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85)

희윤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해승의 실력을 믿는다. 그가 자신했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신뢰하는 것과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별개였다.

“제가 가 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연희윤 에스퍼.”

희윤과 해승이 대화하는 동안 옆에서 듣고 있던 고유정이 끼어들었다. 희윤이 돌아보자 믿어 달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저희 에스퍼들 꼭 찾아 주세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하고 간절한 눈빛에 희윤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고유정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였다.

“그럼, 해승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고유정은 가슴까지 툭툭 두드리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희미하게 웃은 희윤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바다로 다가가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럼 전 바닷속으로 들어가 찾아볼게요.”

희윤이 바다로 향할 때부터 의아해하던 고유정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네? 연희윤 에스퍼?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잠수해서 바람 속성 에스퍼들의 행방을 확인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희윤이 뭐가 문제냐는 듯 덤덤히 꺼낸 말에 고유정의 눈동자만 더 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몇 분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평범한 잠수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냥, 음…… 느낌인데. 괜찮을 것 같아서요.”

어떤 예감 같은 게 있었다. 물을 다룰 수 있으니 그 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는.

다만 이런 걸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어 희윤은 난처한 듯 웃었다.

“아, 아아.”

그런데 도리어 고유정은 신뢰감이 가득한 눈빛을 반짝였다.

“연희윤 에스퍼! 정말 멋져요! 파이팅입니다!”

난데없는 칭찬과 응원에 희윤은 민망해하며 도망치듯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희윤의 예상은 적중했다. 호흡은 편안했으며 물살은 방해가 되지 않았다. 희윤은 어떤 것에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바닷속을 유영해 갔다.

멀찍이 쓰러진 괴물체 두 마리가 물속을 부유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까 총성이 들리더니 해승이 처치해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완전히 죽은 건 아닌지 몸이 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냥 둘 수 없었다. 칼날 수십 개가 물속에서 휘둘러졌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은 괴물체 두 마리를 단숨에 도륙해 냈다. 검붉은 피가 안개처럼 퍼지다가 곧 햇살에 부서지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희윤이 막 괴물체 두 마리를 깔끔하게 처리해 내던 그때.

- 네, 형. 능력 마음껏 발휘하세요. 나머진 제가 책임질게요.

스마트 워치에 해승이 보낸 메시지가 떴다. 돌아온 답변이 든든했다. 희윤은 옅게 웃으며 바람 속성 에스퍼들을 찾으러 빠르게 물속을 나아갔다.

* *

희게 날이 밝아 오는 새벽. 아직 해변에서는 거대 괴물체와의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회복력이 뛰어나 애를 먹고 있긴 했지만, 본부에서 보내 준 추가 병력 덕분에 조금씩 승기를 잡는 중이었다.

그러나 캠핑장 일대는 우울함과 비통함에 잠겨 있었다. 희윤이 바다 저 깊은 곳에서 발견한 바람 속성 에스퍼 둘이 숨이 끊어진 채 셀터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희윤 형.”

희윤은 저를 감싸 안는 손길에 멍한 눈을 깜빡였다. 짠내와 함께 물비린내가 나는 머리칼에 해승은 거리낌 없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관자놀이에도 마찬가지로 온기를 옮기고, 뺨과 턱에도 입을 맞췄다.

그가 닿을 때마다 차가웠던 피부가 조금씩 온기를 되찾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희윤의 마음은 아직 추운 바닷속에 있는 것 같았다.

끝내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희윤을 내리눌렀다.

“자책하지 말아요. 형은 최선을 다했으니까.”

희윤의 생각을 읽은 듯 해승이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아릿한 통증에도 희윤은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그런 그를 해승이 어둑해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이런 일에까지 희윤이 책임감을 느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히 이런 피해가 발생한 건 전적으로 부산 본부의 실수였다. 바람 속성 에스퍼들에게 현장으로 가 보라고 했을 때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지 않아 그런 사고가 난 게 아닌가.

심지어 그들은 대비책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아 정작 일이 벌어졌을 때 책상 앞에서 회의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그럴 때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도 희윤 쪽이니 그가 죄책감을 느낄 게 아니라 도리어 부산 본부에서 미안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해승은 그런 솔직한 생각을 드러내는 대신 그저 희윤을 품에 끌어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네 말이 맞아. 그 상황에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

그래도 조금 더 빠르게 괴물체를 유인할 방법을 찾았으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바람 속성 에스퍼들이 바다에 빠졌을 때 자신이 바로 능력을 써서 그들을 보호했었다면…….

그런 후회가 자꾸만 희윤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저기, 연희윤 에스퍼님.”

해승이 어떻게 하면 희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수 있을지 궁리하던 때였다. 조심스러운 부름이 뒤에서 들려왔다.

해승이 먼저 돌아보았다. 고유정과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20대 중반쯤 된 여자가 서 있었다. 고유정은 희윤 때문에 날카로워진 해승의 눈빛에 차마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아, 고유정 에스퍼님.”

