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초도 되지 않아 답변이 돌아왔다. 해승은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의자에서 일어섰다.
“입금됐을 겁니다. 확인해 보세요.”
“고, 고맙네.”
“아닙니다. 희윤 형 아버님이신데 당연히 제가 도움을 드려야죠.”
“그, 그렇, 그렇지. 자네 말대로 희윤이에게는 연락 안 했으니 걱정하지 말게.”
애초에 걱정하지 않았고 그렇게 둘 생각도 없는 해승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간 이후로 해승이 이 남자를 볼 일은 없을 거다. 물론 그건 희윤도 마찬가지였다.
“필리핀 현지도 다녀오셔야지요? 겸사겸사 가족분들과 여행도 하세요.”
그러나 그의 속셈과는 달리 해승의 말투는 부드러웠고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랬기에 연동수는 안심한 표정을 했다.
“그래야지. 이 은혜는 내 잊지 않겠네!”
“은혜라뇨. 희윤 형 생각만 해 주시면 됩니다.”
“성공만 하면 희윤이 녀석에게도 신경 쓰도록 하지.”
해승은 지루한 아부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대기 중이던 비서가 연동수와 인사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대로 차에 올라 귀가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자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해승의 입가에 다시금 웃음이 피어났다. 그대로 주방으로 걸어가니 희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어? 해승아! 왔어?”
마침 몸을 돌리던 희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딱 맞춰 왔네. 옷 갈아입고 와. 밥 먹자.”
“네.”
해승은 곧장 드레스룸으로 가 편한 옷으로 바꿔 입고, 손도 씻은 후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다.
“앉아.”
해승이 의자를 차지하자, 희윤은 서둘러 밥을 퍼 앞에 놓고 된장찌개와 삼겹살을 가져왔다.
“잘 먹을게요.”
“응, 맛있게 먹어.”
괜히 쑥스러워진 희윤이 목뒤를 쓱 문지르며 웃었다. 해승은 예상했던 것보다 정말 야무지게 먹었다. 상추 위에 깻잎을 얹고, 그 위에 고기·쌈장·김치를 넣어 쌈을 싸서 먹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자, 짠!”
거기다 소주까지 같이 마시자 음식도 술도 금세 바닥을 보였다. 희윤은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며 또 해쭉 웃었다.
해승이 그런 희윤을 보고는 마주 미소를 짓더니 먹기 좋게 싼 쌈을 쓱 들이밀었다.
“아.”
“아…….”
엉겁결에 입을 벌리자 안으로 쌈이 쏙 들어왔다. 오물오물 움직이고 있으려니 해승이 기특하다는 듯 희윤의 볼록해진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지부장이 최관우와 정소한의 매칭 테스트를 허가했어요.”
민망해하는 얼굴로 해승이 싸 준 쌈을 부지런히 오물거리던 희윤의 눈이 커졌다. 다급하게 넘기는지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래?”
“네. 정소한이 오늘 지부장에게 보고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구나…….”
희윤이 최관우에게 정소한과 매칭 테스트를 할 생각이라는 연락을 받은 건 3일 전.
그 후 해승에게나 최관우, 하다못해 정소한에게도 별다른 말을 들지 못해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파악할 수 없던 상태였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결국 매칭 테스트를 하기로 했나 보다. 희윤은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간 희윤은 정소한에게 미안한 감정이 컸다. 그의 담당 에스퍼이면서 자꾸 해승만 신경을 쓰다 보니 그에게 소홀하게 굴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페루 파견 때는 먼 거리를 선뜻 함께해 준 정소한에게 연락할 새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거기다 기껏 먼저 메시지도 보내셨는데 답장도 안 했고.’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로 정소한에게 실수한 게 한둘이 아닌 듯했다.
“형, 왜요. 정소한이 최관우와 매칭 테스트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요?”
“어? 아냐. 좋은 일이잖아.”
그래야 해승과 각인할 때 마음의 짐이 줄어들 테니까.
“자, 형. 건배해요.”
고민을 덜어 낸 희윤의 안색을 살핀 해승이 소주잔을 내밀었다.
“아…… 응.”
