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85)

희윤과 해승이 본격적으로 각인 작업에 들어가면서 본부가 떠들썩해졌다. 두 사람이 출근하자마자 의료 센터에서 함께 이런저런 검사를 받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여러 번 목격되면서 의혹은 차츰 확신으로 굳어 갔다.

그리고 그 확신에 쐐기를 박은 건 점심시간 직전 홈페이지에 게시된 두 사람이 전담으로 변경되었다는 알림 글이었다.

원칙적으로 에스퍼와 가이드가 전담되려면 담당 매칭 후 1년이 지나야 했다. 단, 지부장과 간부 전원이 승인한다면 즉시 전담을 맡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부 내에서 그렇게 진행한 경우는 없었다. 희윤과 해승이 최초였다.

“희윤 씨! 잠깐 나 좀 봐!”

“선배? 여긴 어떻게…….”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갈 때쯤 사무실로 돌아왔던 희윤은 안효정에게 낚여 그대로 휴게실로 끌려갔다.

“말해 봐. 진짜 표해승이랑 각인하려고 준비 중이야?”

안효정이 얼른 대답하라며 희윤을 재촉했다. 희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지금 검사받고 결과 기다리는 중이에요.”

“아니, 어쩌다가…….”

안효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까지 떨었다.

“대체 왜 그랬어? 혹시 표해승이 밀어붙인 거야?”

그 물음에 희윤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하겠다고 결정한 거예요. 선배는 각인할 생각 해 본 적 없으세요?”

무어라 말하려던 안효정이 희윤의 질문에 입술을 꾹 눌렀다. 조금 고민을 하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없긴, 몇 번이나 했지.”

안효정과 그의 가이드는 연인이었고, 전담까지 맺은 사이였다. 그러니 각인을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희윤 씨도 알겠지만, 각인이 쉽지 않잖아.”

“네. 매칭률, 상성뿐 아니라 두 사람의 교감 정도나 그 외 여러 외부 요인으로도 성공 여부가 달라진다더라고요.”

“응, 그런 것도 있고.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지.”

“각인 실패요?”

희윤이 실패까지도 생각한 게 의외였던지 안효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도 감안한 거야?”

“네. 지부장님께서 그 부분도 고민해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도 진행하겠다는 거지?”

왜 저런 표정을 할까. 희윤은 도리어 복잡한 눈을 한 안효정이 더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각인 도전이 그녀에게 꽤 큰 고민거리를 안긴 듯해서였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하……. 희윤 씨는 표해승 가이드랑 사귀는 사이잖아.”

“네, 그렇죠.”

희윤이 망설이지도 않고 즉답하자, 안효정은 복잡한 눈으로 웃었다.

“각인이 실패한 에스퍼와 가이드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

희윤은 익명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을 상기해 봤다. 성공담이나 실패담에 관해서는 거의 정보가 없었다.

성공담은 성공 확률이 낮아서고, 실패담은 아마도 상처로 남았기에 그런 게 아닌지 짐작했을 뿐이었다.

“각인에 실패한 에스퍼와 가이드는 거의 전담을 종료해.”

희윤에게 별다른 답이 없자 안효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만약 사귀는 사이면 깨지는 경우가 많더라고. 난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어 못 하는 거야.”

비겁한 소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효정은 제 가이드이자 연인인 상대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지금처럼 전담으로 남는 게 나았다.

“음…….”

희윤은 어두워진 안효정의 안색을 보며 말을 골랐다. 말주변이 없어 이럴 땐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선배, 혹시 주변에 각인 도전하는 분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그랬기에 어설프게 안효정을 달래기보다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각인에 도전하는 커플?”

“네. 경험담을 좀 듣고 싶어서요.”

“하긴 그게 더 도움이 되긴 하겠다. 중앙 지부에 몇 있어요. 희윤 씨도 본 적 있죠? 물 속성 쌍둥이 에스퍼.”

“아, 네네.”

희윤은 발랄하게 인사하던 자매 에스퍼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민효진 에스퍼는 현재 중단 중이긴 하지만, 만나 달라고 하면 흔쾌히 받아 줄 거예요.”

“중단요?”

“응. 가이드가 잠시만 시간을 갖자고 했다나 봐요. 그래서 좀 쉬었다가 다시 한다던데.”

