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승은 볼이 따가운 기분을 느끼면서도 앞을 주시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계속 몸을 숨긴 채 희윤이 나오길 기다릴 수 없어 결국 부산 본부에서 출동한 현장지원팀 직원에게 신분을 밝혔다.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부산 본부 현장지원팀 직원은 놀라면서도 신속하게 해승의 지시를 따라 주었다.
두 사람은 동굴에서 조금 떨어진 해변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아! 유인 성공했네요.”
직원이 탄성을 터뜨렸다. 마치 미꾸라지처럼 생긴 괴물체가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리도 없는데 이동 속도가 엄청났다.
길쭉한 머리와 꼬리가 위협적으로 움직였고, 에스퍼들은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공격을 퍼붓고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괴물체와 동굴과의 거리가 제법 멀어졌을 때, 해승은 희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연락했다.
“저기, 근데 표해승 가이드.”
괴물체의 꼬리 네 개는 마치 각각 살아 있는 개체처럼 제각각 움직였다. 거기에 길이도 줄었다 늘었다 했다. 그 때문에 괴물체를 상대하는 에스퍼들도 애를 먹었다.
“부산에는 여행 오신 건가요?”
태평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질문을 들었음에도 해승은 전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 에스퍼 하나가 공중을 날아 괴물체의 꼬리 두 개를 단번에 싹둑 잘라 내는 게 보였다.
쿠아아아악.
괴물체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성을 내질렀다. 남은 두 개의 꼬리를 마구 휘두르며 에스퍼들을 공격하는 광경은 꽤 무시무시했다.
전투 현장에서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현장지원팀 직원은 긴장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황당한 질문을 던지는 것일 터.
해승은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무시했다.
“안에 있는 사람이 표해승 가이드의 유일한 에스퍼라는 A급 물 속성, 연희윤 에스퍼 맞죠?”
그런데도 눈치가 없는지 현장지원팀 직원은 계속 질문을 던졌다. 사실 직원이 이러는 이유가 따로 있긴 했다.
국내 유일 S급 가이드인 표해승이 부산에 나타난 거다. 그러니 뭐라도 정보를 얻어 내라고 상부에서 직원에게 비밀리에 지시한 것이었다.
콰콰콰콰.
쿠애애액.
굉음과 함께 다시 한번 괴물체의 포효가 들렸다.
“헉! 뭐야, 꼬리가 도로 자랐어?”
귀를 찢을 듯한 엄청난 소리에 그쪽을 돌아봤던 현장지원팀 직원의 눈이 커졌다. 조금 전 빙결 속성 에스퍼가 얼음 칼날로 잘라 낸 괴물체의 꼬리가 빠르게 회복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기껏 에스퍼들이 냈던 상처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순식간에 도로 아물었다.
“공략하기 까다롭겠네.”
상황을 파악한 해승이 냉정하게 말을 뱉었다. 그때 동굴 밖으로 사람들이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아, 무사히 나왔네요.”
현장지원팀 직원도 그들을 발견한 듯 말했다. 밖으로 나온 사람 중에서 해승은 어렵지 않게 희윤을 발견했다. 순간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형.”
해승이 부르자 희윤의 고개가 곧바로 이쪽으로 향했다. 마치 여기에 있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 응.
차분한 대답에 해승의 미소가 더 꽃을 피웠다. 현장지원팀 직원은 얼떨떨하게 그 모습을 보다가 어쩐지 얼굴이 붉어지는 듯한 기분에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한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저 둘은 다른 공간에라도 있는 것처럼 분위기가 참 말랑거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해승이 손을 들었다. 희윤에게 제가 보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희윤은 동굴에 나오자마자 곧장 해승의 위치부터 파악했다.
하얗게 부서지는 모래밭과 푸르게 출렁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선 해승은 마치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사령관처럼 보여 단숨에 희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아, 응. 갈게.
어딘지 멍해진 투로 대꾸한 희윤이 막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르릉.
강한 진동과 함께 땅이 거세게 뒤흔들렸다.
“악!”
옆에 있는 현장지원팀 직원이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해승도 몸을 휘청했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런 그의 등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해승아!
희윤의 외침을 들으며 몸을 돌렸던 해승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해승아!”
치솟은 해일이 해승과 현장지원팀 직원을 금방이라도 덮칠 듯 위협적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어어어억!”
“꺄!”
지진에 놀란 건지, 해일에 기겁한 건지 따라오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희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차분했던 눈동자 색이 돌변하고 몸에서 폭발적인 에너지가 새파랗게 들끓었다. 주변 공기마저 세차게 일렁이기 시작한 순간.
