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체대생의 하루는 아침 일찍 시작된다. 이른 시간 훈련을 받던 체대 입시의 습관이 남은 탓에, 도혁은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알파용 페로몬 억제제와 영양제, 비타민을 한 움큼 삼킨 다음 그는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헛둘, 헛둘, 혼자 구령을 붙이며 기숙사에서 대운동장까지 이어지는 길을 달렸다.
운동장 옆을 따라 뛰다 보니 어느덧 체대 부속 건물이 보였다. 건물은 ㄷ자 형으로 설계되어 있었는데, 그중 바깥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곳이 펜싱부실이었다.
도혁은 펜싱부실 창문 앞을 지날 때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그 안을 힐긋 들여다봤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찾는, 주원이 없었다.
“계속 학교 안 나오시네. 그랑프리 우승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일주일 전, 술독에 빠진 도혁을 구제해 주고 백마 탄 왕자님처럼 사라진 주원은 그 이틀 뒤 펜싱 그랑프리에서 금메달을 땄다. 도혁은 잘생기고 멋지며 친절하기까지 한 선배의 다정함을 잊을 수 없었다.
“못 본 지 일주일이나 됐어……. 제대로 인사도 하고 번호도 따야 하는데.”
선배는 대체 얼마나 바쁘시길래 학교에도 못 오시는 걸까. 아, 애가 탄다.
도혁은 자신이 어느새 멈춰 선 줄도 모른 채 중얼거렸다. 오른쪽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 허리를 숙여 런지 자세를 취했다. 반대편 다리를 뻗어 마찬가지로 구부리며 허벅지 근육을 쭉쭉 늘리던 그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맞다. 오늘 펜싱부 대면식 한댔지! 채 선배는 펜싱부 전체 주장이잖아. 그러면 대면식에 당연히 오지 않을까? 아, 잘하면 볼 수 있겠다. 어떡해. 너무 좋아.
갑자기 기대심이 부풀어 올랐다. 도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헛둘, 헛둘, 오늘 일과가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오전 나절 전공 필수를 듣고, 도혁은 기숙사 룸메이트인 용희와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용희도 펜싱 전공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 화제는 자연스럽게 저녁에 있을 펜싱부 대면식으로 흘러갔다.
“펜싱 전공생은 다 모이는 거지? 그럼 올해 신입생 스무 명에 선배들이 못해도 오륙십 명은 올 거고……. 와, 사람 많이 모인다. 신난다.”
도혁은 싱글싱글 웃으며 산더미처럼 쌓인 밥을 한 숟갈 떴다.
“도혁이 넌 되게 기분 좋아 보이네.”
“용희 너는 대면식 하는 거 별로야?”
“어, 당연하지.”
“왜?”
용희는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내가 소문 들었는데, 펜싱부 정식 입단하고 나면 꿀 같은 시절 끝이래. 주장 선배가 지옥 훈련 조교라는데? 방과 후마다 혼나면서 운동하고, 주말에는 MT라는 핑계 대고 끌려가서 군기 잡힌대. 여기 생각보다 무서운 곳이야.”
그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리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거꾸로 도혁은 화색이 돌았다.
“정말이야? 선배들이랑 그렇게 끈끈하게 붙어 지낸다고? 주장 선배… 그니까 주원 선배가 직접 지옥 훈련을 시켜 주고?”
“그래. 펜싱부는 완전히 한 몸처럼 지낸다더라. 이제 우린 죽을 일만 남은 거야.”
용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와… 너무 좋다.”
도혁은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양 뺨을 감싸 쥐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 그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같이 지옥 훈련……. 주장 선배랑 MT…….”
그 모습을 지나가던 여학생 몇 명이 힐긋거리며 쳐다봤다.
“쟤 좀 잘생기지 않았니?”
“덩치 엄청 큰데 되게 해맑게 웃는다. 귀여워.”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여학생들에, 도혁은 살살 눈치를 보았다.
혹시 내가 밥을 너무 많이 떠서 쳐다보는 건가? 물론 오늘따라 입맛이 돌아서 넉넉하게 푸긴 했다만.
뭐, 그래도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까 아무래도 좋아.
다시 한번 앙,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소불고기를 흡입했다.
* * *
펜싱부 신입생 대면식 19시까지 펜싱부실로 전원 집합
체대 부속 건물인 [실현관] 입구에는 대자보가 대문짝만하게 나붙어 있었다. 펜싱부실 방향으로 화살표 마크도 붙어 있었기에, 용희와 도혁은 길을 헤매지 않고 부실을 찾을 수 있었다.
“실례합니다.”
“신입생입니다.”
도혁은 용희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실내로 들어섰다. 처음 와 보는 부실은 넓은 강당 같았다. 피스트(펜싱 시합을 치르는 기다란 경기장)가 설치된 마루가 저 멀리 보였고, 각종 펜싱 장비, 심판을 볼 때 쓰이는 장치도 놓여 있었다.
“어서 와. 나 기억하지? 2학년 총무, 김민석이야.”
대충 오십여 명 되는 학생 중 지난번 도혁과 한 테이블에 앉았던 선배가 알은체를 해 왔다.
“예, 선배님. 저 1학년 이도혁입니다.”
“그래. 곧 시작할 거니까 너희는 저 뒤에 가서 서라.”
