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승은 끈질긴 진동음을 무시하지 못하고 눈을 떴다. 그러고는 제 옆에 누워 있는 희윤부터 확인했다.
아침 햇살이 이마를 간질이는데도 희윤은 세상모르고 잠에 푹 빠져 있었다. 얼굴엔 감출 수 없는 피로감이 비쳤다.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새벽이 하얗게 밝아 가도록 해승이 희윤을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몇 번이고 물리고 비벼 댄 입술은 부은 채였고, 목부터 쇄골·가슴에는 그가 만든 잇자국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이불에 가려진 다른 곳 역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나 해승은 저를 받아들일 희윤의 소중한 장소에 공을 들였다.
‘형이 부디 내 인내심을 알아줘야 할 텐데.’
희윤이 놀라지 않도록, 거부감이 생기지 않도록. 천천히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 가려 애쓰고 있다는 걸.
해승은 햇볕에 데워진 매끈한 이마에 살짝 입술을 붙였다가 떼고 그때까지도 눈치 없이 몸체를 떨어 대는 스마트폰을 낚아챘다.
액정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다. 물론 11자리 숫자만 봐도 상대가 누구인지는 잘 알았다.
중요한 상대도 아니라 해승이 그대로 무시하고 꺼 버리려 할 때였다.
“왜 안 받아…….”
잠기운이 묻어나는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윤이 눈도 뜨지 못한 채 고개만 이쪽으로 두고 있었다.
“안 받아도 되는 전화라서요.”
“누군데?”
바르르 떨리던 희윤의 눈꺼풀이 기어이 올라갔다. 해승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려다가 몽롱한 눈동자에 홀려 솔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최관우요.”
마치 해승의 말을 들은 것처럼 스마트폰이 다시 진동했다. 발신자는 당연히 최관우였다.
“받아 봐.”
희윤의 재촉에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해승은 순순히 전화를 받았다.
“왜.”
- 오, 표해승. 웬일이냐? 네가 전화를 받게?
평소에 얼마나 무시했으면,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최관우가 한 말이 저랬다.
“원하면 끊고.”
- 에헤이, 받았으면 그만이지. 뭘 또 끊는다고 그러시나.
“왜 걸었어.”
최관우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해승은 심드렁히 질문을 던졌다. 용건은 궁금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운 채 저를 말똥말똥 바라보는 희윤 때문에 전화를 가차 없이 끊어 버릴 수가 없었다.
- 나 정소한 가이드 만났다.
뜻밖의 소식에 해승이 눈썹을 쓱 올렸다. 침실이 조용해 통화 내용이 들린 희윤도 의외라는 눈을 했다.
“둘이 왜?”
- 너랑 연희윤 에스퍼가 잘되는 꼴 보기 싫다던데?
최관우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해승은 힐끔 희윤을 봤다. 최관우의 말에 놀랐는지 눈이 더 동그래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해승은 희윤의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간지러워서일까, 눈꺼풀이 사정없이 팔락거렸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해승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래서?”
-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더라. 연희윤 에스퍼랑 잘되게, 너 좀 데려가래.
스마트폰 너머에서 “으하하.” 하고 경박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본인이 말해 놓고도 웃는 꼴이 어지간히 재미가 있나 보다.
“그냥 그렇게 말한 건 아닐 거고. 뭔가 제시한 게 있겠지?”
- 아니? 그러기 전에 거절했어.
웬일로? 해승이 아는 최관우라면 귀찮아서라도 상대가 말하는 걸 대충 흘려듣고 말 사람이었다.
- 너랑 연희윤 에스퍼가 각인한다는 소리를 들었잖냐. 그 정도면 아무리 훼방 놓는다고 해도 괜한 짓이지.
“현명하네.”
해승이 픽 웃으며 호응했다. 그러자 최관우가 신난 말투로 냉큼 대꾸했다.
- 그럼. 솔직히 말하자면 네놈 생각해서 그런 거 아냐. 유능한 가이드가 괜한 데 시간 버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지. 연희윤 에스퍼도 곤란하지 않았으면 하고.
“네가 왜 형을 신경 써.”
-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여간 까칠하긴. 여하튼 그런 일 있었다고 얘기하려고 전화했다.
아무리 봐도 용건은 그게 아닌 듯한데, 최관우는 계속 말을 빙빙 돌렸다. 이것 역시 평소 해승이 아는 최관우의 모습이 아니었다.
설마 정소한이랑 무슨 일 있었나?
“용건 끝났으면 끊어.”
해승이 진실에 가까운 추론을 하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쯤 들어 줬으면 본론을 꺼내야지. 그럴 생각이 없다면 통화를 종료할 생각이었다.
- 어이, 어이! 아직이야. 안 끝났다고.
최관우가 다급히 소리쳤다.
- 연희윤 에스퍼랑 같이 있지? 잠깐 전화 좀 바꿔 줘.
제 이름이 불리자 희윤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해승에게 스마트폰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됐어요, 형. 안 받아도 돼요.”
해승은 스마트폰을 건네는 대신 손을 잡고 마치 습관이라도 되는 듯 희윤의 손바닥에 쪽 입을 맞추고 말했다.
- 어? 연희윤 에스퍼? 옆에 있어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해 눈을 붉혔던 희윤은 저를 찾는 최관우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이리 줘.”