서둘러 해승의 품에서 벗어난 희윤이 민망한 얼굴로 알은척했다. 그러자 고유정도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괴물체를 성공적으로 물리쳤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 말에 희윤의 눈빛이 선명해졌다.

“다친 분들은 없으세요?”

“네. 당장 치료가 필요한 중한 환자는 없습니다. 후유증을 호소하는 에스퍼는 대기 중이던 담당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고 있으니 금방 안정될 거고요.”

고유정이 굳어 있는 표정으로 현재 상태에 대해 말하다가 돌연 꾸벅 허리를 굽혔다.

“고유정 에스퍼!”

고유정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희윤이 놀라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희윤은 끝내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연희윤 에스퍼. 덕분에 납치된 시민들을 무사히 구했고, 실종되었던 에스퍼들도 가족들의 품에서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괴물체를 상대할 전략을 제시해 주신 덕분에 인명 피해를 훨씬 줄일 수 있었어요.”

고유정이 고개를 바로 세우고 먹먹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에 오지 못한 에스퍼와 가이드들을 대신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합니다. 연희윤 에스퍼.”

고유정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희윤을 보았다.

“아닙니다. 결국 인명 피해는 발생했는걸요.”

희윤의 담담하지만 죄책감이 깃든 대답에 고유정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연희윤 에스퍼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런 피해는 더 발생했을 겁니다. 어쩌면 납치되었던 분들 역시 무사하기는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제 도움이 아니었어도 해결될 일이었어요.”

겸손한 희윤의 말에 고유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연희윤 에스퍼께서 실종자들을 찾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체가 납치된 시민들이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연희윤 에스퍼가 그 자리에 안 계셨다면 저희는 괴물체를 상대하느라 그분들을 무사히 구조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아뇨, 그렇게까지는…….”

당황한 희윤은 손까지 내저으며 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유정의 말은 끊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연희윤 에스퍼는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모른 척하지 않고 저희보다 먼저 움직이셨잖아요. 지금 사정을 아는 시민들과 출동한 본부 이능력자들은 모두 연희윤 에스퍼께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해승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눈동자를 떨고 있는 희윤을 내려다보았다. 고유정이 나타난 덕분에 조금 전 우울했던 기분은 털어 낸 듯했다.

잠시 그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바람 속성 에스퍼를 구조해 내지 못한 희윤을 탓하는 듯한 기색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전체적으로 희윤에게 고마워하는 호감 어린 시선만 있을 뿐이었다.

여러모로 희윤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마 이 부분은 공식적으로 부산 본부에서 다시 전달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뵌 건 그 일 때문만은 아닙니다.”

해승의 눈길이 다시금 움직였다. 때마침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고유정 옆에 서 있는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일단 정식으로 인사부터 드릴게요. 저는 고유정 에스퍼와 각인한 가이드 윤세나라고 합니다.”

각인 가이드. 해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산 본부에도 각인한 이능력자 커플이 있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희윤이 부산을 후보지로 눈여겨본 게 그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랬기에 시간이 된다면 해승은 부산 본부에 연락해 각인 이능력자 커플과 만나 볼 계획을 세우긴 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접점이 생길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두 분이 원하신다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경험했던 각인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시간을 알려 주세요. 그때 맞춰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윤세나가 덤덤히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드문드문 고유정과 눈이 마주할 때마다 눈빛에 온기가 가득해 어쩐지 보는 사람이 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자연히 해승은 희윤을 보았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그의 의견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상대를 존중하고자 하는 것은 희윤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은 곧장 눈이 마주쳤다.

“언제가 좋아?”

희윤이 물었다. 아까보다 감정이 정돈된 듯한 모습에 해승은 일단 안심했다.

“내일 점심으로 하죠.”

해승의 짤막한 대꾸에 윤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유정도 조금 더 밝아진 모습으로 냉큼 말했다.

“네. 연희윤 에스퍼님, 표해승 가이드. 내일 봬요.”

해승은 동료가 죽었으니 희윤보다 심적으로 더 힘들 텐데도 그들이 부러 각인에 대해 알려 주기 위해 찾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약간의 고마움을 담아 대꾸해 주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고유정 에스퍼. 푹 쉬시고 내일 뵙죠. 참, 연락처 알려 주시면 약속 장소를 정해 보내겠습니다.”

“아……. 네, 네!”

해승이 보인 뜻밖의 반응에 고유정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른 제 스마트폰을 꺼내 내밀었다.

“제 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그때 윤세나가 차분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더니 해승에게 연락처를 불렀다. 해승이 그런 윤세나를 보더니 알 만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툭툭 터치했다.

한 번 들었을 뿐이지만, 번호가 쉬워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7462 맞습니까?”

“네. 맞아요.”

번호 확인까지 끝낸 해승은 이 자리에 더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눈짓으로 더 용건이 있냐고 물어본 해승은 이내 희윤의 손을 잡아 두 사람을 지나쳤다.

“해승아?”

“우리도 이만 돌아가요, 형. 어차피 정리는 저쪽에서 할 테니까.”

