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옇게 일어난 수증기 사이로 선 희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아까까지는 용기백배였다. 해승이 원한다면 얼마든 하겠다고 각오했건만.
“하아…….”
희윤은 뜨거운 물을 흠뻑 맞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해승을 기다리게 한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 더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야 했다.
레버를 내리고 몸을 돌렸다. 하필이면 거기에 거울이 있어서 희윤이 또 우뚝 멈춰 섰다.
“아.”
샤워를 마친 얼굴이 보기 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건만.
희윤은 손바닥으로 젖은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슬그머니 제 상태를 외면했다. 수납장에서 커다란 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아 내고 밖으로 통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하…….”
다시 또 긴 숨이 흘러나왔다. 긴장하지 말아야 하는데. 안 해도 되는데. 어차피 해승과 밤을 보내는 게 처음도 아니었다.
“그래도 끝까지 하는 건 처음이잖아.”
그게 뭘 의미하는지 희윤도 모르지 않았다. 절로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뒤쪽까지 이동했다가 덜컥 멈췄다.
아니다. 더 생각하지 말자. 시간 끌다가는 정말 있던 용기도 다 흘러 내려가 버릴 것 같다. 희윤은 입을 꾹 다물고 문을 열었다.
“헉!”
그리고 희윤은 밖으로 나가다가 덜컥 멈추어 섰다. 바로 앞에 해승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 기다렸어요.”
“너, 왜, 아직도 여기에…….”
가뜩이나 긴장했던 심장이 해사한 미소에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해승이 말없이 손을 뻗었다. 아마 잡으라는 의미로 내민 걸 텐데 동작 하나하나가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넌 다 씻었어?”
희윤이 슬그머니 해승과 손을 얽으며 물었다. 괜히 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네.”
대답하는 목소리에도 열기가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희윤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동시에 몸이 쓱 해승에게 끌려갔다.
희윤은 멍한 얼굴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대로 침대로 갈 줄 알았는데, 해승이 향한 건 활짝 열린 테라스였다.
테라스에는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였고, 테이블엔 간단한 안주와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희윤이 의아하게 해승을 돌아봤다.
“웬 거야?”
“아직 시간도 이르고, 분위기도 좀 만들면 좋을 것 같아서요.”
희윤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움직였다. 저녁 8시. 확실히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워낙 많은 일이 있었기에 분명 한밤중은 되었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였다.
“그래.”
아마도 해승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긴장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 희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쏴아아.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어두워 풍경은 잘 보이지 않아도 분위기는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자요.”
멍하니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해승이 와인 잔을 내밀었다. 받아 들었더니 제 것과 희윤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챙, 하고 맑고 경쾌한 음이 울렸다.
“형, 긴장돼요?”
“응. 넌?”
“저도요. 첫날밤도 아닌데. 이상하죠?”
고작 첫날밤이라는 말에 또 심장이 대책 없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때도 이렇게 파도가 치는 밤이었잖아요.”
그랬다. 지금처럼 사방은 고요했고, 바깥은 어두웠으며, 활짝 열린 창으로 파도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희윤은 잔에 입술을 대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약간의 씁쓸함과 함께 미약한 단맛이 혀에 감겼다가 목으로 넘어갔다.
그 씁쓸함에 슬쩍 눈을 찌푸렸더니 해승이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별로예요?”
“음…….”
마시라고 해승이 챙겨 준 거라 차마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셔 봐야 맥주나 소주가 전부였던 희윤에게 와인은 아직 친해지기 힘든 영역이었다.
마치 자신이 처음 에스퍼가 되고, 가이드인 해승을 만났을 때처럼. 모든 게 낯설고 긴장되었던 순간처럼.
“전 가이드가 되었을 때, 제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지 몰랐어요.”
해승이 희윤의 손에 들린 잔을 가져가며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희윤의 젖은 입술을 문질러 닦아 주었다.
“어렸잖아.”
희윤은 제 입술에 닿은 손을 떼어 놓지도 못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조금 더 벌리면 그대로 안으로 진입할 것처럼 해승의 손끝이 입술 선을 덧그리듯 움직였다.
