘게 피어난 미소까지. 도저히 제가 알던 S급 망나니 가이드 같지 않았다.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조금 전 무슨 말을 들었더라. 제 귀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각인이라고……? 표해승이? 에스퍼랑? A급이랑?”

어찌나 놀랐는지 최관우는 희윤과 해승이 나란히 손잡고 사라질 때까지도 그 자리에 붙박이듯 서서 혼잣말을 흘렸다.

“허허…….”

허탈하게 웃은 최관우가 몸을 돌렸다. 지금 커피가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대로 지부장실로 돌아온 최관우를 소파에 앉아 대화 중이던 중앙지부장과 인천지부장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어? 최관우 에스퍼. 커피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인천지부장에게 말한 최관우가 중앙지부장을 휙 돌아봤다.

“이숙경 지부장님.”

“어? 왜?”

중앙지부장은 뭔가 얼이 빠진, 그러면서도 복잡해 보이는 최관우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카페인을 수혈해야 한다면서 카페를 다녀오겠다던 최관우의 표정이 심상찮게 보여서였다.

“알고 계셨어요?”

“뭘?”

“표해승이 그 A급 물 속성 에스퍼한테 푹 빠진 거요.”

“아, 그것 때문이었어?”

중앙지부장은 뭘 그런 거로 놀랬느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인천지부장은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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