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85)

다음 날 점심때가 가까운 시간. 희윤과 해승은 나란히 서울역사에 들어섰다. 20인치 캐리어 두 개는 전부 해승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하아, 하. 기차 시간, 하…… 늦지 않았지?”

희윤이 땀으로 촉촉해진 이마를 훑으며 시간표를 확인했다. 출발 시간은 아직 10분이 남아 있었다.

“8번 플랫폼이네, 가자.”

기차가 대기 중인 플랫폼까지 야무지게 확인한 희윤이 해승을 돌아봤다. 피곤해 보이는 저와 달리 해승은 평소처럼 얼굴에서 빛이 났다.

본래는 어젯밤 짐을 싸자마자 부산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별장 관리인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며 내일 오십사 부탁을 해 와 일정이 미뤄진 것이었다.

희윤은 그 말을 들었을 때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쉬워하던 해승이 그대로 희윤을 끌고 침대로 직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늦은 밤, 아니 거의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 해승은 희윤이 녹은 버터처럼 흐물흐물해지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덕분에 희윤은 해가 한창 떠오른 늦은 오전이 되고서야 간신히 눈을 떴고, 비몽사몽 하는 사이 해승에게 씻겨지고 옷을 입혀진 채 차에 올라 서울역으로 이동되었다.

“피곤해요?”

해승이 걱정스러워하는 눈으로 희윤의 뺨을 쓸었다. 희윤은 손등이 닿은 눈매를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반응에 해승의 입꼬리가 슬며시 곡선을 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용기 준비해 두라고 할 걸 그랬어요.”

“됐어. 그럼 또 한참 지연되잖아.”

무엇보다 희윤은 해승과의 기차 여행 자체에 기대감이 컸다

“여기 예전이랑 달라진 것 같아.”

그쯤에서 희윤이 적당히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물론 정말로 서울역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그래요?”

“응.”

희윤은 과거 아버지에게 이끌려 이곳에 왔었다. 이혼이 결정된 후 그를 맡아 줄 할머니 집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땐 크고 널찍한 공간이 참으로 막막했고 길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아마 당시에 심리적으로 불안정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엄청나게 밝고 에너지 넘치는 곳이구나.”

그런데 다시 마주한 서울역은 환하고 활기찼다. 사람도 많고 말소리도 시끄럽지만, 희윤에겐 전부 들뜨고 즐거운 모습들처럼 보였다.

“전 여기도 형이랑 처음인데.”

주변을 신기하게 두리번거리던 희윤의 시선이 해승에게로 가 닿았다. 입술을 삐쭉이는 게 심통 맞아 보이기보단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아……. 여행으로는 나도 처음이야.”

저와 모든 걸 다 처음으로 해 봐야 한다는 듯 말하다니. 이럴 때마다 희윤은 해승이 저보다 어리다는 걸 실감했다.

“언제 왔었는데요?”

“13살에.”

“왜요?”

“할머니 댁에 가느라고.”

해승은 그 말에 희윤이 과거에 왜 여기에 왔는지 알아차렸다. 그의 눈동자가 단번에 어둑해졌다. 그러다 털어 내듯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은 기억도 아니네요. 그런 건 잊어버려요. 오늘 저랑 부산 여행 가는 게 처음이라고 생각해요.”

마치 꼭 그래야 한다는 듯 해승이 희윤의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희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미 과거 대신 오늘이 기억을 차지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손을 마주 잡은 채 두 사람은 플랫폼으로 내려가 대기 중인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좌석은 비행기보다는 좁은 편이었지만, 널찍하게 뚫린 창 너머로 풍경이 보이는 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동은 순조로웠다. 희윤은 다른 사람이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해승과 대화를 나누다가 요란한 진동에 놀라 스마트폰을 얼른 확인해 봤다.

평소 거의 울릴 일 없는 조사팀 그룹채팅방에 연신 메시지가 전투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김동민 에스퍼 : 지금 가이드 층 난리가 난 이유가 정소한 가이드 때문이라고요. 오후 2:13]

대화를 주도하는 건 염동력 속성 에스퍼 김동수였다.

[김동수 에스퍼 : 거기 난입한 충남지부 에스퍼가 전에 정소한 가이드 담당 에스퍼였대요. 왜 그 삼각관계 주인공들. 그런데 하필 최관우 에스퍼가 있는 자리에 나타나서 정소한 가이드와의 관계를 폭로한 거죠. 둘이 원래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오후 2:13]

그런데 그 내용이 정소한과 관련된 거라 희윤은 금세 눈을 뗄 수 없었다.

“희윤 형? 왜 그래요?”