“네. 맞아요. 어리기도 했죠. 하지만 그보다는 그냥 뭐가 됐든 다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전부 지루하고 재미없었거든요.”
입술에 닿은 엄지손가락에 집중해 있던 희윤의 시선이 단숨에 해승의 눈동자로 향했다. 해승은 희윤의 말 없는 의문을 알아챈 듯 옅게 웃었다.
“고작 8살이 무슨 그런 생각을 하나 싶죠?”
희윤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팔을 들어 해승의 손을 붙잡아 내리고 말로 꺼냈다.
“아니. 그냥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가 궁금해.”
해승의 말대로 8살이었다. 희윤이 기억하는 그 나이대의 저는 한창 모든 게 궁금하고 재밌는 일로 가득했다.
그땐 부모님도 사이가 좋았고, 희윤도 매일매일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행복하다면 행복한 시간이었다.
“모든 게 다 있었거든요.”
돈도, 사람도, 하다못해 재능도. 해승은 놀라우리만치 못 하는 게 없었다. 남들보다 이르게 언어를 깨우쳤고, 월등하게 앞서 나갔으며 바라는 것은 부족함 없이 전부 쥐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해승에게는 그 모든 게 아무런 자극이나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물론 고작 8살이 똑똑해 봐야 얼마나 똑똑했겠어요. 근데도 그냥, 별로 흥미를 끄는 게 없더라고요.”
공부는 지루했고, 스포츠는 너무 쉽게 배웠기에 성취감을 주지 못했다. 게임도, 미술도, 음악도 해승에겐 길거리에 떨어진 돌을 줍는 것과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뭘 봐도 즐겁지 않고, 뭘 해도 관심이 안 가고. 되게 지루했어요.”
그랬기에 가이드가 되었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걱정한 건 할아버지와 부모였다.
세상에 이능력자가 생겨난 지 어느덧 30년, 많은 갈등과 위험을 겪으면서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었다고는 해도 괴물체라는 무시무시한 생물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에 대한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랬기에 부모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해승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해승은 오히려 본부에서도 무료함을 느껴야 했다.
“S급 가이드가 되니까 더 그렇더라고요. 온통 어떻게든 자기한테 좋은 방향으로만 이용하려 하고.”
해승이 가진 배경과 능력은 독만 되었다. 기어이 납치 사건까지 생겼을 때, 해승에게 남은 건 에스퍼를 향한 꺼림칙함을 넘어선 혐오뿐이었다.
“그때 형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정말로 그랬다. 모든 것이 다 싫고 힘들었을 때 우연히 만난 희윤 덕분에 해승은 좀 더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그 세계가 희윤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겠지만.
몰래 희윤의 정보를 모으고, 그가 자신의 에스퍼이기를 바라면서 지켜보는 일이 하루 일과의 전부일 정도로.
“그리고 이렇게 형이 제 옆에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전 에스퍼를 적대적으로 대했겠죠.”
물론 희윤을 제외하고는 지금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해승은 희윤의 고요한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 얘기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흔들림조차 없었다.
“형 덕분이에요. 가이드로서의 제가 형 곁에 서 있는 건.”
가끔은 책임감이 넘치는 내 에스퍼가 나 말고는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못된 마음이 들긴 해도.
“정말로. 형, 에스퍼가 되어 내 곁으로 와 줘서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 내 가이드가 돼 줘서.”
“사랑해요.”
불쑥 튀어나온 말에 희윤은 또 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맞춘 채 답을 돌려주었다.
“나도. 좋아해. 정말로.”
아직 사랑한다는 말은 부끄러워 희윤은 좋아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언젠가 그에게 똑같은 걸, 아니 그보다 더 좋은 것으로 보답할 날이 왔으면 한다.
부디 앞으로는 해승이 과거와 같은 감정을 겪지 않길 바라며 희윤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조금 앞으로 당기자 해승은 순순히 움직였다.
해승의 눈이 살며시 감겼다. 조금씩 다가오는 얼굴에 희윤이 각도를 달리했다. 곧 부드러운 입술이 서로에게 맞물렸다.