희윤도 엉겁결에 잔을 부딪쳤다. 소주를 넘기자 속이 짜르르 울렸다. 그렇게 몇 번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고, 해승이 싸 준 쌈을 날름날름 받아먹었더니 어느새 희윤의 얼굴이 취기로 발갛게 변해 갔다.
“형, 제가 각인하자고 했을 때 했던 말 기억나죠?”
해승이 희윤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주며 기억나지 않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뭘?”
희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취기가 올라 정신이 몽롱하고 귀도 먹먹해져 질문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억 못 하는구나. 제가 얘기했잖아요. 각인 확률을 높이는 방법요.”
해승은 그런 희윤이 귀엽다는 듯 볼록해진 뺨을 콕 찌르며 말했다.
“……아.”
희윤이 그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찡긋거렸다. 어설프게 쥐어진 술잔에서 소주가 흘러넘쳐 손을 적셨다. 취한 머리는 그마저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랑 교감을 잘해야 한다고 했어.”
그저 희윤은 제가 떠올린 생각이 반가워 눈매를 휘었다. 술기운 때문에 말투는 평소보다 느릿했다.
“맞아요. 요즘 그거 제가 꾸준히 실천 중이잖아요.”
해승의 입가에도 모호한 웃음이 걸렸다. 다정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유혹적으로 느껴지는 미소였다.
길고 곧은 손끝이 희윤의 볼에 닿았다. 불긋한 살갗을 쓸어내린 엄지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볼록한 입술을 어루만지자 희윤의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희윤은 그제야 해승이 무슨 말을 한 건지 눈치챈 듯했다.
“어…….”
무어라 한마디 하려 벌린 입술 안으로 엄지가 들어왔다. 딱딱한 아랫니에 닿는 감촉에 희윤이 움찔했다.
꾹 내리눌리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좀 더 입을 벌렸다. 그러느라 발간 혀가 해승의 손을 핥았지만, 희윤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직도?”
희윤은 아니라고 대답도, 고갯짓도 하지 못했다. 다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덕분에 혀에 또 해승의 손가락이 닿았다.
어쩔 줄 몰라 눈을 빠르게 깜빡이려니 해승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불쑥 아름다운 얼굴이 다가왔다.
입 안에 있던 엄지 대신 말랑한 감촉이 입술을 덮쳤다.
“이제 알겠어요?”
몇 번 닿고 떨어지기를, 맞물렸다 비벼지기를 반복하다가 입술을 뗀 해승이 나직이 물었다. 희윤은 아까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고개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쩐지 시야가 흐릿하고 숨은 가쁘고, 몽롱하고 더운 느낌이 들었다.
“잠깐만.”
아무래도 세수 좀 하고 정신을 차려야겠다. 취한 것 같다. 당황한 희윤이 두서없이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
그러나 취기에 다리가 힘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휘청하고 말았다. 당황한 희윤이 두 손을 내저었다.
뭐든 붙잡으려는 건 본능이었다. 손에 단단한 팔이 닿았고, 저도 모르게 꽉 붙들었다. 그러자 머리를 감싼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해승이 어느새 일어서서 희윤을 받쳐 들고 있었다.
“형, 괜찮아요?”
“으응.”
“취하셨나 봐요. 방으로 가요.”
해승은 걱정스럽다는 듯 희윤을 부축했다. 그 정도는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희윤은 그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해승에게 안기다시피 침실로 이동했더니 저를 그대로 침대에 눕히려고 하는 통에 희윤이 재빨리 제동을 걸었다.
“안 돼, 씻어야 해.”
다른 것도 아니고 삼겹살을 구웠다. 머리며 옷이며 냄새가 폴폴 풍기는데 그 상태로 잘 수는 없었다.
“술도 마셨는데……. 냄새나잖아.”
해승은 취한 상태에서도 씻겠다며 애쓰는 희윤을 보다가 웃고 말았다.
“알았어요. 그럼 제가 욕실에 모셔다드릴게요.”
평소라면 아니라고 알아서 하겠다고 했을 희윤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승이 어디를 데려가겠다고 한 건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형, 이대로 들어가면 다 젖잖아요.”
