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85)

조사팀 사무실로 돌아온 희윤은 인터넷 창을 열어 본부에서 운영 중인 공식 사이트에 들어갔다. 각인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각인을 하자는 말을 듣고 곧바로 지부장실로 가는 바람에 희윤은 해승에게 들었던 설명 외에는 각인에 대해 잘 아는 게 없었다. 아마 지부장도 그런 사실을 알아챘기에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한 것일 거다.

희윤은 일단 각인을 하는 데 필요한 절차나 준비할 것이 있는지부터 차근히 살펴보았다.

“아, 맞아. 가장 먼저 적합도 검사부터 한다고 했지.”

각인하려는 에스퍼나 가이드가 잘 맞는지 여러 검사가 필요하다는 게시글을 발견한 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딩할 때도 효율성 때문에 매칭 테스트를 했으니 적합도 검사도 당연히 필요한 절차일 것이다. 그 외에도 심리 상담이나 기초 교육 등도 있었다.

“생각보다 복잡하네…….”

그냥 마음만 먹어서는 안 되는 거구나. 마우스를 달칵거리며 속으로 생각할 때였다.

“어? 뭐야, 희윤 씨. 각인? 각인 준비하게?”

그때 출동을 나갔다가 막 돌아와 자리에 앉으려던 김동민이 희윤의 모니터를 봤다가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아, 네.”

“표해승 가이드랑?”

“네.”

희윤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김동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렇구나…….”

그러더니 그렇게만 말을 흘리고 본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뭔가 더 얘기할 게 있나 잠시 기다리던 희윤은 달리 이어지는 말이 없어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우연히 각인을 준비하거나 도전 중인 에스퍼나 가이드를 위한 익명 게시판을 발견했다.

희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막 게시글을 클릭하려던 때였다.

테이블에 두었던 스마트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희윤의 시선이 액정으로 향했다. 밝아진 화면에는 낯선 번호가 떠 있었다.

‘누구지?’

희윤은 고개를 갸웃하며 스마트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시 말해 봐.”

같은 시각, 비서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은 해승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 표 회장님께서 연희윤 에스퍼를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됐어. 형 불편하게 할 생각 없어.”

해승은 재고할 여지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하고 그대로 통화를 끝내려고 했다.

- 이미 연희윤 에스퍼도 연락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뒤에 들려온 비서의 말에 뚝 멈추고 말았다.

“뭐?”

되묻는 목소리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 비서실에서 직접 하겠다고…….

비서도 해승의 기분이 가라앉았다는 걸 아는 듯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그마저도 채 마치기 전에 해승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대로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다른 가이드들이 무슨 일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해승의 뒷모습을 살폈다. 그중에는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는 정소한도 있었다. 요즘 그는 조롱과 비웃음을 받는 처지였다.

희윤을 따라 페루로 파견까지 갔으면서 제대로 가이딩하지 못해서 나중에 온 해승에게 일을 빼앗겼다는 소문이 본부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에서, 휴게실에서, 옥상 정원에서 삼삼오오 모여 속닥거리는 소리를 정소한이 직접 듣기도 했다. 그때마다 수치심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야 했었다.

‘어떻게 복수하지.’

정소한은 독기가 바짝 올라 있었다. 뭔가 결정적 한 방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게 뭔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다.

정소한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민하다 희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연희윤 에스퍼. 잘 지내셨어요? 지금 시간 어떠세요? 잠깐 할 말 있는데, 뵐 수 있을까요?]

한참이 지나도록 희윤의 대화창에는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뜨지 않았다. 정소한은 더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조사팀 다녀올게요.”

대충 허공에 대고 말을 던진 정소한은 곧바로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일단 희윤을 만나서 차근히 대화를 나누며 파고들 틈이 있나 엿볼 생각이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정소한의 손가락이 올라가는 방향의 버튼이 아니라 반대쪽을 누르고 말았다.

‘아, 짜증 나네.’

정소한은 별것이 다 거슬린다며 눈살을 확 찌푸렸다. 정말 올해 들어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능력 좋은 A급 에스퍼와 담당이 되어 행운이라고 생각했건만, 하필 다른 누구도 아니고 표해승과 겹칠 건 뭐란 말인가.

짜증을 삭히는 중에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섰다. 벌어지는 문틈 사이로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각인이랑 상관없어. 어른들께서 초대해 주셨으니 간다는 거야.”

“그럴 필요 없다니까요.”

“그래도. 넌 내 유일한 가이드가 될 거잖아.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싶어.”

정소한은 꼼작 않고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는 희윤과 해승이 서 있었다. 둘은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아니, 희윤은 누군가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고, 해승은 정소한을 힐끔 봤다가 그대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명백한 무시였다.

“각인?”

정소한이 흘린 말에 반응한 건 희윤이었다.

“아, 정소한 가이드.”

정소한을 발견한 희윤이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정소한은 성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연희윤 에스퍼, 설마 표해승 가이드와 각인한다는 소린 아니죠?”

“맞아.”

정소한이 희윤에게 한 질문에 해승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게 왜?”

그도 모자라 심지어 삐딱한 눈으로 시비를 걸듯 질문까지 던졌다. 정소한도 유감 섞인 눈으로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왜라뇨. 집안 어른들이 연희윤 에스퍼를 부른 이유가 각인에 반대하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반대?”

해승이 고개까지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런 건 전혀 고려해 본 적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뇨, 해승이의 가족들이 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요.”

희윤이 차분하게 정소한의 말에 대꾸해 주었다.