희윤은 당황해서 뒤에 남겨진 고유정, 윤세나를 번갈아 보았다. 고유정은 그 말이 맞는다는 듯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했고, 윤세나도 목을 까딱여 인사했다. 그걸 보고 나서야 희윤도 안심하고 돌아설 수 있었다.

* *

다시 돌아온 별장은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탓에 어둑하니 조용했다. 거실 조명을 켜고 신발을 벗자 그제야 길고 길었던 하루가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단 씻어야겠지?”

해승도 희윤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땀과 바닷물, 이끼 등으로 옷이며 온몸이 지저분했다.

“네, 그래야겠어요. 형이 저 욕실 사용하세요. 저는 침실에 있는 거 쓸게요.”

“응.”

희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로 향했다. 걸어가는 뒷모습이 축 처져 있었다.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해변에서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건지.

아무래도 희윤의 기분을 풀어 줄 무언가를 준비해야 할 듯했다. 혼자 남겨진 해승은 긴 숨을 뱉고는 목을 뒤로 젖혀 뻐근한 근육을 꾹 눌렀다가 떼며 아까부터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발신자는 지부장이었다.

“왜요.”

- 왜긴요. 일이 어떻게 됐는지 나도 좀 들어야죠.

지부장이 해승의 불퉁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해승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거기 있던 부산 본부 현장지원팀 직원한테 들으면 될 텐데.”

가뜩이나 부산 본부 일에 휘말려 피곤했다. 그런데 굳이 제가 하지 않아도 될 걸 지부장이 연락까지 해서 귀찮게 하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나한테 따로 보고할 건 없고?

그 말에 해승의 시선이 희윤이 들어간 욕실 쪽으로 잠깐 움직였다. 물소리 때문에 안쪽까지 말소리가 들릴 것 같지 않았다.

“뭐요?”

지부장이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았지만 해승은 부러 모른 척 굴었다.

- 뭐긴 뭐야. 괴물체 두 마리를 한 방에 처리했다는 신무기 얘기지. 내가 너 그거 챙겨갔을 때부터 알아봤어!

“아아.”

해승의 심드렁한 반응에 스마트폰 너머에서 퍽퍽 가슴 치는 소리가 들렸다.

- 어떻게 할 거야! 그게 뭐냐고 지금 부산 본부에서 계속 캐는데.

“지부장님, 인제 보니 사람이 참 인간미가 없으시네요.”

-뭐?

“부산 본부 간부들도 그렇고. 어떻게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굴어요?”

해승의 난데없는 비난에 말이 막혔는지 스마트폰 건너편에서는 ‘허….’, ‘허, 참.’하는 헛숨만 여러 번 흘러나왔다.

“지금 부산 본부 이능력자들은 작전 수행 중에 사망한 에스퍼들 때문에 괴로울 텐데, 지부장님이나 그쪽 간부들은 고작 신무기에만 신경 쓰고 있고. 사람들이 이런 거 알면 참 좋아하겠어요.”

계속된 비아냥에 지부장은 이젠 아예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제야 제가 실수한 걸 알아챈 듯했다.

물론 해승도 그 일이 안타깝긴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마음이 쓰이는 건 침울해 보이는 희윤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그 부분은 미처 생각을 못 했네.

마침내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조금 흥분했던 목소리도 착 가라앉았다.

“저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죠.”

해승이 셔츠 단추를 풀며 말했다. 아직 욕실에서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희윤은 샤워기 아래에서 생각에라도 잠긴 듯했다.

“마취총 성능 확인은 아까 괴물체 두 마리 잠재운 거로 충분할 테니 그거로 자료 작성하세요.”

툭 옷을 떨어뜨린 해승은 그렇게 말하고는 지부장에게 답이 돌아오기 전에 전화를 뚝 끊었다.

쏴아아.

욕실 안에서는 계속해서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해승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썹을 찌푸렸다. 습기와 냉한 기운이 함께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해승이 보폭을 크게 해 안쪽으로 걸어갔다. 희윤은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만져 보지 않아도 냉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해승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레버를 내려 물을 잠가 버렸다.

“희윤 형.”

“…….”

올려다보는 눈이 흐릿했다. 안색은 창백했고, 피부는 차디찼다. 해승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희윤을 끌어안았다.

말로 하는 위로는 더이상 희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고민은 짧았다. 젖은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축축하고 차디찬 기운에 입술은 온도를 금세 빼앗겼다. 그러나 해승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손으로 식은 피부를 어루만지고, 입술로 이마와 눈가, 콧날과 뺨을 오가며 차근히 온도를 나누어 주었다.

희윤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직 ‘쏴아아.’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괜찮아요.”

따스한 음성이 귓속으로 스며들어왔다. 희윤은 그제야 제게 묵묵히 온기를 나누어주던 해승의 입술을 느꼈다.

그걸 깨닫자마자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해승은 그런 희윤을 제 품에 바투 끌어당겼다.

밀착된 서로의 몸에서 ‘쿵’, ‘쿵’ 작은 진동이 들려왔다. 희윤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박동은 더욱 선명해졌다.

쿵. 쿵. 쿵. 쿵.

‘살아 있구나.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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