해승의 질문에 희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해승은 희윤의 당황한 눈빛에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김동민 에스퍼 : 뭘 모른 척해요? 둘이 거의 매일 숙박 시설에 가는 걸 목격한 사람이 몇인데. 그 얘기를 최관우 에스퍼 있는 자리에서 떠벌떠벌 떠들었다고요. 오후 2:14]

아직도 그룹채팅방에는 메시지가 빠르게 올라가는 중이었다. 내용은 정소한을 찾아온 충남지부 에스퍼와 최관우, 세 사람의 삼자대면 얘기였다.

“아하.”

무슨 상황인지 금방 알아챈 해승이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아무래도 최관우가 제 충고를 잘 알아들은 듯했다.

곧 해승은 관심 없는 눈으로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뗐다. 때마침 기차도 막 부산역 플랫폼에 멈추어 서고 있었다.

“형, 도착했어요. 이만 내릴까요?”

그룹채팅방에 올라오는 정신없는 메시지에 신경 쓰느라 기차가 멈춘 줄도 몰랐던 희윤이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아, 그러네. 언제 왔지.”

“조금 전에요.”

해승이 웃으며 얼떨떨해하는 희윤의 뺨을 손등으로 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볼을 만지는 손길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희윤은 조금 전 무슨 일이 발생했었는지 인식하지도 못했다.

“가요, 형.”

해승은 이번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희윤의 손을 붙잡아 이끌었다. 객차 내가 부산스러웠던 탓에 누구도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이동하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짐 보관대에 둔 캐리어 두 개를 해승은 당연한 것처럼 제가 전부 들려고 했다.

“하나 이리 줘.”

“됐어요. 안 무거워요.”

“그러니까 줘.”

무겁든 아니든 상관없이 제 짐을 해승이 자꾸 챙기려 드는 게 희윤으로서는 적응이 안 됐다. 무엇보다 힘에 있어서는 에스퍼인 자신이 일반인에 가까운 해승보다는 좋으니 오히려 이쪽이 두 개를 드는 게 더 맞지 않겠는가.

“그냥 제가 들고 싶어서 그래요.”

하지만 해승은 웃으며 캐리어 주는 걸 거절했다. 실랑이는 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아직 제 짐을 챙기지 못한 손님들이 얼른 비키라는 눈짓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희윤은 결국 빈손을 어색하게 쥐었다가 폈다가 하며 해승의 뒤를 졸졸 따라가야 했다. 해승은 저를 얌전히 따라오는 희윤을 힐끗 돌아보고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해승 도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산역 건물을 벗어나 막 광장에 내려서는데 뒤에서 해승을 알은체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았더니 7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푸른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서 있었다.

“박 기사, 정말 오랜만에 보네.”

해승이 남자를 보며 친근하게 반응을 보였다.

“가만있어 보자…… 햇수로 벌써 8년 만이네요. 이렇게 멋지고 아름답게 성장하셨다니 감개무량합니다.”

박 기사가 아까보다 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희윤은 신기한 눈으로 박 기사를 보았다.

그간 해승을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족을 반색하며 맞이한 게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형. 이쪽은 박 기사라고 예전에 엄마 차 운전하던 분이야. 경력만 무려 20년이 넘는 베테랑이지. 지금은 부산 별장을 관리하고 계셔.”

어제 해승이 통화를 했던 상대가 박 기사라는 걸 알게 된 희윤이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연희윤입니다.”

해승은 이번엔 박 기사에게 희윤을 소개했다.

“박 기사, 이쪽은 내 에스퍼 희윤 형.”

박 기사도 황송하다는 얼굴로 얼른 허리를 접었다. 해승의 어머니에게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태도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중했다.

“어이쿠.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연희윤 에스퍼. 사모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아주 훌륭하고 대단한 분이시라고요. 전 그저 박 기사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박 기사, 그런 거 하지 마. 희윤 형 민망해하니까.”

곁에 있던 해승이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는 희윤 대신 한마디 했다.

“하하,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러자 박 기사가 껄껄 웃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짐은 제게 주세요.”

“아뇨. 알아서 들고 갈게요.”

저보다 연배도 높은 분께 캐리어를 맡길 생각이 없는 희윤이 얼른 거절했다. 박 기사는 잠시 당황한 듯 해승을 봤다가, 해승이 고개를 젓자 ‘어쩔 수 없지.’ 하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차는 부산역 아래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별장까지는 여기서 차로 1시간 정도 걸립니다.”

뒷좌석에 희윤과 나란히 앉아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은 해승이 박 기사에게 말했다.

“중간에 식사도 할 겸 해운대 들렀다 가죠.”

“아, 그러시겠습니까?”

박 기사가 그 소리에 반색했다.

“하긴 부산에 오셨으면 해운대는 먼저 봐야지요. 그럼 해변이 잘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경로가 정해지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부산의 풍경은 서울과 같은 대도시인데도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서울이 빽빽하고 숨 막히는 느낌이라면, 부산은 똑같이 복잡한 듯해도 어딘지 모르게 좀 더 여유가 느껴졌다.