콰가가가가가각.
금방이라도 둘을 먹어 치울 듯 달려들던 거대한 파도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기어이 육지에 도착하기도 전, 비처럼 흩어져 쏟아져 내렸다.
“헉. 허억. 헉. 헉.”
부옇게 흩어지는 안개를 본 희윤이 뒤늦게 숨을 터뜨렸다. 갑작스럽게 능력을 과하게 사용한 후유증이 곧바로 몰려왔다.
깨질듯한 두통과 날카로운 이명. 후들거리는 팔다리. 그러나 아직 해승이 안전한지 확인하지 못했다.
“우으응. 흑. 흐윽.”
희윤은 그대로 달려가려 했지만, 품에서 들린 울음소리를 듣고는 멈칫했다. 희윤은 그제야 제가 박 기사의 손녀를 안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 어어? 어?”
하지만 아이에게로 향했던 관심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다시 땅이 마구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또 온다!”
동시에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아파트 2, 3층 높이의 파도가 연이어 해안으로 몰려들었다.
“도, 도망쳐!”
“피해! 높은 곳으로 피해!”
“능력…. 당장 능력 써! 안쪽까지 못 오게 막아!”
여기저기 에스퍼들의 고함이 빗발쳤다. 사람들을 향해 몰아치는 해일을 막아서려 다양한 능력을 끌어올리는 에스퍼들과 괴물체를 상대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에스퍼들까지.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희윤 형.”
희윤은 저를 일깨우듯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물에 푹 젖은 해승이 이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해승아!”
희윤의 몸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금 눈이 푸르게 찰랑거렸다. 거대한 파도를 힘으로 내리누르며 걷는 걸음걸음이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머리가 뜨거웠고, 몸이 저릿저릿했다. 과도하게 일으킨 힘 때문인지 능력 사용 부작용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뽐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그에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쿠구구궁.
땅이 흔들리더니 바다에서 큰 파도가 일었다. 그 가운데 거대한 괴물체가 솟아올랐다.
“괴, 괴물체다…….”
“젠장, 더 큰 놈이 있어!”
그들과 마찬가지로 괴물체가 나타난 걸 본 희윤의 눈동자가 또다시 파랗게 요동쳤다.
주위로 하나둘 물방울이 빠르게 맺히기 시작했다. 그건 곧 두꺼운 줄기가 되고, 거대한 기둥으로 자라나더니 무서운 속도로 회오리치며 위로, 위로 자라났다.
“형!”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해승이 얼굴을 굳혔다. 희윤의 품에 안긴 아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희윤 형!”
급기야 회오리치는 물기둥이 바다에 등장한 괴물체로 쏘아졌을 때, 해승도 몸을 날렸다.
꽈아아앙.
케에에에에엑.
굉음과 괴성이 충돌했다. 엄청난 땅울림이 해변을 강타했다. 혼비백산 도망치던 사람들이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고, 동굴에서 끌어낸 괴물체를 상대하던 에스퍼들 마저 주춤했다.
[주의! 에스퍼님의 안정도가 53%로 급격히 하락하였습니다. 가이딩이 필요합니다.]
스마트 워치가 경고를 내보냈다. 안정도가 순식간에 반 토막이 났다. 그러나 희윤도 거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곧장 불안하게 흔들리는 괴물체를 향해 다시 한번 물줄기 여러 개를 한꺼번에 쏘았다.
꽈앙. 꽈아앙.
괴물체의 온몸을 물줄기가 강타했다. 그리고.
꽤애애애애애액액.
마침내 가장 굵직한 물줄기가 괴물체의 머리를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내리찍자 괴물체가 옆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퍼억.
괴물체가 수면을 강타하며 커다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고 그와 함께 등장했을 때만큼 위협적인 파도가 출렁거렸다.
몇 분이 흘러도 바닷속으로 나자빠진 괴물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부산 지부 에스퍼들은 그걸 확인하고는 나머지 개체를 공격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형.”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해승이 희윤을 불렀다. 희윤이 고개를 돌렸다. 눈의 초점은 흐릿했고 그의 안색도 백지처럼 하얗게 탈색됐다. 당장 쓰러질 듯한 모습에 해승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해승아.”
반대로 해승을 발견한 희윤의 눈빛은 한순간 밝게 변했다. 그러더니 재빠르게 해승에게 다가와 분주한 시선으로 해승의 몸 곳곳을 확인했다.
“저 말짱해요.”
희윤의 걱정을 눈치챈 해승이 목이며 팔을 보여 주었다. 어디에도 상처 난 곳 없이 말짱했다.
