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85)

“뭐 그게 어쨌다고. 에스퍼와 가이드가 마음이 맞아서 서로 좋아하는 거야 별일도 아닌데.”

지부장은 말도 참 태평하게 내뱉었다.

“별일이 아니라뇨. 다른 가이드도 아니고, 표해승이 그러는 건데. 이게 말이 돼요?”

최관우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목소리를 키웠다. 중앙지부장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말이 안 될 건 뭐야. 표해승은 연희윤 에스퍼한테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어.”

지부장은 희윤이 본부에 왔을 때부터 표해승이 그를 졸졸 따라다니던 걸 기억했다. 저놈이 왜 저러나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중에야 알았다.

희윤은 모르는, 해승만 기억하는 둘의 인연이 과거에 있었다는 걸.

“표해승이요?”

둘의 대화를 듣던 인천지부장이 여전히 못 믿겠다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중앙지부장은 이번엔 고개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다 최관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 근데, 최관우 에스퍼는 어떻게 알았어?”

“로비에서 만났어요, 연희윤 에스퍼랑 표해승이랑.”

둘을 만났다고 해서 그런 사적인 일을 알 수는 없을 텐데. 지부장이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갸웃갸웃했다.

“표해승 눈빛에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입은 다 풀려 있고. 누가 도망이라도 가나 손도 냉큼 잡고.”

“헐, 손을 잡아? 꿀이 뭐?”

인천지부장이 기막힌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그것뿐 아니에요. 정말 중요한 건 이거죠.”

“뭐가 또 남았어?”

이제는 숫제 흥미진진해하는 눈으로 인천지부장이 물었다. 최관우는 대답하기 전에 길게 한숨부터 쉬었다.

이걸 말로 꺼내려고 하니 도로 기가 막혔다. 아직도 최관우는 정말 제가 들은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사실 여부는 중앙지부장에게 물어봐야 정확할 거다. 물론 표해승이 밝혔는지가 문제지만.

‘아니지. 아까 연희윤 에스퍼한테 하는 걸 보니 이미 본부랑도 얘기가 다 끝나 보이는데.’

최관우가 아는 표해승은 무턱대고 일을 벌일 성격이 아니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성공시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뭔데 그래?”

지부장이 뜸 들이는 최관우를 보다가 물었다. 그러자 최관우도 냉큼 입을 열었다.

“혹시 표해승이랑 연희윤 에스퍼, 각인하겠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여기에 한달음에 돌아온 건 사실 이걸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해승이 제 입으로 그 소리를 했다는 건, 이미 준비가 끝났다고 봐야 하는 게 맞으니까.

“아.”

지부장에게 돌아온 건 긍정도 부정도 아닌 탄식 같은 감탄사였다.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 쉬는 모습을 보니 저쪽도 알긴 아는데 정확히 돌아가는 사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사실은 해승이 너무 대놓고 표를 내고 다니는 행태에 기막혀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거야 최관우가 알 길은 없었다.

“뭐야. 각성? 표해승 가이드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 진짜?”

어찌나 경악했는지 인천지부장이 물음표를 마구 날렸다. 그러더니 기어이 몸까지 벌떡 일으키고 중앙지부장을 쏘아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중앙지부장님!”

중앙지부장은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듯 엄지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표해승 이놈 자식은, 폭탄을 터뜨릴 거면 미리 언질이라도 해 놓든가!’

하여간 사람 식겁하게 하는 덴 도가 튼 놈이었다. 가뜩이나 요즘 자꾸만 찾아와서 해승과 최관우를 어떻게든 다시 담당으로 묶으려 드는 인천지부장이 있는 자리에서 얘기가 나오다니.

“뭘 어떡해요. 이미 끝난 거죠.”

조금 전 흥분해서 튀어 들어왔던 게 거짓말인 듯 최관우가 웃었다. 털썩 소파에 앉는 꼴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인천지부장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솟았다.

“넌 지금 태평하게 그런 소리가 나와? 언제까지 담당 가이드도 없이 여기저기 손 벌리고 지낼 생각이야!”

“그럼 뭐 어떻게 해요. 제 짝이 안 나타나는걸.”

버럭 화를 내는 인천지부장과 달리 최관우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아 했다.