안효정은 그 외에도 본인이 아는 커플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대부분 희윤으로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부산에 있다는 각인 커플은 거리가 멀어 만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각인을 시도하기 전에 만나 볼 사람은 쌍둥이 에스퍼 정도가 될 듯했다.

“사실 다들 근성이라기보단 미련이고 욕심이죠. 전담까지 해 놓고 각인을 도전했는데 실패했다고 해 봐요.”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고 몇 년째 질질 끌다가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끝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며 안효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곧장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안효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희윤 씨. 두 사람 다 지금 시간 괜찮다는데 말 나온 김에 만나 볼래요?”

“지금요?”

“네. 아, 바쁜 일 있으면 미뤄도 되고요.”

“아뇨. 없어요. 좋아요.”

“그래요. 그럼 바로 가요.”

안효정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윤도 얼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둘은 1층 로비 카페에서 쌍둥이 에스퍼와 만났다.

“처음 각인 시도를 할 때 주의할 사항 있어?”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 후, 안효정이 희윤을 대신해서 질문했다.

“주의할 점이라…….”

민효련이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첫 도전에 가장 필요한 건 분위기를 만드는 거예요.”

“분위기?”

“네. 이게 뭐 딱 어떻게 해야 한다 이런 건 없지만, 어쨌든 둘이 깊은 관계를 해야 하잖아요.”

깊은 관계라는 말에 희윤의 눈동자가 잠시 떨렸다. 그런 동요를 알아채지 못한 채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이왕이면 조명은 좀 어둡게 한다거나 잔잔한 음악을 튼다거나 침실에 가기 전 술을 한잔하면서 대화한다거나.

그런 얘기를 듣다 보니 어쩐지 해승과 처음 여름휴가를 갔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분위기가 딱 그랬다.

“그거 되게 신혼 첫 밤 같은 소리다.”

안효정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웃음기 띤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신혼이라니.’

희윤은 다시 또 휴가를 떠올리며 혼자 속으로 웃었다.

“맞아요. 딱 그런 거지. 설레고 긴장되고 어떻게든 잘하고 싶은 그런 거!”

쌍둥이 에스퍼도 동감한다며 시원스럽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대화는 수위 높은 주제로 넘어가 버렸다.

희윤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세 사람은 그 모습에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더욱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

“두 사람 각인 시도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낯 뜨거운 이야기가 지나고 난 후 잠시 숨을 고른 안효정이 물었다. 조금 전과 달리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난 더 할 수 있었는데 내 가이드가 중단하자고 했어요.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크다고요.”

“아무래도 자꾸만 실패하니까 자존감도 떨어지게 되고, 죄책감도 쌓이다 보니 우울증도 생기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같이 심리 상담 센터에 다니고 있어요.”

쌍둥이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말했다. 민효진은 가이드가 각인을 중단한 상태였고, 민효련은 둘이 협의하게 잠시 각인 시도를 멈추고 상담을 받는다고.

“그럼 다시 하실 건가요?”

이번엔 희윤이 질문했다. 상담을 받는다는 민효련은 침묵했고, 가이드가 쉬고 있다는 민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제 가이드도 원하고 있고요. 다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저도요. 후회하지 않아요.”

쌍둥이 에스퍼들과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희윤에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만남이었다.

안효정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조사팀으로 돌아오니, 희윤의 책상에 커피가 놓여 있었다. 얼음이 다 녹아 바닥이 물기로 흥건했다.

아무래도 두고 간 지 시간이 제법 지난 듯했다.

‘누가 두고 간 거지?’

고개를 갸웃하며 커피를 드니 포스트잇이 달려 있었다.

일 적당히 하고, 이따 봐요.

누구라고 적혀 있진 않았지만, 희윤은 바로 알아챘다. 해승이었다.

“뭐야…….”

메시지라도 남겨 두지. 희윤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메신저 앱을 열어 봤다. 하지만 해승에게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나 : 웬 커피야?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오후 2:46]

[해승 : 얼굴 보려고 잠깐 들렀었어요. 이제 확인한 거예요? 싱거워졌겠다. 오후 2:46]

해승에게 곧장 답이 돌아왔다.

[해승 : 어쩔 수 없네. 지금 다시 가져갈까요? 오후 2:47]

절 보러 오겠다는 노골적인 작업에 희윤은 웃고 말았다.

