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한 연락이 온 건 희윤과 해승이 저녁을 먹고 밤 산책을 할까 영화를 볼까, 하며 의견을 나눌 때였다.
- 도련님! 해승 도련님! 도와주십시오!
음식을 차려 주고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며 돌아갔던 박 기사가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야?”
- 하영이가……. 제 손녀가 실종되었습니다. 그런데…….
박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서울에 살던 둘째 딸 내외가 늦은 휴가를 맞춰 고향에 내려왔다고.
그 가족은 바닷가 근처 캠핑장에서 있었는데, 그곳에 갑작스럽게 괴물체가 나타났다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괴물체는 순식간에 캠핑장을 풍비박산 내더니 박 기사의 손녀를 비롯해 몇몇을 꼬리로 낚아채 끌고 갔다고 한다.
- 도와주십시오. 제발, 도련님……!
박 기사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는 희윤에게까지 똑똑히 들렸다.
“부산 본부에서 파견 안 갔어?”
하지만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몸을 들썩인 희윤과 달리 해승은 침착했다.
- 오, 오셨습니다. 지금 현장을 답사하고 있는데…… 아직 어디로 은신했는지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거기다 괴물체가 더 출몰할지 몰라 당장 추격은 어렵다고 하고요.
아마 현장 조사를 먼저 진행한 후 수색조를 꾸리려는 것일 거다. 하지만 손녀의 생사를 알 수 없는 박 기사는 그 시간마저 기다릴 수 없었을 터.
“해승아.”
판단을 마친 희윤이 해승을 불렀다.
“형, 잠시만요.”
희윤과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무슨 말이 나올지 알아챈 해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박 기사, 원칙적으로 우리가 나설 수는 없어. 여긴 부산 본부 관할이라, 서울 소속인 우리가 끼어들면 월권이 될 수 있거든.”
야속할 정도로 해승의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눈빛이 평소보다 어두워 희윤은 해승 역시 박 기사의 가족들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 도련님.
박 기사가 절박하게 해승을 불렀다.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제 손녀를 살려 달라고 외치는 박 기사를 희윤은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가는 거라면 괜찮잖아. 주변만 둘러보자.”
“안 돼요. 그러다 형이 에스퍼인 게 알려지면 본부도 곤란해져요.”
해승은 단호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각인을 위해서 휴가를 낸 상황이었다. 이런 때 괴물체 사건까지 휘말리면 더욱 복잡해졌다.
“일단 현장에라도 가 보자.”
그러나 희윤도 그냥 물러서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린아이가 괴물체에 끌려갔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냥 찾아보기만 할게.”
희윤의 끈질긴 설득에 해승이 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희윤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알았어요. 가서 현장 상황만 보는 거예요.”
-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연희윤 에스퍼. 지금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직 통화가 연결된 상태였기에 해승의 결정은 곧장 박 기사에게도 전해졌다. 희윤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해승은 못마땅한 듯했지만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별장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라이트를 번쩍거리며 자동차 한 대가 달려왔다.
“도련님! 연희윤 에스퍼!”
급정거하듯 차를 세운 박 기사가 헐레벌떡 차에서 뛰쳐나왔다.
“가요.”
박 기사가 뒷좌석으로 돌아가기도 전 해승이 손잡이를 당겨 차 문을 열었다. 희윤을 먼저 안에 들여보낸 해승이 곧장 따라 탔다.
“박 기사, 뭐해요. 안 급해요?”
뒤늦게 차 앞으로 다가온 박 기사가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운전석으로 뛰어갔다.
별장에서 캠핑장까지는 다행히 거리가 멀지 않았다. 조명을 환히 켜 놓아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부산 본부에서 출동 나온 에스퍼와 가이드들, 구경꾼, 소식을 듣고 나타난 기자 여럿에 인플루언서들로 주변이 북적거렸다.
“저, 저쪽으로 사라졌습니다.”
박 기사가 바닷가 한쪽을 가리켰다. 커다란 바위와 툭 튀어나온 절벽이 보였다. 하필이면 조명도 없는 곳이라 이쪽과 대비되어 더 어둡고 음습하게 느껴졌다.
“넌 여기 있어.”
희윤이 옆을 돌아보다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쩐지 해승이 무슨 말을 할지 알 듯했다.