“아직 각인한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좀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인천지부장의 억지스러운 말에 최관우는 슬쩍 중앙지부장을 봤다. 곧장 눈이 마주쳤다. 중앙지부장은 그냥 한숨만 푹 쉬었다.

여기서 자신이 뭐라 대거리하면 대화만 더 길어진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현명한 일이었다.

“네, 네. 알았습니다.”

최관우도 대충 대답하고 끝내려고 했다. 문제는 그게 너무 성의 없이 들렸다는 거지만. 돌아온 결국 또 성대한 잔소리와 타박이었다.

“알았어요. 찾아볼게요, 찾아본다고. 여기서 찾으면 되죠?”

최관우가 졌다는 듯 찾겠다는 소리를 세 번이나 하고서야 폭격처럼 터지던 인천지부장의 입이 다물어졌다.

* *

두 사람은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씩 들고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희윤이 졸음을 쫓으러 나왔다는 말을 듣고 해승이 제안한 것이었다.

“좋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희윤이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처럼 말했다. 해승은 희윤이 말하는 게 뭘 뜻하는지 알아챘다.

최관우에게 두 사람의 사이를 밝힌 일일 거다.

“좋은 거죠. 저랑 이렇게 데이트도 하고요.”

데이트라니. 농담이 아닌 말에 괜히 심장 주변이 술렁술렁해진다. 희윤은 얼른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형, 우리 오후엔 매일 이렇게 나와요.”

“안 돼. 그러다가 근태 관리 엉망이라고 찍히면 어떻게 해.”

“우리한테는 좋은 핑계가 있잖아요.”

핑계. 그런 게 있을 리가. 희윤이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해승을 바라보았다. 해승이 눈을 깜빡깜빡 움직였다. 그때마다 긴 눈꺼풀도 같이 팔락거리는 게 꼭 나비 날개 같았다.

“각인요.”

희윤이 이해 못 했다는 걸 알았는지 해승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말했다.

“아, 맞다.”

그게 있었지.

“일단 지부장님께 먼저 말씀드려야겠지?”

“네.”

해승은 굳이 먼저 말했단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아마 지부장도 희윤이 말을 꺼냈을 때 들었다는 티는 내지 않을 거다.

“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거야?”

각인이라는 건 말만 들어 봤다. 희윤에게는 어쩐지 별세계 이야기처럼 자신과 상관없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해승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도 어떻게든 혼자 정리하려고 한 판이었는데, 그런 걸 고려했을 턱이 있나.

그래서 해승에게 들었을 때도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그저 언젠가는 하긴 하겠구나, 이런 마음이었다고 할까.

“일단 지부장님께 보고를 올려요. 그다음에 적합도 검사가 이루어져요. 매칭률이나 상성이야 이미 알고 있지만, 그 외에도 각성할 수 있는지 미리 알아보는 거죠.”

“생각보다 복잡하네.”

“사실 그렇진 않아요. 제일 중요한 건 형과 제가 각인을 위해서 하는 일이죠.”

“우리가 할 일?”

그건 또 뭐지? 희윤이 다시금 의문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자 해승이 씩 웃었다. 그러면서도 말하지 않으니 도리어 더 궁금해졌다. 뭘 숨기는 거지.

“각성은 두 사람의 교감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그에 따라서 성공률이 달라져요.”

“교감은 뭐야.”

해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희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조금씩 어루만지다가 등허리에 손바닥을 댔다. 희윤이 해승을 흘겨보았다. 해승의 입술에는 미소가 서렸다.

“뭐 하는 거야, 공공장소에서.”

휴가 첫날부터 적극적이고 저돌적으로 덤빈 해승은 시간이 날 때마다 희윤에게 키스하고 팔이나 등, 어깨 등을 만지곤 했다.

덕분에 희윤도 며칠 만에 해승의 스킨십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거야 단둘이 있을 때 이야기고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공원에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요.”

해승은 말뿐만 아니라 시선으로도 주변을 훑었다.

“안 돼.”

희윤이 단호히 말했다.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해승의 손길이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슬슬 반응하기 시작하는 자신이 문제지.

“알겠어요.”

해승은 입술을 삐죽하고는 결국 손을 물렸다. 그러다가 완전히 떼지 않은 손을 희윤의 어깨에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

“여하간 각인에서 중요한 건, 에스퍼와 가이드가 서로의 교감을 극대로 끌어올리는 거예요. 그럼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종속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고 해요.”