* *

며칠 후 희윤은 출근하자마자 지부장에게 의료 센터로 오라는 호출을 받고 조사팀을 나섰다. 적합도 및 심리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이유였다.

“형!”

멍하니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해승이 웃으며 서 있었다.

희윤은 홀린 듯 그리로 다가갔다. 그러다 완전히 가까워지기 전 덜컥 걸음을 멈췄다. 해승이 빙긋 웃더니 성큼 거리를 좁히며 희윤의 어깨에 팔을 턱 올렸다.

희윤이 움찔하는 게 피부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대로 팔을 아래로 내려서 곧은 등에 손을 댔다.

“뭘 그렇게 어색해해요?”

이제는 슬슬 알은체해도 되겠지 생각한 해승이 웃음기 띤 목소리로 물었다. 희윤은 제 등에 닿은 손길에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가 뭘.”

“어젯밤은 죄송해요.”

애써 괜찮은 척했건만. 해승은 희윤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나 보다. 기어이 뜨거웠던 밤을 떠올려 버린 희윤이 해승을 흘겨봤다.

처음에야 교감이 어쩌고 하면서 핑계라도 댔지, 이제는 그냥 눈만 마주치고 분위기가 좀 변했다 싶으면 끌려가기 일쑤였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겠는데…….’

희윤의 시선이 힐끔 엘리베이터 거울로 향했다. 거의 턱 바로 아래까지 옷깃이 올라와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는 어제 해승이 잔뜩 씹어놓은 자국으로 가득했다. 해승은 저를 잔뜩 의식하는 희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쪽.

입술이 짧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고작 가벼운 키스일 뿐인데, 희윤이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얼굴색도 토마토처럼 빨갛게 변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까지 결국 희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 뒤를 해승이 빙글빙글 웃으며 쫓았다.

“이쪽으로 앉아요.”

지부장이 검사실 안으로 들어오는 희윤과 해승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옆에는 연구원이 앉아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 왔다.

두 사람 앞 테이블에는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아마 결과지인 듯했다.

“연구원에게 연락받고 오자마자 곧바로 두 사람을 불렀어요. 나 못지않게 궁금해할 것 같아서.”

곧 소파로 와 앉은 지부장이 봉투 끝을 손으로 잡으며 씩 웃었다. 희윤의 시선은 지부장 손끝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찌이익.

봉투 끝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지부장이 안에 들어 있는 서류를 꺼내었다. 여러 장 겹쳐 있는 듯 종이 뭉치가 제법 두툼했다.

“뭘 그렇게 꾸물거려. 이리 줘요.”

해승이 눈썹을 찌푸리며 지부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허. 기다려 봐.”

지부장은 행여 서류를 빼앗길까 봐 소파 등받이에 바짝 몸을 기대었다.

“어디 보자.”

그러더니 짐짓 심각한 눈으로 검사지를 훑기 시작했다. 희윤은 조금 긴장한 채 지부장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점차 지부장의 표정이 달라졌다. 좀 더 진지해졌고, 눈빛도 차분하게 변했다.

설마 결과가 좋지 않은 걸까.

“흠…….”

지부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희윤의 걱정은 더 커졌다.

“빨리 말해요.”

해승이 다시금 재촉하고 나서야 지부장이 느릿하게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음, 결과가 말이지.”

지부장이 다시금 서류로 눈을 내렸다가 옆에 앉은 연구원을 봤다가 마지막으로 희윤과 마주했다.

“너무 좋네. 성공 예상률이 89%야.”

긴장이 탁 풀린 희윤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을 뭐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해요. 형 놀랐잖아요.”

희윤의 허리에 팔을 감고, 반쯤 몸을 기댄 해승이 삐딱하게 지부장을 바라봤다. 그러나 말과 달리 별로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물론 검사 결과가 좋게 나와도 성공을 확신할 수는 없어요.”

지부장이 서류를 희윤과 해승 앞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각인이 검사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의외로 그렇게 된 경우가 많지 않거든요.”

희윤은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보기 좋게 펼쳐준 덕분에 마지막 결과만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부장이 말한 대로였다.

적합도 검사 결과 에스퍼와 가이드의 각인 성공 예상률은 89%로 집계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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