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85)

“할아버지! 아빠! 나 왔어!”

해승이 희윤을 이끌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낭랑한 목소리가 친근하게 제 가족들을 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과 진회색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나란히 나타났다.

나이만 차이가 날 뿐 둘은 마치 복사해서 붙여넣은 것처럼 똑같았다. 마치 동네를 다니다 보면 자주 보았을 법한 친근한 할아버지, 아저씨 인상이었다.

“험험, 해승아. 너 그게 무슨 채신없는…….”

“아빠, 말투 이상해. 그냥 평소대로 해.”

이번에도 해승이 까칠하게 제 아버지에게 핀잔을 던졌다. 그러자 표 사장은 해승 옆에 있는 희윤을 눈치를 보며 다시 “흠.” 헛기침했다.

“아니, 내 말투가 뭐. 어때서 그러느냐.”

아까보다 더 사극 투로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희윤은 저도 모르게 힐끔 해승을 봤다.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대체 그 이상한 말투는. 어디서 뭐 잘못 먹었어?”

“해승아, 너 아버지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표 회장이 점잖게 말렸다.

“할아버지도요. 아니 단체로들 왜 이래요?”

뭐 잘못 먹었냐는 듯 불량한 눈으로 제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를 쭉 훑어본 해승이 뭔가를 깨달은 듯 비죽였다.

“설마 희윤 형 기죽이려고 그런 거예요?”

해승의 말에 표 사장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희윤에게 서둘러 말했다.

“절대 아니네, 연희윤 에스퍼. 오해야. 우리는 절대, 절대, TV에서 나오는 그런 갑질 재벌 이런 거 절대 아니네.”

얼마나 당황했는지 표 사장은 절대라는 말을 무려 네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고도 충분하지 못했는지 또 무어라 덧붙이려 입을 열었다.

“해승아, 넌 오랜만에 와서는 꼭 그렇게 네 부모님을 민망하게 해야겠느냐. 그저 네가 누군가를 데려와 반갑고, 긴장돼서 그런 걸.”

이번에도 말리는 건 표 회장이었다.

“할아버지도 무게 적당히 잡으세요. 긴장하신 거 잘 알았으니까.”

해승이 여전히 삐딱하게 표 회장의 말을 받았다. 그러자 표 회장이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얼른 반박했다.

“어허, 난 아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희윤이 보기에 지금이 딱 그런 듯했다. 물론 굳이 그런 말을 해서 어른들을 민망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근데 좀 귀여우시다.’

희윤이 보기에도 세 분은 자신을 어려워하고 조금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그걸 어떻게든 괜찮아 보이게끔 하려다 보니 이런 상황이 벌어진 듯했다.

그때까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해승의 어머니가 한마디 했다.

“음, 아버님, 자기야. 이미 희윤 군도 다 눈치챈 것 같으니 이만 자리 좀 옮기죠.”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자기야라니.’

아버님이야 표 회장을 말하는 걸 테니. 저 호칭은 당연히 표 사장을 의미할 터였다. 이번에야말로 희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도 모르게 시선은 차분한 얼굴로 선 해승의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곧장 눈이 마주쳤다. 해승의 어머니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요. 두 사람이 다들 희윤 군이 온다고 아주…… 온갖 난리를 다 피웠거든요.”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그 모습도 역시 해승과 닮아 있었다. 희윤은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도 희윤을 부르는 호칭을 두고 표 회장과 표 사장이 소란을 피웠다가 전부 사이좋게 ‘희윤 군’으로 부르는 것으로 정리한 후, 다들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스무 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법한 소파에 앉자마자 해승의 조부와 부모님은 희윤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 왔다. 희윤은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느라 정신이 다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밥 안 줘? 형 배고프겠다.”

해승이 불만스럽게 툭 말을 뱉자, 그제야 해승의 어머니가 정신을 차렸다.

“어머, 그러네. 실례했어요, 희윤 군. 식사하러 가 볼까요?”

해승의 어머니가 상냥히 웃으며 희윤에게 권했다.

“네.”

희윤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정신없는 질문 공세에 배가 고프다는 생각조차 못 했었는데, 제안을 듣고서야 살살 허기가 느껴져 오고 있었다.

자리를 옮긴 곳은 고급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식당이었다.

“이쪽으로 앉아요.”

해승의 어머니가 희윤에게 표 회장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아마도 손님이니까 상석에 앉으라는 의미 같은데 희윤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형, 이리로 와요.”

해승이 희윤의 팔을 붙들어 의자에 쑥 내려 앉혔다. 해승의 어머니와 마주 보는 방향이었다. 해승의 어머니는 또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맛있게 들어요.”

해승의 어머니가 펄펄 끓는 삼계탕을 희윤 앞에 밀어 주며 말했다. 희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 먹겠습니다.”