“위험하잖아. 주변만 살펴보고 올게.”
곧바로 이어진 말에 해승의 얼굴이 단숨에 찌푸려졌다.
“형.”
“혹시 모르잖아.”
만약 괴물체가 등장하면 에스퍼인 희윤은 재빠르게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해승은 다르다. 그가 아무리 특수 훈련을 받았다고는 해도 괴물체만큼 빠르게 대처하지는 못할 터.
차라리 살상용 무기를 쓸 수 있으면 모를까.
해승은 제 품에 있는 마취총에 손을 얹었다. 고작 방어를 위해서 만들어진 거라 사실상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거다.
무엇보다 희윤이나 저나 박 기사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그저 주변을 탐색하러 왔다고 말하려면 절대 괴물체를 상대해서는 안 됐다.
“금방 다녀올게.”
희윤이 해승을 달래듯 팔을 도닥였다. 해승은 그 다정한 손길을 못마땅하게 보다가 결국 또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희윤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한발 물러서야 했다. 물론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해승은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았다.
“얼른 오세요. 조심하시고요.”
해승이 복잡한 눈으로 희윤의 뺨을 쓸었다. 저녁 바람에 닿은 볼이 차가웠다. 희윤은 괜히 눈을 도로로 굴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녀올게.”
그렇게 희윤이 사라지자마자 해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옆에는 박 기사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연신 누군가에게 연락을 돌리고 있었다.
해승 역시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을 터치했다.
- 어? 표해승? 왜? 무슨 일 났어?
곧 통화가 연결되고 의아하면서도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인사도 아니고, 용건도 아닌 혹시 무슨 사건이라도 터졌냐고 묻는 건 그만큼 해승이 일이 있을 때가 아니면 연락한 적 없었다는 의미였다.
해승이 전화한 상대가 다름 아니라 지부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 헉. 무슨 일? 아니. 너희는 각인하러 가서까지 사고를 친 거야?
짤막한 대답에 기겁한 듯 와르르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해승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사람을 꼭 사고뭉치처럼 생각하는 건지.
- 얼른 말해. 그래야 수습하지. 왜 연희윤 에스퍼가 도저히 못 하겠대?
해승이 대꾸하기도 전 지부장이 또 말을 쏟아 냈다.
- 아니면 더 시간을 달래? 뭐가 됐든 네가 다 양보해.
하는 태도가 꼭 제 자식 걱정하는 부모 같아서 해승은 잠시 어이없어하는 눈빛을 했다. 지부장이 자신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건 알고 있었다.
뭐 사실 그건 해승에게도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었다.
“시도도 못 했으니 그건 걱정 말고요.”
- 뭐? 아예 도전도 못 했다고? 역시 안 되겠대?
한마디를 꺼내면 꼭 두 마디 이상이 돌아온다. 이제 슬슬 짜증이 나 해승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 갔다. 안타깝게도 지부장은 스마트폰 너머에 있었기에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입을 열었다.
- 그래, 뭐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지. 부산까지 간 김에 관광이나…….
“부산에 지금 괴물체 출몰한 거 몰라요? 사람까지 몇 납치해 가고.”
해승에게서 결국 까칠하게 말이 튀어 나갔다.
- 어? 아, 아. 그거. 방금 보고 받긴 했어. 하필이면 초창기 때 괴물체가 나오던 장소랑 가까워서 비상 대응을 해야 하나 고민 중인데…….
중얼중얼 말을 흘리던 지부장이 돌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설마 연희윤 에스퍼랑 거기 있어?
해승의 시선이 다시 희윤이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몇몇 사람들이 이동하는 게 보였다.
아마 부산 본부에서 출동한 에스퍼들인 듯했다. 이제야 현장 조사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괴물체 수색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네. 괴물체에 납치당한 사람들이 있어서 찾아보겠다며 나섰어요.”
- 아니, 연희윤 에스퍼가 거기서 왜 나서. 부산 본부에서 알아서 할 텐데. 넌 안 말리고 뭐 했어?
곧장 지부장이 질책해 왔다. 해승이 기분 나쁜 듯 눈썹을 까딱였다.
“박 기사 손녀가 그 일에 휘말렸다는 얘길 듣고 찾아보기라도 하겠다는데 어떻게 말려요.”