“바다다.”

어쩌면 그건 이렇게 바다를 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희윤이 작게 탄성을 흘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형, 진짜 좋아하네.”

옆에 앉은 해승이 웃음기 어린 투로 말했다. 그리고 손을 올려 흐트러진 희윤의 갈색 머리칼을 살살 쓸었다.

괜히 간질간질한 기분에 희윤의 귀 끝이 살짝 달아올랐다.

해운대에 도착한 둘은 널찍한 백사장을 따라 걸었다. 현대식 건물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해마리 해수욕장이나 해승과 갔던 개인 섬과는 또 달랐다.

“이거 봐.”

희윤이 휙 돌아서서 어딘가를 가리켰다. 해승은 그 손끝을 따라가다가 조형물을 발견했다. 해운대라고 적힌 빨간색 스카시 간판이었다.

“예쁘지?”

딱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희윤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 예쁘네요.”

인공 조형물이 아니라 그 옆에서 반짝반짝 웃고 있는 희윤을 보고 한 말이었다. 해승은 망설임 없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실행했다.

그러고는 희윤이 뭘 하느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모습을 그대로 사진으로 담았다.

“야. 찍을 거면 말을 해야지.”

희윤은 갑작스러운 셔터 소리에 당황해 눈을 찡그렸다. 해승의 카메라에는 그 모습도 고스란히 남았다.

“두 분 같이 찍으시죠.”

있는 듯 없는 듯 둘을 따라다니던 박 기사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그제야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챈 희윤은 민망해했고, 해승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스마트폰을 박 기사에게 건넸다.

“형.”

해승이 희윤의 손을 붙잡고 조형물 앞에 섰다. 그러다가 손을 놓고 대신 허리에 팔을 감았다. 아까보다 더 친밀한 행동에 박 기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사실 어젯밤 사모님과 통화했다. 해승이 별장에 며칠 묵을 거라는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사모님은 의외의 말을 했다.

‘박 기사님,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각별하게 신경 써 주세요. 특히 연희윤 에스퍼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니까 더 잘 챙겨 주시고요. 잘 부탁드려요.’

사모님은 본래도 다정다감한 사람인데, 유독 해승의 에스퍼에게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단순히 희윤이 해승의 에스퍼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두 분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평생 이능력자라고는 해승만 알아 온 박 기사였다. 그나마도 해승에게 에스퍼가 배정되지 않아 고생한다는 말만 들어 왔기에 희윤의 존재가 마찬가지로 반가웠다.

그래서 이런 말이 저도 모르게 나갔다.

“그럼요. 제 에스퍼인데요.”

해승이 활짝 웃었다. 희윤의 어깨에 팔을 얹은 표정이 평소보다 더 해사하니 밝았다. 반대로 희윤은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눈만 도로로 굴렸다.

그 모습이 ‘찰칵.’ 소리와 함께 사진으로 남았다.

해운대 해변을 조금 걷다가 바다가 잘 보이는 해산물 전문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을 먹었다. 박 기사도 함께하자고 했지만, 먼저 먹었다며 극구 사양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식사 후에는 소화해야 한다는 핑계로 청사포까지 이어진 해변 열차를 탔다. 희윤은 내내 즐거워했고, 그런 희윤을 지켜보는 해승의 얼굴도 계속 밝았다.

마침내 별장에 도착했을 땐 막 해가 저무는 이른 저녁이었다. 흰 자갈길을 달리던 차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이 보이는 공터에 멈추어 섰다.

“공기가 상쾌하네.”

차에서 내린 희윤이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2층으로 된 목조 건물은 숲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를 냈다.

“그러게요.”

뒤따라 밖으로 나온 해승이 희윤의 어깨를 끌어 제게 착 붙였다.

“너도 처음이야?”

“음, 아주 어렸을 적에 한 번 왔었다고는 하는데 기억엔 없어요.”

아마 7, 8살 때쯤인 것 같다고 해승이 말을 덧붙였다. 그때라면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을 만했다.

“해승 도련님이 가이드로 각성하기 전까진 자주 오셨었습니다. 사모님이 이곳을 좋아하셨거든요.”

트렁크에서 짐을 내려놓던 박 기사가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희윤이 그러느냐는 시선을 보내오자 박 기사는 냉큼 이어 말했다.

“도련님은 이곳에 오시면 항상 저쪽 바닷가로 가곤 하셨어요. 도련님이 가지고 놀던 모래 놀이 세트는 지금도 있습니다.”

그 말에 희윤이 눈을 빛냈다.

“해승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요?”

그런 건 또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않은가. 박 기사는 희윤이 관심을 보이자 냉큼 보여 주겠다면서 먼저 앞장섰다.

어쩐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죽이 잘 맞는 듯한 두 사람을 보며 해승은 옅게 웃었다.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