짤막한 대꾸에 해승의 어머니가 또 빙긋 웃었다. 그녀는 희윤이 화려한 언변은 없어도, 표정이나 행동이 참 예의 발라서 마음에 들었다.

* *

식사하면서도 희윤을 향한 질문 세례는 끊이질 않았다.

“해승이가 먼저 고백했다고? 그래? 그때 자네 기분은 어땠나?”

“페루에서 해승이를 봤을 때 당황스러웠죠? 혹시 화가 나거나 짜증 나거나 하진 않았어요?”

“내 손자 때문에 곤란한 일은 없었나? 있었다면 먼저 사과부터 하지. 그래도 해승이가 잘해 주긴 하지?”

어딘지 모르게 해승보다는 희윤의 기분과 감정을 더 신경 쓰는 듯한 물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표 회장이 곤란한 일이 있었다면 사과하겠다며 꺼낸 말이 더 그랬다.

“그만들 좀 해. 희윤 형 먹던 것도 체하겠어.”

삼계탕 몸통을 먹기 좋은 크기로 쭉쭉 찢어 희윤의 앞접시에 옮겨 주던 해승이 끼어들었다.

“아, 불편했나? 미안하네. 어서 들게. 다 먹은 후 다시 얘기하지.”

그러자 표 사장이 먼저 몸을 바로 세우고 점잖게 말했다. 그 옆에 앉은 해승의 어머니도 고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 가득한 눈을 번뜩이며 질문을 쏟아붓던 모습은 보인 적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시는 모습들이 또 귀엽게 느껴졌다.

“형, 드세요.”

해승의 배려는 먹기 좋게 정리한 삼계탕을 앞접시에 놓아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아예 포크로 살코기 한 점을 찍어 희윤의 입가로 가져가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표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표 사장은 지금 제가 제대로 본 건가 하는 얼굴로 상체까지 앞으로 내밀었다.

“어머, 우리 해승이. 자기를 닮아서 배려심이 참 좋네요.”

해승의 어머니만 아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형, 얼른요.”

주변 반응엔 신경도 쓰지 않고, 해승이 희윤을 재촉했다. 심지어 입술에 살코기를 쿡 찌르기까지 했다.

엉겁결에 입을 벌린 희윤은 혀에 닿는 짭짤한 맛에 움찔했다.

“맛있죠?”

제 역할을 끝낸 해승의 포크가 물러섰다. 그리고 대신 예쁜 미소가 돌아왔다. 희윤은 입을 우물우물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 사람이 해승이라서 그런지 유독 더 맛있게 느껴졌다.

“아니, 쟤 누구야? 내 아들 표해승 맞아? 어디 가서 해승이 탈 쓴 여우가 나타났나?”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진 말투로 표 사장이 말했다.

“여보.”

해승의 어머니가 제 남편에게 주의를 시켰다. 호칭이 자기에서 여보로 바뀌었다. 아마도 심기가 불편할 때는 그러는 듯했다.

해승은 제 부모가 다투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희윤의 앞에다가 온갖 먹을 걸 가져다주는 것에만 신경 썼다.

그게 꼭 둥지에서 기다리는 새끼를 위해 먹이를 날라다 주는 새처럼 보여서 표 회장은 “허허.” 너털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내 손자가 정말 빠져도 아주 푹 빠졌구나. 제대로 빠졌어.”

보고로 듣고, 사진으로도 보고, 영상으로도 돌려 봤지만 설마 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제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지만 S급 가이드 표해승이 본부에서 얼마나 까다로운지, 아니 솔직히 말해서 지랄 같은지 표 회장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희윤에게 하는 행동들을 보고도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었고, 중앙지부장이랑 통화하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던 거다.

“희윤 군.”

한입 크기로 자른 깍두기를 막 젓가락으로 집던 희윤이 저를 부르는 표 회장의 목소리에 얼른 동작을 멈추었다.

“네, 회장님.”

아예 포크까지 내려놓고 예의 바르게 대답하는 모습에 표 회장이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아주 바르고 성실한 성격이었다. 해승에게는 정말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회장님은 무슨. 그냥 할아버지라 불러도 됩니다.”

표 회장의 말투가 달라졌다. 회장이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불러 달라는 소리에 희윤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표 회장이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희윤 군에게 부탁할 게 있소.”

어느덧 말투도 다시 정중해졌다.

“네. 말씀하세요, 회장님.”

부탁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희윤은 조금 긴장한 눈으로 표 회장을 응시했다.

“내 손자가 부족한 게 많다는 거 내 잘 알고 있소이다.”

“아닙니다. 충분히 제게 잘해 주고 있습니다.”

