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85)

이것도 충분히 낯간지러운 소리인 탓에 희윤은 재빠르게 마무리하고 고유정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고유정은 그게 다시 없을 소중한 보물이라도 된다는 듯 감격한 얼굴로 사인과 응원 메시지가 적힌 종이를 받아 갔다.

“정말 고맙습니다, 연희윤 에스퍼. 평생 소중히 보관할게요.”

안 그래도 되는데. 오히려 그 말에 희윤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그 후 대화는 자연스럽게 희윤의 활약상과 능력을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는지에 관한 것으로 넘어갔다. 고유정은 정말 팬이 맞는지 희윤이 그간 한 일을 끝도 없이 대화의 주제로 꺼내 들었다.

그래서 희윤의 얼굴빛은 고유정과 윤세나를 먼저 보내고, 주차된 해승의 차에 오르고 나서도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

“형, 피곤해요?”

해승이 긴장이 풀린 듯 긴 숨을 뱉으며 의자에 늘어진 희윤에게 물었다. 머리칼을 쓸어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아니.”

육체적으로 지친 건 아니었다.

“그냥 좀.”

다만 저를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도 보듯 하던 고유정의 눈빛과 표정 때문에 과도하게 했던 긴장이 조금 풀렸을 뿐.

“전 고유정 에스퍼 이해가 가는데요.”

희윤이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해승을 봤다.

“제게도 형은 가장 멋진 사람인걸요.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도 되는 길 잃은 아이에게 마실 걸 주고, 기꺼이 시간을 같이 보내 주셨잖아요. 그때부터 형이 내 에스퍼였으면 좋겠다고 제가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몰라요. 그래서 본부에서 형을 봤을 때 정말 기뻤어요. 그토록 원하던 사람이 에스퍼가 되어 내 앞에 와 주었으니까.”

해승의 손이 아래쪽으로 내려와 희윤의 반듯한 이마에 닿았다.

“그래서 그렇게 계속 불쑥불쑥 나타났어?”

간지러운 게 해승의 손 때문인지 아니면 부드러운 눈빛 때문인지 모르겠다. 희윤은 조금 웃음기를 담아 질문했다.

“네. 조금이라도 더 빨리 형과 친해져서 제 에스퍼가 되어 달라고 고백하려고 했죠.”

해승도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입술이 닿았다. 가볍고 짧게 닿았다가 물러서는 감촉이 마치 도장처럼 찍혀 희윤의 얼굴 곳곳에 열감을 피웠다.

희윤이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 열꽃을 피워 낸 해승이 결국엔 희윤의 입술에 제 입술을 내리눌렀다.

더 깊이 파고들지 않고, 가만히 대고 있는데도 희윤의 심장은 조금씩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찌나 세차게 뛰는지 제 귀뿐만 아니라 저와 밀착해 있는 해승에게도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정말로 형이 제 에스퍼가 되어 주어서 전 지금도 행복해요.”

그건 희윤도 마찬가지였다. 해승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더 특별하고 소중했다. 그래서 그와의 각인이 부디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랐다.

실패할 확률 같은 건 희윤이나 해승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해안 도로를 따라 잠깐 드라이브하고 돌아갈까요?”

차에 올라 시동을 걸며 해승이 물어왔다. 희윤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가벼운 대꾸에 해승은 미소를 띠더니 돌연 희윤의 이마에 키스했다. 이어 동그랗게 변한 희윤의 눈가 옆에도 꾹 입술을 찍더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를 출발시켰다.

희윤은 당황한 눈으로 해승의 옆얼굴을 보다가 픽 웃고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 풍경이 보였다.

해안가를 따라 드라이브하던 둘은 해가 지고 나서야 별장으로 돌아왔다.

“박 기사님?”

막 운전석에서 나왔던 해승은 불도 켜지 않은 별장 주차장에 서성이고 있는 박 기사를 발견하고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다.

바닥에 시선을 둔 채 서 있던 박 기사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번쩍 얼굴을 들었다. 희윤은 그가 어제 손녀와 무사히 만나 딸 부부와 함께 돌아갔다는 말을 해승에게 전해 들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 도련님.”

“무슨 일이에요? 연락이라도 미리 하시지. 오래 기다리신 것 같은데.”

“아뇨! 조금 전에 왔습니다.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해승이 묻자, 박 기사가 두 손을 저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러지. 희윤이 걱정스럽게 박 기사를 보았다.

“제가 계속 말렸는데 아이들이 꼭 연희윤 에스퍼님께 사례를 하고 싶다고 해서…….”

박 기사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쩐지 오늘은 유독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듯하다.