“종속?”

“네. 보통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상대의 기분이나 컨디션 상태도 느낄 수 있대요.”

“감정을?”

“네. 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고요.”

전부가 아니라고는 해도,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희윤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졌다. 해승이 즐거운지, 슬픈지, 기쁜지, 화가 났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구나.”

반대로 제가 현재 어떤 마음인지도 해승이 느낄 수 있다니. 어쩐지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각인이 이루어졌을 때, 에스퍼와 가이드 간의 가이딩 효율이 지금보다 더 향상된다는 점이에요.”

우린 지금도 좋은데.

“물론 형과는 상성이 워낙 좋아서 지금도 충분하긴 하지만.”

마치 희윤의 생각을 읽은 듯 해승이 말했다.

“근데 그것뿐 아니라 형의 능력치를 높여 주기도 하거든요. 전에 얘기했죠? 각성 후 등급이 올라간 에스퍼가 있다고.”

얼핏 그런 말을 나누고 지나가듯 나눴던 게 떠올랐다. 희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승도 생긋 웃으며 마저 말했다.

“서로에게 가장 필요하며, 유일한 상대가 될 수 있어요. 우리는.”

다시 들어도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공원 산책을 마치고 본부로 향하는데 지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해승이 아니라 희윤에게로.

- 연희윤 에스퍼, 혹시 표해승 가이드랑 같이 있어요?

심지어는 둘이 함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한 물음이었다.

“네, 같이 있습니다.”

- 그랬구나. 그럼 둘이 좀 올라올래요? 할 얘기가 있는데.

“알겠습니다.”

희윤이 예의 바르게 답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지부장님이 오래요?”

옆에서 전화하는 걸 듣던 해승이 물었다.

“응.”

“잘됐네요. 가요.”

조금 전 각성에 대해 얘기했는데 타이밍이 기막혔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희윤 만이었고, 해승은 최관우를 만났을 때 지부장에게 연락이 올 거라 짐작하긴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희윤과 해승은 곧장 본부로 돌아와 지부장실로 향했다.

“이쪽으로 앉아요.”

희윤은 지부장이 가리킨 소파로 걸어갔다. 그 옆을 자연히 해승이 따랐다. 긴 팔은 자연스럽게 희윤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희윤은 익숙해져서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정작 지부장이 그 모습을 발견했다. 지부장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역시 일부러 그런 거였구나.’

본인 입으로 조만간 한다고 하기는 했었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겠다 내심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더 빨랐다.

그만큼 해승이 희윤과의 일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라 지부장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다만…….

‘책임감도 정의감도 능력도 좋은 에스퍼가 허락을 해 줬냐는 거지.’

지부장의 시선이 잠시 또 희윤의 허리에 감긴 해승의 팔로 향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제 거라 과시하는 걸 보면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것 같긴 했다.

“마침 잘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지부장님께 할 말 있었는데.”

해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웃는 얼굴이 아주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할 말? 뭐?”

지부장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희윤 형.”

대답은 하지 않고, 해승이 희윤을 돌아보았다. 별안간 제 이름이 불려 희윤도 고개를 돌렸다. 해승이 상냥한 눈빛으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형이 말해 주세요.”

“응.”

희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부장은 그때까지도 관심 없는 척하면서 둘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부장님.”

“그래. 말해 봐요, 연희윤 에스퍼.”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마주쳐 왔다. 그런데 눈빛이 복잡해 보였다. 희윤은 의아해하면서도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와 해승이, 각인하기로 했습니다.”

“오…….”

지부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입술까지 동그랗게 모으며 감탄사를 흘렸다. 그게 참 어색하고, 어설프게 느껴지는 건 역시 기분 탓일까.

희윤의 시선이 해승에게 향했다. 눈빛에는 너 솔직히 말하라는 의미가 조금 담겨 있었다. 해승은 생긋 웃기만 했다.

‘아무리 봐도 지부장님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상관없나. 어차피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더라도 제게 그 사실을 감춘 건 괘씸하기는 했다. 가만 보면 해승은 종종 몰래 일을 벌여 놓고 시치미 떼기도 했으니까.

“음, 근데 연희윤 에스퍼.”

둘의 눈싸움은 지부장이 희윤을 부드럽게 부르며 일단락됐다.