“하아…….”
희윤에게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해승은 그런 희윤의 볼을 쓸어주며 다정히 말했다.
“걔 이리 주세요.”
아니, 말로 끝내지 않고 아예 희윤에게 안겨 있는 박 기사의 손녀를 데려갔다.
“어?”
갑작스러운 일에 희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해승이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바닥에 주저앉은 현장지원팀 직원에게 다가갔다.
“박하영이라고 합니다. 캠핑장 인근에서 아이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인계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더니 현장지원팀 직원이 아이를 턱 안겨 버렸다.
“어, 어어. 아, 네.”
얼떨결에 아이를 넘겨받은 현장지원팀 직원이 불안해하는 얼굴로 바다를 살폈다.
희윤의 공격으로 바닥에 침몰한 괴물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 저쪽 해안가에서는 치열하게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에스퍼지만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능력을 가진 현장지원팀 직원은 아이까지 안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가 퍽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동료 에스퍼들은 이미 다른 생존자를 데리고 안전지대로 가 버린 후였다.
“아이, 잘 부탁드립니다.”
새하얗게 질린 현장지원팀 직원과 전투 중인 에스퍼, 그리고 잠잠한 바다를 쭉 둘러본 희윤이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어, 어어? 어?”
현장지원팀 직원은 제 발밑에서 부글거리며 생겨나는 물방울에 경악했다. 물은 금세 두꺼운 구름 형태가 되었고, 이윽고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하영아.”
물구름을 띄운 희윤이 다정한 말투로 박 기사의 손녀를 불렀다.
“네에…….”
아이가 곧장 희윤을 봤다가 다시 아래를 힐끔거렸다. 이 상황이 불안한 듯했다. 희윤은 다정히 웃으며 박 기사의 손녀에게 말했다.
“하영이는 지금부터 하늘을 날아서 아빠, 엄마랑 할아버지께 갈 거야.”
“날아서?”
“응.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건 아주 튼튼하고 커다란 구름이거든.”
아이는 겁먹은 눈으로 물구름과 희윤을 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저를 안전히 지켜 준 게 희윤인 걸 알기에 믿기로 한 것이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대화가 끝난 걸 알아챈 직원이 고개를 꾸벅했다. 희윤도 마주 인사하고는 물구름을 더 높이 띄워 올렸다. 그사이 안정을 찾았는지 박 기사의 손녀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고마워요!”
아이에게 웃어 주며 희윤은 물구름을 캠핑장 근처로 날렸다. 그리고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해승이 희윤의 어깨를 붙들었다.
“해승아?”
“형, 가이딩 해야죠.”
“아…….”
희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손을 들었다. 늘 그렇듯 손을 마주 잡고 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승은 희윤의 어깨에 올린 팔을 내리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안정도가 반이나 날아갔어요. 지금 상황도 좋지 않고. 손만으로는 안 돼요.”
이번에도 바로 수긍했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은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바다에 침몰한 개체 역시 다시 나타날 것이다. 희윤은 그 괴물체가 죽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형.”
저를 부르는 소리에 희윤의 눈길이 다시 해승에게로 향했다. 해승이 무언가 고민하는 듯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희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하얗게 질린 아랫입술을 빼내어 주었다.
“고마워요.”
해승이 눈매를 곱게 휘며 웃었다. 그제야 희윤은 방금 제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채고 귀를 붉혔다.
“그럼 어떻게?”
희윤이 부끄러운지 당장의 상황을 모면해보려 얼른 질문했다. 해승이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희윤의 귀를 가볍게 만지더니 턱을 붙들었다.
“효율적인 가이딩을 해야죠.”
왜 그 순간 해승과 보냈던 해변에서의 밤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발갛게 변한 희윤의 볼을 해승이 엄지로 살살 비볐다.
“괜찮죠?”
저도 모르게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해승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희윤은 홀린 듯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대로 입이 겹쳐졌다.
“……!”
당황한 희윤이 제 얼굴을 감싸 쥔 해승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러다 제힘에 해승이 다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처 힘을 도로 빼고는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곧 부드럽고도 따스한 기운이 마주 닿은 곳에서부터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접촉은 깊어졌다가 얕아지길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가이딩도 리듬을 타듯 흘러 들어왔다.
희윤의 눈꺼풀이 속절없이 떨렸다. 해승의 손목 대신 옷깃을 잡은 손가락도 움찔거렸다.
입을 맞추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가이딩 때문인지는 몰라도 점차 몸이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괴물체와 싸우던 현장에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