희윤은 박 기사의 손에 들린 걸 가만히 내려 보았다.

“이건.”

흰 봉투가 두툼했다. 안에 들린 게 설마 현금은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낯이 굳었다.

“저도 부담돼서 안 받으실 거라고 했는데…… 부탁드리겠습니다. 연희윤 에스퍼,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박 기사가 고개를 푹 숙이며 희윤 앞으로 팔을 뻗었다. 희윤은 난처한 눈으로 해승을 봤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보상받을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간곡하게 받아 달라 말하는 박 기사의 말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받아요, 형.”

갈등하는 희윤과 달리 해승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아 했다. 심지어 아예 팔을 뻗어 박 기사가 내민 봉투를 가져갔다.

“자.”

희윤은 결국 복잡한 눈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봉투를 열었다가 수표 대신 들어 있는 카드 편지 한 장을 보고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려 해승을 봤다. 빙긋 웃고 있었다. 그제야 희윤은 해승이 이런 결말을 예상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하영이 부모 두 사람 다 현금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연희윤 에스퍼께 되레 폐가 될 것 같아 극구 말리고 있을 때 하영이가 나타났지요.”

박하영은 제 할아버지와 부모가 실랑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더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잠시 후에 하영이가 나왔는데 그 카드 편지를 들고 있더라고요. 연희윤 에스퍼에게 자기도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다고요.”

희윤은 천천히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바다 위에 구름이 둥실둥실 뜬 그림이 그려진 겉면을 올리자 귀여운 글씨가 나타났다.

연희윤 에스퍼님! 하영이예요. 괴물에게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스퍼님은 제 영웅이세요! 멋져요! 저도 그런 멋진 에스퍼가 되고 싶어요!

카드에 쓰인 아기자기한 글씨가 눈에 띄었지만, 희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제가 능력을 구현하던 순간을 그린 그림이었다.

물구름에 앉은 하영이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두 사람 사람의 주변에는 여러 색으로 빛나는 반짝이가 뿌려져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하윤이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눈가가 뜨거워졌다.

“제게 주면서 연희윤 에스퍼님께 꼭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실례가 되는 줄 알았지만, 기다렸습니다.”

손녀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박 기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들을 기다린 것이었다.

희윤은 제 손에 들린 카드가 구겨지지 않게 다시 조심히 봉투에 넣었다.

“박 기사님.”

희윤은 흠흠 헛기침을 하고 다시 박 기사를 보았다.

“하영이에게 마음 잘 받았다고 전해 주세요.”

말주변이 없어서 미사여구는 더 붙일 수 없었다. 하지만 대신 말속에 진심을 가득 담아 전했다. 박 기사가 허리를 굽히며 희윤의 인사를 받았다.

“연희윤 에스퍼님. 제 손녀를 무사히 데려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희윤은 황망해하는 얼굴로 얼른 박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고, 마땅히 그 상황이었다면 누구라도 나섰을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대신 희윤은 박 기사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박 기사는 희윤에게 한 번 더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 참 민망한 일이 계속 일어나네.”

누구에게는 연예인이라도 되는 듯 사인을 요청받고, 박 기사의 가족들에게는 영웅이 되었다. 아이의 진심이 담긴 카드까지 받았더니 심장이 차오르는 물에 잠긴 듯 먹먹해졌다.

해승은 말 대신 희윤을 끌어다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정수리에 입술을 묻고, 머리칼 사이를 헤치며 숨을 삼켰다.

조금씩 입술을 움직여 목덜미에 묻으니 달짝지근한 맛이 나는 듯했다.

“에스퍼로 각성했을 때.”

희윤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해승은 입술을 귓가로 가져가며 더 말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간지러운 감촉에 희윤의 고개가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참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살갗이 입술에 닿는 게 좋았으니까.

“사실은 기뻤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보다 ‘누군가가 나를 계속 찾아 주겠구나.’ 그런 마음이 들어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희윤의 곁에 남은 건 고독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곁, 외출하고 돌아오면 그를 반기는 불 꺼진 집, 아파도 슬퍼도 기뻐도 행복해도 함께 할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악착같이 일했고, 빈집에 가기 싫어 거리를 헤매기도 했다. 그래도 차마 그곳을 외면할 수 없던 건 저를 찾는 동네 어르신이 계시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집이 저를 품어 준 할머니의 터전이었기 때문에.

그랬기에 희윤은 에스퍼가 되었을 때 기뻤다. 자신을, 저의 힘을 찾아 줄 사람이 생긴다는 것이니까.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는지보다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지금도 에스퍼로서 대단한 사명감을 느끼거나 하는 건 아니야. 아닌데…….”