“네. 말씀하세요.”

“일단 고마워요. 그런 생각을 해 줘서.”

지부장이 두 손을 마주 잡아 깍지를 끼며 희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실은 해승이에게 에스퍼가 오래도록 없던 일은 두고두고 내 마음의 짐이었어요. 그런 해승이를 책임져 주고, 각인까지 해 준다니. 지부장으로서도 해승이를 아끼는 사람으로서도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뒤에 말부터는 어쩐지 내용이 묘해졌다.

“그런데 말이죠, 연희윤 에스퍼. 물론 나도 그렇고 본부도 그렇고. 두 사람의 각인을 매우 바라고 있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연희윤 에스퍼가 알았으면 합니다.”

깍지 낀 두 손을 무릎에 올려 두고 희윤을 바라보는 지부장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진중했다. 그만큼 각인이라는 게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닌 일인지 생각하게 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까 공원을 산책하면서 희윤은 각인에 관하여 해승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특히 두 사람에게 그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해승이 말해 준 것들 중 희윤이 가장 끌리는 건 해승에게 제가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확실해요?”

지부장이 다시 한번 물었다. 잘 고민해 보라고. 정말 후회 없겠느냐고. 어쩐지 그게 희윤이 알고 있는 각인의 의미, 그 이상을 질문하는 듯했다.

그러나 한 번 결심을 내린 희윤은 망설이지 않았다. 고개가 크게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네. 에스퍼와 가이드가 서로에게 종속되는 관계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서로의 감정과 컨디션 상태를 느낄 수 있다는 것도요.”

“음, 그렇죠. 또?”

뭔가 꼭 오랜만에 선생님에게 상담받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희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각인이 되면 가이딩 효율이 더 오르고, 제 능력치도 향상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아, 등급이 오를 수 있다는 것도.”

“맞아요. 등급이 오르는 사례가 있기는 했죠. 미국에서 한 건, 우리나라에서 한 건. 우리나라의 경우 C급 에스퍼가 B급이 되었고 미국의 경우는 B급이 A급이 되었죠.”

에스퍼의 등급이 오르는 게 그렇게 흔한 경우는 아닌가 보다. 하긴 등급은 본인의 고유 능력치를 의미했다. 고작 각성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등급이 오르진 않아도 여러 면에서 능력이 예전보다 높아지는 것 같긴 해요. 아마도 가이드와의 결속으로 안정감이 생기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데. 이 부분은 뭐, 지금 얘기할 건 아닌 듯하고.”

지부장은 대화가 길어질 기미를 보이자 알아서 적당하게 조절했다. 그러더니 해승을 한 번 힐금 보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보다 연희윤 에스퍼가 알아야 할 건 다른 거예요.”

다른 거? 희윤은 저도 모르게 해승을 보았다. 해승이 워낙 잘 설명해 주었기에 더 알아야 할 게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었다. 해승도 지부장의 말에 뭐가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각인은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단번에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요. 길게는 몇 년간 도전하는 전담 에스퍼, 가이드도 있고요. 각인 도전은 가시밭길입니다.”

지부장이 한층 더 진지해진 눈으로 마저 말했다.

“그러고도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고민하세요. 연희윤 에스퍼는 이제 에스퍼가 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잖아요?”

희윤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복잡한 눈으로 보던 지부장의 시선이 해승에게로 갔다.

“그리고 표해승 넌.”

해승이 뭐 어쩌겠느냐는 눈빛으로 그런 지부장을 바라봤다.

“넌 네 부모님이랑 표 회장님께 말씀은 드렸어?”

지부장의 말은 해승보다 희윤의 심장을 쿵 내려앉게 했다.

“이제 해야죠.”

“그래, 얼른 해. 혹시라도 그분들이 연희윤 에스퍼와 만나려고 하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요.”

해승이 귀찮다는 얼굴로 지부장의 말을 딱 잘랐다. 아직 각인도 안 했는데 벌써 희윤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관여하는 걸 질색하고 있었다.

“그래, 그래. 부디 잘 좀 해라. 성급하게는 굴지 말고.”

대충 말을 마친 지부장이 파리라도 쫓듯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만 나가라는 의미였다. 해승은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윤의 손을 붙잡아 챙겨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본 지부장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고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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