해승의 상냥한 목소리에 욕실 앞에 선 희윤이 제 차림을 내려다봤다.
“그러네.”
희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셔츠로 손을 가져갔다. 오늘따라 단추가 달린 옷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가만 계세요. 제가 할게요. 위험해요.”
해승이 희윤을 말렸다. 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취한 상태인 희윤은 또 그런가 보다 하고 얌전히 해승에게 전부 맡겼다.
톡. 톡.
단추가 풀리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보다 희윤은 긴 손가락이 나긋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형.”
희윤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눈동자가 멍하니 풀려 있었다.
“피곤하시면 제가 할까요?”
‘뭘?’ 하고 물으려다가 희윤은 제가 욕실 앞에 서 있다는 걸 인식하고는 해승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깨달았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됐어! 알아서 할게!”
어쩌다가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됐지. 희윤이 벌게진 얼굴로 얼른 욕실로 도망쳤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린 듯했지만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잘 익은 새우처럼 발갛게 변해 있는 게 보였다. 희윤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얼른 열을 식히기 위해 샤워기 아래에 섰다.
차가운 물을 맞는 머릿속으로 해승의 말이 쏟아져 들어왔다. 각인에 성공하는 방법. 교감을 높일 것. 그러기 위해서는 요즘처럼 자주 깊은 접촉을 할 것.
“악!”
희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삼켰다.
* *
해승의 시선이 제 옆에서 두 뼘은 떨어진 희윤에게 가 닿았다. 희윤은 해승과 닿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어제 좀 짓궂긴 했지.’
술을 마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물기가 어룽거리는 눈동자에서 사랑스러움과 애처로움이 같이 묻어 나와 해승을 유혹했다.
어제는 결국 욕실을 나온 희윤을 침대로 안고 가서는 조금 더 노골적이고 집요하게 굴고 말았다.
힘들다고 그만해 달라고 애원하는 눈물진 얼굴을 보니 끝까지 가지 않으려는 마음을 다스리는 게 정말 고역이었다. 만약 희윤이 더 버티지 못하고 잠들지 않았다면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이따 봐.”
상념에 빠진 해승의 귀에 희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승은 무의식중에 소리가 들린 방향을 봤다.
언제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는지 희윤이 이때다 싶은 얼굴로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손까지 팔랑팔랑 흔드는 게 어지간히 저를 보내고 싶어 하는 듯했다.
“네, 형. 이따 봐요.”
해승은 희윤을 일단 얌전히 보내 주기로 했다. 물론 그냥 물러서지는 않았다.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춘 해승이 순식간에 달아오른 희윤의 귀를 손으로 한 번 문지르고 밖으로 나왔다.
‘얼른 각인하고 싶다.’
그 전에 전담부터 해야 하지만,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해승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그저 해승은 희윤과 하루빨리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진 해승이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띠었다. 그대로 막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였다.
“표해승 가이드, 잠시 얘기 좀 할까요?”
해승은 제 앞을 막아선 정소한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까딱였다.
“왜?”
“잠시만 시간 좀 내요.”
이유를 물었건만 정소한은 무조건 둘만 있어야 말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물론 해승은 그 제안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하……. 최관우 에스퍼 관련하여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럽니다.”
해승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으니 정소한이 결국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누가 대화 내용을 들을까 주변을 살폈다. 희윤이 아니라 최관우 때문이라는 말에 해승은 곧장 몸을 돌렸다.
어제 최관우는 정소한과 매칭 테스트를 하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나쁘지 않은 소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정소한이 출근하는 절 막아서고 그와 관련된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하는 걸 보니, 잘하면 귀찮은 둘을 한 번에 처리할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해승도 그제야 움직일 마음이 생겼다.
“얼마든지.”
해승이 승낙하자 정소한이 먼저 걷기 시작했다. 해승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옮긴 장소는 옥상 정원이었다. 그나마도 일부러 가지 않으면 발길이 닿지 않을 가장 외진 곳이었다.
어차피 출근 시간대라 올 사람도 없는데 어지간히 조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해승은 순순히 정소한의 뒤를 따랐다.
“말해.”