“형, 안 만나도 돼요.”

해승은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만스러워하는 투로 말했다. 그는 비서에게 연락을 받고 곧장 희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희윤에게 돌아온 답은 이미 어머니에게 직접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희윤은 오늘 집에 가겠다는 말까지 해 버렸다고 했다.

“너랑 사귀는 사이잖아. 당연히 부모님도 뵐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내가 이러는 거 부담돼?”

뭐? 사귀는 사이? 정소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윤과 해승은 둘만의 대화에 집중했다.

“부담될 리 없잖아요. 저야 형이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 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데요. 그렇지만 형이 불편한 자리에 가는 건 싫어요.”

“네 부모님인데 뭘. 나도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말했을 거야.”

물론 해승의 부모님처럼 집으로 초대해서 밥을 먹자는 얘기는 못 할 거다. 그냥 제가 요즘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사귀고 있다고 말했겠지.

그랬다면 할머니는 말없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거다.

“하……. 알았어요. 형이 그렇게 말한다면.”

결국에 이번에도 물러서는 건 해승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로비 층에 멈추어 섰다.

“그럼 퇴근 후에 주차장에서 만나요.”

“알겠어.”

순순히 대답한 해승이 휙 정소한을 돌아보았다.

“안 내려?”

정소한은 입술을 꽉 물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무시했으면서 이제 와 알은척하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아예 쫓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쪽도 희윤에게 용건이 남아 있었다.

“연희윤 에스퍼, 제가 메시지 보낸 거 아직 확인 안 하셨더라고요.”

“메시지요?”

정소한의 말에 희윤이 당황해서 얼른 스마트폰을 내려다봤다. 해승과 얘기하느라 아예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미처 액정을 터치하기도 전에 해승이 낚아챘다.

“뭐야.”

희윤이 황당해하는 얼굴로 해승을 봤다. 해승은 아예 잡지 못하도록 스마트폰을 든 팔을 위로 쭉 뻗은 상태였다.

“이따 봐요. 급한 것도 아닌데.”

워낙 해승의 키가 커서 스마트폰이 엘리베이터 천장에 닿을락 말락 했다.

“알았어. 이리 줘.”

말로 하면 될걸. 희윤이 손을 내밀어 위아래로 흔들었다. 스마트폰을 돌려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돌아온 건 스마트폰이 아니라 해승의 손이었다.

희윤이 마주 잡힌 손을 어이없이 보거나 말거나 제 쪽으로 끌어당겨 기어이 깍지까지 끼었다.

해승이 정소한에게 얼른 안 내리고 뭐 하냐는 눈빛을 보냈다. 정소한은 기막히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인사도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마자 해승이 곧장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 버려 희윤을 또 황당하게 했다.

* *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도 차는 한참 길을 따라 달렸다. 옆으로 보이는 잘 정돈된 정원은 수목원을 생각나게 했다.

“여기가 집이야?”

희윤은 설마 하는 눈으로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마주친 해승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에 드세요?”

희윤이 다시금 창밖을 보았다. 정원을 얼마나 정성 들여 가꿨는지 가지런히 심겨 있는 꽃과 나무가 싱그러운 느낌을 물씬 주었다.

“응, 예쁘네.”

덤덤한 대꾸에 해승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럼 이따 저녁 먹고 산책해요.”

희윤은 그러겠노라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과연 해승의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나서 산책까지 할 기력이 남아 있을지 장담이 되지 않았다.

차는 너른 정원을 통과해서 드라마나 사진 속에서나 보았을 법한 커다란 한옥 앞에 멈추어 섰다. 희윤은 한 무리 사람들을 발견했다.

“걱정 말아요, 형. 예쁘니까.”

차를 멈춘 해승이 불쑥 말했다. 그도 모자라 희윤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기까지 했다.

“내리자, 얼른.”

희윤이 당황한 얼굴로 안전띠를 풀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장 상아색 원피스를 입은 50대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어서 오세요, 연희윤 에스퍼.”

희윤은 단숨에 눈앞의 여성이 해승의 어머니일 거라 확신했다. 이목구비가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연희윤입니다. 저 근데 편히 불러 주세요.”

희윤의 말에 해승의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곱게 접으며 웃어 보였다.

“어머, 그래도 될까요? 그럼 희윤 군. 이렇게 부를게요.”

“네. 그리고 이건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희윤이 손에 들고 있던 한우 선물 세트를 해승의 어머니 앞에 쓱 내밀었다. 이곳에 오기 전 백화점에 잠시 들러 산 것이었다.

“어머나! 이렇게 귀한 걸.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해승의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선물 세트는 그녀가 아니라 옆에서 대기 중이던 총괄 매니저가 가져갔다.

“그럼 안으로 들어갈까요? 표 회장님과 사장님이 희윤 군이 오길 무척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어요.”

해승의 어머니가 희윤과 다시 눈을 맞추며 말했다. 표 회장은 해승의 할아버지, 사장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듯했다.

‘집에서도 그렇게 부르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며느리고, 아내인데. 호칭이 꼭 거리를 두는 듯했다. ‘재벌가는 다 그러나?’ 하고 희윤이 의문을 가졌을 때였다.

“회장, 사장은 뭐야. 그냥 평소대로 부르세요. 형 왔다고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야?”

나란히 걷던 해승이 까칠하게 말을 뱉었다.

“어머, 해승아!”

해승의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가렸다. 당황한 것 같지만 또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럽게 보였다.

희윤은 그 얼굴에 확실히 해승은 제 어머니를 참 많이 닮은 듯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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