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조금씩 열기가 피어올랐다. 귓가에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사이로 해승이 조금씩 깊이를 더해 갔다.
제 입 안을 유영하는 뜨거운 숨결에 희윤은 자신이 해승에게로 잠겨 들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온통 그에게 젖어 드는 듯했다. 희윤은 저항 없이 해승을 받아들였다. 서로의 호흡이 뒤섞이고, 감정이 물결처럼 뒤섞여 하나로 모여 흘러가도록 두었다.
“하…….”
한참 이어진 입맞춤이 끝나고 사이가 벌어졌다. 어느새 눈을 감고 있던 희윤이 눈꺼풀을 들었다.
서로의 코끝이 닿아 있었다. 그대로 쪽. 쪽. 잔열 같은 키스를 남긴 해승이 몸을 물렸다. 희윤으로 가득 찬 검은색 눈동자에는 어느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침대로 옮길까요?”
이번에도 희윤이 할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래.”
오늘은 해승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 줄 의향이 있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해승이 희윤의 손을 붙들어 당겼다.
풀썩.
침대로 온 희윤은 해승에게 떠밀려 그대로 뒤로 눕혀졌다.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형, 잘 부탁해요.”
해승이 희윤의 머리 옆에 손을 짚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몸 어딘가가 불을 지핀 듯 뜨거워졌다.
희윤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성공할 수 있을까.
과연 이 밤이 우리에게 달콤한 결실을 안겨 줄까.
그건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나도.”
희윤은 고민을 안으로 삼켰다. 그리고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먼저 손을 뻗어 해승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당기자 해승이 기쁘게 다가왔다.
곧 뜨거운 입술이 포개졌다.
* *
지부장은 두 손을 모은 채 초조하게 연구실 안을 방황했다. 희윤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제 에스퍼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만지며 그 모습을 보던 해승이 픽 실소를 흘렸다.
지부장의 모습이 꼭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웃지 마.”
지부장이 샐쭉하게 해승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당사자보다 더 초조해해요?”
물론 해승의 말이 맞긴 했다. 정작 희윤이나 해승은 무덤덤한데 그가 더 불안해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어? 안 그러게 생겼어?”
“이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요?”
해승이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목선을 타고 길고 커다란 문신이 드러났다. 희윤과 각인 된 직후 생겨난 네임이었다.
“그래. 너한테는 네임까지 확실하게 드러났지. 근데 연희윤 에스퍼는 아니잖아!”
오늘 새벽, 지부장은 희윤과 해승의 각인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심지어 해승은 네임까지 나타났다고 알려 왔다.
그에 당장 서울로 오라고 말하고는 기대감에 차 기다렸는데 뜻밖에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미안해.”
희윤이 해승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해승은 괜찮다는 의미로 축 처진 눈꼬리에 키스하며 지부장을 노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희윤은 해승한테만 네임이 나타난 일로 잔뜩 심란해했다. 희윤은 혹시 모를 부작용으로 해승에게 무슨 해가 되는 건 아닐까 계속 불안해했다. 이럴 때조차 남을 먼저 걱정하는 희윤을 보며 해승은 바로 네임 전문가와 연결해 그 걱정을 덜어 주었다.
그도 모자라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동안 이런저런 사례를 들어 그를 안심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지부장이 저 소리를 하는 바람에 희윤의 표정이 도로 어두워지지 않았나.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눈앞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도 마음에 안 드니 쫓아 버릴까. 해승이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안쪽 문이 열리며 연구원이 나타났다. 웃음이 활짝 핀 얼굴로 이미 답은 된 듯했다.
“축하합니다. 연희윤 에스퍼, 표해승 가이드. 세상에, 혹시나 했는데 정말 각인을 단번에 성공하셨네요.”
해승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지부장이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 정말 성공했어? 그럼 연희윤 에스퍼 네임은 어때?”
연구원이 재차 입을 열었다.