귓가에 머물던 해승의 입술은 어느덧 목덜미로 이동했다. 희윤은 팔을 뻗었다. 해승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두피를 만지니 묘하게도 손끝으로 간질거리는 느낌이 옮겨 온 듯했다.

“그래도 에스퍼가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대단한 일은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이전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니까.”

앞으로도 희윤은 길을 잃은 꼬마에게 선뜻 음료수를 내밀었던 것처럼. 그 꼬마가 방황하지 않게 자리를 지켜 주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도울 거다.

당신은 에스퍼가 아니었을 때도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랬기에 쉽게 곁을 주지 않는 자신이 그에게 빠져들었다는 건 알지 못하겠지.

희윤과 눈을 맞춘 해승이 일순 호흡을 멈추었다. 머리칼을 쓸던 희윤의 손이 눈가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이 가볍고 부드럽다. 그러나 그보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도 따듯하고 예뻐서 홀려 버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에스퍼가 되어 널 만나고, 네가 내 가이드가 되고, 이렇게 우리가 각인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으니까.”

희윤의 눈이 감겼다. 해승은 제게 가까워지는 얼굴을 가만 보았다가 눈꺼풀을 살며시 내렸다.

입술에 닿은 감촉은 촉촉하고 말랑했으며, 온도는 더할 나위 없이 따스했고, 스며드는 숨결은 나긋했다.

몇 번이나 각도를 달리하고 휘어 감기고 얽히던 접촉 끝에 해승이 먼저 희윤을 떼어놓았다.

“형, 나머지는 들어가서 해요.”

해승의 낮은 목소리가 목 뒤에 간지러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이미 흥분으로 몸이 달아오른 희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다 해승의 손과 꽉 깍지를 꼈다.

“응. 그래, 그러자.”

해승은 저를 붙잡아 끌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충동을 이기지 못한 듯 질문을 던졌다.

“우리 이대로 들어가서 도전해 볼까요? 느낌이 꽤 좋은데.”

희윤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굳이 뭘 하자는 건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 고유정의 말에 따르면 도전하기 전 어떤 예감이 왔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아직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좋아.”

이왕이면 해승과의 각인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여전히 실패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랬기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자 했지만, 해승이 오늘 하기를 바란다면 희윤이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해 보자.”

결과가 어찌 되었든 첫 시도는 해승이 원할 때 하고 싶었다. 희윤은 단단하게 결심한 눈으로 제 가이드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희윤의 마음이 닿았을까. 해승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잡아끄는 손길은 다정했지만, 도망은 생각하지 말라는 듯 견고했다.

그러나 정작 해승이 도착한 곳은 침실이 아닌 욕실 앞이었다.

“여긴 왜?”

“씻고 나오세요. 그동안 준비 좀 할게요.”

“준비?”

뭐 따로 해야 하는 게 있던가. 이미 반쯤 달아오른 희윤이 침실을 힐끔 봤다. 희윤의 솔직한 모습에 해승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해승과 여름휴가를 갔던 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희윤의 귀 끝이 또 속절없이 발갛게 변했다.

“각인하려면 끝까지 가야 하잖아요. 그럼 필요한 게 있거든요. 형이 다치지 않아야 하니까. 아시죠?”

곱게 휘는 눈꼬리를 보니 더더욱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 알아. 나도. 응,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더 말하지 않아도 돼. 희윤은 해승이 혹여 뒷말을 덧붙일까 하여 부리나케 욕실 안으로 도망쳤다. 혼자 남겨진 해승은 피식피식 웃었다.

“귀여워.”

정말 가끔 보면 희윤은 저보다 연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어쩔 줄을 몰라 도망칠 때나 혹은 순진하게 얼굴을 붉힐 때.

능력 좋은 에스퍼이면서, 저보다 4살이나 연상이면서 저런 모습을 보이니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자, 그럼 진짜 준비 좀 해 볼까.”

희윤에게 말한 대로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있었다. 안전한 관계를 위한 필수품. 해승은 욕실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몸을 돌렸다.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반짝였다. 해승은 무심히 시선을 내려 액정을 터치했다.

[지시하신 대로 오늘 연동수 가족 전부 필리핀으로 이주 완료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연동수가 희윤에게 알짱거리는 걸 원천 차단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그를 보내 버린 터였다.

그들이 이주한 곳은 연락도 잘 닿지 않는 시골이었고, 평생 감시가 붙을 테니 이제 신경 쓸 일은 없었다. 해승은 미련 없이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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