어서 달라며 마주 잡은 손까지 위아래로 흔드는 희윤을 본 해승이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하면서도 결국 스마트폰을 넘겼다.
“짧게 끝내요.”
목도 안 좋잖아요. 기어이 한마디 하며 손으로 제가 새벽까지 예쁘게 남긴 잇자국을 어루만졌다.
기어이 희윤의 뺨이며 이마까지 붉은 기운이 번졌다. 그러나 차마 항의는 하지 못했다. 그건 최관우에게 간밤의 일을 고스란히 알려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흠, 흠. 네 말씀하세요, 최관우 에스퍼.”
목을 가다듬은 희윤이 최관우에게 말을 걸었다.
- 별건 아니고요. 정소한 가이드가 연희윤 에스퍼 담당 맞죠?
“네, 맞아요. 저 외에도 몇 분 더 계시는 거로 알고 있어요.”
- 아, 역시. 그럼 담당 에스퍼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아세요?
“글쎄요. 그런 얘기는 나눠 보지 않아서…….”
희윤이 고개를 젓는데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해승이 불쑥 끼어들었다.
“여섯 명인가 그럴걸?”
- 아, 그래? 생각보다 많네…….
최관우가 의외라는 듯 대답하더니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이어지는 말이 영 엉뚱했다.
- 뭐 그건 본부에 요청해서 공문을 보내면 되니 상관없고.
“네? 공문요?”
희윤이 엉겁결에 묻자 최관우가 냉큼 대꾸했다.
- 네. 정소한 가이드와 매칭 테스트하려고요. 상성이 꽤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 근데 그러려면 담당 에스퍼들에게 연락해야 하니까. 연희윤 에스퍼한테 제일 먼저 말한 거예요.
“아…….”
희윤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해승에게 향했다. 눈을 마주친 해승이 입가에 씩 미소를 띠었다.
“그래. 응원한다. 잘해 보고, 더 할 말 없지? 그럼 끊는다.”
그러더니 스마트폰을 그대로 가져가 본인 할 말만 쏙 내뱉고는 가차 없이 종료해 버렸다.
“왜 그렇게 끊어, 얘기 중이었잖아.”
희윤이 불만스럽게 말하자 해승은 어깨를 으쓱이며 스마트폰을 침대 옆 선반에 내려놓았다. 그 전에 무음으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희윤과의 시간을 더는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우리랑 상관없는 거잖아요.”
“최관우 에스퍼가 정소한 가이드와 매칭 테스트를 한다는 거 아냐? 그럼 나랑도 상관있지. 정소한 가이드가 내 담당인데.”
희윤의 말을 듣고도 해승은 그다지 관심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에게 최관우와 정소한이 매칭 테스트를 한다는 건 희소식이었지만, 그 외에는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솔직한 소리를 하면 희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테니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해승은 희윤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따끈따끈한 피부가 손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그러게요. 정소한이랑 최관우라니.”
해승은 희윤의 말에 대충 답해 주며 손을 아래로 움직였다. 목적지는 희윤이 덮고 있는 이불이었다.
“최관우 에스퍼도 그동안 가이드 때문에 고민이 많았나 보다.”
“네. 정해진 담당이 없었으니까요.”
원하는 대로 이불을 치워 버린 해승이 희윤의 몸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희윤은 순식간에 바뀐 자세를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가, 해승의 단단하고 길쭉한 두 팔이 저를 가두듯 세워져 있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뒤늦게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해승…….”
“희윤 형, 입 맞춰도 되죠?”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해승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는 희윤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며 다시 물었다.
“키스할게요.”
그건 동의를 구하는 말이 아니었다. 선전 포고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해승이 닿아 왔다. 말캉하게 맞붙는 온도가 제법 뜨끈했다. 한참 희윤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빨던 해승이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최관우와 정소한에 관한 얘기는 그대로 휘발되었다.
“하……. 뭐야, 갑자기.”
밀도 높은 키스를 퍼붓던 해승이 물러가자 희윤은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투덜거렸다.
해승의 눈이 빨간 혀를 발견하자마자 가늘게 변했다. 해승이 이를 그대로 덥석 물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앞을 가로막는 희윤의 손바닥에 막히고 말았다.
“형.”
입이 막힌 해승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았다. 그건 또 왜 이렇게 대책 없이 심장을 떨리게 하는 건지.
“갑자기 뭐 때문에 그래.”
“하면 안 돼요?”
“아니, 그건 아닌데…….”
희윤의 솔직한 대꾸에 해승이 빙긋 웃었다. 눈꼬리가 참 예쁘게도 휘었다. 그러면서도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뜨거워 조금 위기감이 들었다.
희윤은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에 시선을 힐끗 던졌다. 저렇게 밝은 걸 보니 아침도 한참 지난 것 같은데.
“형.”
해승의 숨결이 손바닥과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희윤은 목을 조금 움츠린 채 얼른 손을 물렸다.
어느덧 해승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다가와 있었다.
“더 해도 되죠?”
목소리가 너무 달다. 바라보는 눈빛도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희윤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큰 결심을 한 듯 두 팔을 뻗어 해승의 목에 둘렀다. 해승이 기쁜 듯 웃으며 그대로 희윤의 입술을 삼켰다.
키스는 조금 전보다 더 야하고, 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