희윤이 즉각 대답했다. 표 회장은 다시금 미소를 띠면서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은 고맙지만, 내가 저놈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본부에서 어떻게 구는지도 잘 아니 감싸 줄 필요는 없지.”

표 회장이 말을 끝내자마자 표 사장은 켁 하고 사레가 들렸고, 해승의 어머니도 입꼬리를 움찔했다. 오히려 해승은 제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느긋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부디, 내 손자를 잘 이끌어 주시오. 내 희윤 군을 보니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군.”

주변 반응이야 어떻듯 표 회장의 신뢰 가득한 눈동자가 희윤을 향했다. 희윤은 저도 모르게 허리까지 곧게 세웠다.

“물론 희윤 군에게 전적으로 책임지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나도, 아들 내외도 그건 염치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지.”

“아무렴요, 아버지. 저 유별난 성격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죠.”

표 회장에 이어 표 사장도 깊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은 따로 안 했지만, 해승의 어머니 역시 동의하는 눈빛을 했다.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얘기하시오.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태도록 할 테니.”

표 회장의 표정은 커다란 결심이라도 하듯 진지했다. 그건 꼭 예전 에스퍼 공식 발표 때 해승이 했던 말과 행동과 비슷해서 희윤은 저도 모르게 빙긋 웃고 말았다.

“험험, 마음에 드는군. 마음에 들어.”

표 회장이 또 수염도 없는 턱을 쓸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희윤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해승이 사르르 미소를 피워 올렸다.

“희윤 형.”

“응.”

“사랑해요.”

뜬금없는 고백에 희윤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쿨럭! 컥, 쿨럭쿨럭.”

“어머, 자기. 지저분하게 뭐 하는 거예요.”

해승의 고백에 표 사장이 놀라 음식을 잘못 삼키는 바람에 거하게 기침을 했다. 그런데 하필 입에 있던 음식물들이 해승의 어머니 앞에 있는 그릇에 튀는 바람에 핀잔까지 들었다.

하지만 희윤에겐 그런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치 온수에 퐁당 빠진 것처럼 온몸은 뜨끈하게 열이 올랐고, 귀가 먹먹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평생 책임지세요.”

그런데도 해승의 그 말만은 또렷이 들렸다. 주변에서는 난리가 났다. 표 회장은 연신 물을 들이켰고, 표 사장은 요란하게 기침을 토했다. 해승의 어머니도 두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이가 들어 그런가. 피곤하군. 난 이만 들어가서 쉴 테니 대화들 더 나눠요.”

잠깐 사이에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해진 표 회장이 먼저 자리를 떴다.

“자기도 그만 들어가 봐요.”

해승의 어머니가 표 사장에게도 은근히 자리를 비워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왜?”

그러나 표 사장은 눈치가 없는지 아니면 제 부인을 여기 두고 혼자 가는 게 싫은지 버텼다.

“소화도 슬슬 되었을 테니……. 희윤 군, 술 한잔할 텐가?”

한술 더 떠서 희윤에게 술을 마시자는 소리까지 했다.

“술은 무슨 술이에요. 주책이야, 정말.”

해승의 어머니가 눈을 흘기며 남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그러자 표 사장이 아프다며 엄살을 부렸다.

희윤은 두 사람을 보며 ‘참 부부 사이가 좋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해승과 오래 함께하면서 잘 지내고 싶다는 희망을 조금 품었다.

“하……. 내가 이래서 나중에 데려오려고 했는데.”

하지만 해승은 다른가 보다. 옆에서 들린 한탄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해승이 미간을 확 구긴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왜, 좋은데.”

“저게요?”

“응.”

희윤의 대답에 해승은 여전히 찡그린 얼굴을 하고서도 묘한 눈빛을 했다. 그러더니 반짝 눈동자를 빛냈다.

“형.”

“응?”

“산책하러 갈까요?”

갑자기? 뜬금없이? 이 타이밍에?

“아까 정원이 좋아 보인다면서요.”

그래도 되나. 희윤이 망설일 때였다.

“네가 웬일이냐. 정원에는 잘 안 나가는 녀석이. 특히 여름에는 모기며 벌레 많다고 질색을…….”

“어머, 자기야? 정말 피곤해 보이네.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해승의 어머니가 좋은 분위기를 훼방 놓는 표 사장 말을 중간에 딱 끊어 버렸다. 팔을 움켜쥐고 일으키는 시늉까지 했다.

표 사장은 차마 제 부인의 말에 버티지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나면서도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희윤을 바라보았다.

“희윤 군, 정원이 크지는 않아도 제법 잘 가꿔져 있어요. 특히 여름에는 배롱나무가 아주 보기 좋아요.”

희윤은 해승의 어머니가 웃으며 전하는 권유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해승이 희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어째 그 모습이 해승의 어머니가 남편을 끌어가는 것과 비슷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알지 못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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