“네. 각인은 성공했고요, 네임은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그래도 두 분 매칭률도 95%가 되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각인도 했고, 매칭률도 올랐으니 본부로서야 충분히 고무적인 일일 수 있었다. 그러나 희윤은 해승에게만 나타난 네임이 더 신경이 쓰였다.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각인도 그렇지만 네임 역시 정확한 기간은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네임 노출 유무가 건강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구원 역시 아침에 연결한 네임 전문가와 비슷한 말을 했다.
“형.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해승이 희윤의 어깨를 팔로 휘감아 제게 당겼다. 귓가에, 귓불에, 관자놀이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는 행위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본 지부장의 얼굴이 파삭 구겨졌다.
“야, 이것들아! 애정행각은 둘이 있을 때나 해!”
에스퍼와 가이드가 이러한 노골적인 행태를 보이는 게 본부에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지부장이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심술이었다. 해승도 그걸 알기에 보란 듯이 희윤의 매끈한 이마에도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런데 연희윤 에스퍼의 능력치 측정도 다시 해 봐야 할 듯합니다. 처음 본부에 왔을 때 측정했을 때보다 수치가 월등히 올랐더라고요.”
둘만의 애틋한 분위기는 연구원이 끼어들며 깨어졌다. 희윤이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연희윤 에스퍼가 S급으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에스퍼 인자가 나온다는 말이에요. 물론 더 검사를 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각인 이후 능력치가 오르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게 제 일이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희윤은 얼떨떨한 얼굴로 해승을 보았다. 이미 그의 눈은 이미 빛나고 있었다. 더는 기쁠 수 없다는 듯 환해진 얼굴로 해승이 희윤의 뺨을 감싸 쥐었다.
“우린 정말 인연인가 봐요.”
환희에 젖은 말과 함께 그대로 희윤의 입술이 해승에게 모두 삼켜졌다.
“이것들이 진짜, 야! 떨어져!”
더는 못 버틴다는 듯 지부장이 나서서 둘을 떼어놓고 희윤을 연구원과 함께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자! 가서 검사해, 검사. 진짜 S급이 되었는지 보자고.”
* *
집으로 돌아와서도 해승의 기분은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결국 그건 두 사람의 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해승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희윤을 탐했다. 키스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몇 번이나 깊어졌다가 얕아지길 반복했고, 온몸은 매만지는 손길은 불에 덴 듯 뜨겁게 만들었다.
달뜬 신음과 애원, 타액과 눈물을 쏟아 낸 희윤은 새벽이 푸르게 밝아 오는 걸 보고서야 간신히 기절 같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으…….”
그마저도 얼마 이어지지 못하고 지끈한 통증에 다시 깨어야 했다. 특히 팔꿈치 언저리부터 검지와 약지까지 이어지는 저릿함에 희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희윤은 끙끙거리며 제 팔을 눈앞으로 가지고 왔다. 아직 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아 앞이 부옇게 흐렸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나서야 조금씩 선명해지는 시야에 거뭇한 제 손가락이 보였다.
“……어?”
놀란 희윤이 다시금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였다가 다시 제 손을 확인했다. 검지와 약지에 마치 잉크가 번진 듯 검은 얼룩이 있었다.
희윤은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손등과 손목, 팔과 팔꿈치까지 마치 문신이라도 된 듯 나타난 그건…….
“형, 벌써 일어나셨어요?”
마침 침실로 돌아왔던 해승이 우뚝 멈춘 채 희윤의 팔을 봤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그가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희윤의 팔을 붙들었다.
“네임이네요.”
그랬다. 그토록 기다리던 네임이었다. 희윤은 목덜미에서부터 시작해 팔꿈치에서 끝난 해승의 것과 팔꿈치부터 손가락까지 새겨진 제 네임을 봤다.
“형, 이제 정말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렇죠?”
희윤이 올려다보자 눈을 마주친 해승이 반달처럼 곱게 눈매를 휘며 웃었다. 희윤의 입꼬리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응. 그러게. 정말 다행이야.”
서로의 이름을 새긴 손에 단단히 깍지를 낀 둘의 입술이 그대로 마주 닿았다.
희윤은 미안함과 벅찬 기쁨으로 제 품에 파고드는 해승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비로소 온전히 꼭 들어찬 기분이 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