물론 정소한에게 오랜 시간을 할애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해승의 재촉에도 정소한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할 말 없으면 가고.”
짧은 인내심은 금세 바닥났다.
“최관우 에스퍼는……!”
해승이 당장 떠날 듯 몸을 돌리는 걸 본 정소한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간 제대로 된 담당 가이드가 없었다고 하던데요. 가장 오래 담당을 맺은 게 반년이 채 안 되고.”
“그런데?”
해승은 말해 보라는 듯 그 상태로 눈짓했다.
“표해승 가이드는 최관우 에스퍼와 임시긴 해도 담당 맺어 봤잖아요. 어땠어요? 성격은? 실적은?”
해승의 눈썹이 까딱했다. 정소한이 최관우와의 매칭 테스트에 신경 쓰는 게 의외로웠기 때문이었다.
“의외네?”
정말로. 사실 해승은 정소한이 최관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담당 에스퍼들을 봐도 대부분 희윤처럼 차분한 스타일이었으니까.
최관우는 능글스러운 면과 약간 불량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정소한이 선호하는 에스퍼들과는 다소 떨어진 감이 있었다.
“네?”
“아니. 그래서?”
뭐 아무렴 어떤가. 관심을 보이는 건 그만큼 호감이 있다는 뜻이었다. 둘이 잘되길 바라는 해승에겐 얼마든 좋은 소리를 해 줄 의향이 넘쳤다.
“흠흠. 그냥 평소 보아 온 최관우 에스퍼가 어땠는지 알려 주면 고맙겠어요.”
질문하며 정소한은 누가 오지도 않을 외진 곳을 또 쓱 살펴보았다. 정말 어지간히 소문에 신경을 쓰는 모양새였다.
어차피 곧 희윤과 자신이 각인을 시도할 거라는 얘기가 퍼져 둘의 매칭 테스트는 주목도 못 받을 텐데.
“매너 있지. 배려할 줄도 알고.”
냉소하면서도 해승이 대꾸했다.
“그래요?”
아니, 전혀. 그런데 그런 척하는 게 최관우의 특기였다. 실실 웃으면서 행동하는 모습이 가볍긴 해도 상대방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인사도 잘하고, 말도 잘 걸고 하니 오해할 수밖에. 그런데 헤어지고 나서 최관우에게 조금 전 누구냐 물으면 대답은?
‘몰라?’
그게 끝이다. 상대가 누군지 기억도 못 하고, 무슨 말을 나눴는지도 그 머릿속엔 없다. 그나마 요즘 최관우가 정소한을 기억하는 건, 제게 필요한 존재라고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네. 걱정할 것 없어요.”
최관우의 예상대로 정말 정소한과 매칭률이 잘 나온다면.
“꽤 잘해 줄 겁니다.”
해승이 생긋 웃었다. 그게 비록 진심이 아니라도 알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쪽도 목적한 게 있어서 그런 걸 테니까.
그런데 기껏 좋은 소리를 해 줬는데도 정소한은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 밤에는 제멋대로 구는…… 아!”
혼자 뭘 생각하는지 중얼거리던 정소한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여기 해승도 같이 있다는 걸 떠올린 듯했다.
“아뇨, 그렇군요. 알겠어요. 도움 줘서 고맙습니다. 표해승 가이드.”
심지어 얼른 상황을 정리해 해승을 보내려고 시도했다. 해승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정소한을 살폈다.
밤, 제멋대로.
두 가지 단어가 가진 의미를 어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하.”
어쩐지 최관우가 모처럼 적극적으로 매칭 테스트를 할 생각을 했나 했더니. 아무래도 이미 밤에 정소한과의 상성을 맞춰 본 듯했다. 해승의 감탄사에 순간 정소한이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본 해승의 입술에 미소가 그어졌다. 귀찮은 방해꾼을 손쉽게 치울 방법이 생겼다는 확신이 들었다.
“잘해 봐요.”
그랬기에 평소에는 잘 하지 않을 응원도 해 주었다. 물론 미소나 말투와 달리 눈빛은 시큰둥했지만.
용건이 끝난 해승이 자리를 비우고서도 정소한은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한참 그곳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