- 네가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지부장의 퉁명스러운 말에 해승은 속으로 수긍했다. 맞는 말이다. 본래 그라면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도 개입하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휘말리지 않기 위해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겠지.
“걱정 말아라. 내가 모시고 온 에스퍼님이 찾아 준다고 가셨으니까.”
“정말요? 아아,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때 옆에서 박 기사의 달래는 말과 안도한 듯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눈물범벅인 얼굴을 보니 박 기사의 둘째 딸인 듯했다.
그래. 저라면 그랬겠지만, 희윤은 아니다.
희윤이 각성한 것도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였고, 최근에도 호수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 능력을 썼던 사람이니까.
“희윤 형은 다르니까요.”
저와 달리 정의롭고 선한 사람. 제 동네에 찾아온 낯선 꼬마에게 선뜻 음료를 내밀고, 누군가 데리러 올 때까지 자리를 지켜 주는 사람.
“그러니까 형한테 문제 안 생기게 미리 정리 좀 해 주세요.”
- 맡겨 놓은 거 달라는 식으로 말하네.
지부장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해승은 그녀가 곧바로 조치해 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맙습니다.”
- …….
말 대신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 헉. 뭐야, 너 누구야. 너 표해승 아니지.
기껏 사람이 감사 인사를 했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승이 팍 인상을 찌푸리는데 다시금 지부장이 말했다.
- 내가 살다 살다 표해승이가 나한테 고맙단 말 하는 걸 다 듣네.
허허, 참. 지부장이 기막힌다는 듯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고작 50대면서 하여간 가끔 노인처럼 군다.
“어쨌든 잘 부탁할게요.”
심지어 부탁한다는 소리까지 나오니 지부장은 여전히 믿을 수 없어 하면서도 알았다고 대답했다.
“괴물체의 둥지로 추정되는 장소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막 통화를 종료하는데 해변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동시에 부산 본부 소속 에스퍼 몇몇이 희윤이 사라졌던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해승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필 그들이 향한 곳이 희윤이 간 곳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마주친 건 아니겠지. 아니, 거기까지는 괜찮다. 희윤이 에스퍼라는 게 알려지지만 않으면. 해승이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꽈앙.
돌연 굉음과 함께 멀리에서도 눈에 뜨일 만큼 커다란 물기둥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누가 능력 썼어?”
“에스퍼?”
“어어, 저거 고유정 에스퍼 아냐?”
“고유정은 B급이잖아. 저게 가능해?”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대화 내용으로 봐서는 부산 본부에서 출동한 이능력자들 같았다.
그들은 조금 전 일어난 일 때문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막 현장의 상황을 파악한 에스퍼들이 괴물체를 찾아서 떠난 지 불과 몇 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승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한 치도 시선을 움직이지 못했다. 솟아오른 물기둥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희윤 형, 설마…….’
부산 본부 에스퍼들과 대면하는 것만큼 해승이 꺼린 건 희윤이 괴물체와 마주하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허탕을 치고 돌아와 침울해하는 게 낫지. 지금처럼 주목을 받아 버리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차라리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랐건만. 아무래도 희윤은 기어이 괴물체를 찾아낸 듯했다.
꽈아아앙.
다시금 엄청난 폭발음이 주변에 진동했다. 거리도 가깝지 않은데 귀를 찢을 듯 소리가 어마어마했다.
곧이어 차가운 공기가 얼굴과 몸을 적셔 들었다. 부연 안개가 주변을 감쌌다. 커다란 물기둥이 산산이 부서지며 만들어진 것이었다.
“누구야. 누가 저러는 거야.”
“고유정 에스퍼 아니에요?”
“고유정 에스퍼! 대답 바랍니다. 현장 상황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 정도면 안정도 확 깎였을 것 같은데.”
연이어 수런거림이 이어졌다. 부산 본부 역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혼란한 듯했다.
“고유정 에스퍼 아니에요. 안정도 안 떨어졌어요.”
차분한 목소리가 흥분된 분위기 사이를 가르며 들려왔다. 해승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청순하게 생긴 20대 여성이 스마트 워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마 고유정이라는 에스퍼의 가이드 같았다.
확실히 저만한 능력을 사용했다면 안정도가 확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해승은 제 손목에 걸린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보았다.
[에스퍼 안정도 :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