민석이 가리킨 곳에는 스무 명 남짓한 신입생들이 각 잡힌 자세로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도혁과 용희도 가장 뒷줄로 향해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그때, 앞문이 드르륵 열리며 하얀 펜싱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주원 선배다……!’
도혁은 바짝 긴장하며 주원을 관찰했다. 그는 옆구리에 마스크를 끼고 한 손으로는 사브르 칼을 쥐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신입생과 재학생 할 것 없이 좌중에는 조용한 술렁임이 일었다. 뚜벅뚜벅 걸어와 정중앙에 멈추어 서는 그의 모습이 지나치게 우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펜싱부 전체 주장을 맡고 있는 채주원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날 본 사람도 있겠지만 정식으로 인사하지. 펜싱 명문인 우리 학교에 입학한 것을 환영하고, 또 펜싱부로 만나게 되어 반갑다.”
주원은 신입생 무리에 시선을 던지며 인물들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긴장감과 조금의 두려움, 또 설렘으로 무장한 새내기들의 모습은 작년, 또 재작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중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건 도혁이었다.
지난번엔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도 못하더니 멀쩡해진 모습이 제법 번듯했다. 눈빛 쌩쌩하니 좋네. 실력은 이따가 따로 점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친 순간, 신입생이 움찔했다. 하지만 주원의 시선은 무심하게 지나갔다.
“에페 손들어 봐.”
학생 일곱 명이 손을 들었다. 에페 주장이 그들을 인솔해 가장 구석 피스트로 향했다.
“다음, 플뢰레.”
이번에는 여덟 명이 손을 들었다. 플뢰레 주장이 그들을 반대 방향으로 인솔해 갔다. 학생들이 우르르 빠지고 나자 남은 것은 딱 다섯 명이었다.
“나머지는 사브르지?”
“예! 그렇습니다.”
“환영한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도 사브르야.”
도혁은 주원의 말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 여기 세부 전공대로 팀 짜서 훈련하는구나. 그렇다면 나, 주원 선배랑 금방 친해지겠는걸.
그가 그렇게 긍정 회로를 돌리고 있던 중이이었다. 주원이 난데없이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그럼 전통대로 우리 사브르팀 선후배 간 인사는 대련으로 치른다. 먼저 15점 따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네? 다짜고짜 시합이라니요.’
‘어떡해. 나 긴장돼.’
1학년들은 크게 동요했다.
도혁 역시 당황스러웠다. 오늘이 첫 만남인데… 과자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으면서 단체 메신저 방이나 개설하는 게 아니란 말인가?
“우린 상의만 입음 되잖아. 자, 다들 하나씩 걸쳐라.”
주원과 민석이 신입생들에게 보호 재킷을 휙휙 던져 주었다. 도혁은 엉겁결에 제일 먼저 옷을 받아 든 학생이 되었다.
“너랑 나부터 할게. 피스트로 가자.”
“네? 저 게임 합니까?”
“응.”
도혁은 주원에게 반 끌려가다시피 경기장에 세워졌다. 오랜만에 밟는 경기장의 느낌에 생경해할 새도 없이, 등에는 센서가 연결되었고 손에는 칼이 쥐어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팅한 주원이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었다.
쿡, 주원이 도혁의 마스크를 찌르자 빨간불이 켜졌다. 득점 램프가 잘 들어오는지 확인하는 절차였다. 도혁은 얼떨떨해하며 주원의 행동을 따라 했다. 녹색 불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오케이. 두 선수 장비 정상입니다. 그럼 프레, 알레(시작)!”
심판이 시작 신호를 줬다. 그리고 0.1초도 지나지 않아 대뜸 주원이 도혁을 향해 돌진했다.
“으아아!”
“헉!”
도혁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주원이 번개같이 날아들어 도혁의 팔뚝을 찔렀다. 빨간 불이 선명하게 빛났다.
“채 선배, 득점 인정!”
너무 빨라. 보이지도 않는데, 이거 어떻게 해?!
“프레, 알레!”
이번에도 주원은 전광석화 같았다. 도혁은 뒤로 몇 발자국 더 밀려나며 가슴을 정통으로 베였다. 또 빨간 불이었다.
“채 선배, 득점!”
스코어는 2:0에서 6:0으로, 그리고 순식간에 14:0까지 벌어졌다. 주변에 하나둘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용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도혁은 이리저리 도망을 다닐 뿐, 이렇다 할 공격을 전혀 보여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빨간 불의 향연이었다.
“헉, 헉…….”
하도 쫓겨 다닌 탓에 도혁은 숨이 찼다. 평소 체력과 폐활량이라면 자신 있던 그였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마스크 바깥으로 보이는 세상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이제 1점만 더 득점하면 채 선배가 이깁니다.”
심판이 도혁에게 말했다. 실력 차가 이렇게까지 크구나. 도혁은 그저 부끄러워 손도 발도 떨어지지 않았다.
“경기 계속해야지. 왜 가만히 멈춰 있어, 후배님?”
주원이 준비 자세를 잡으며 도혁을 쳐다봤다. 순간, 도혁은 마스크 너머로 주원과 눈이 마주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럴 리 없는데도 생생하게 그의 비웃음이 보였다.
얘 별거 아니네. 아무것도 아니었어. 선배가 그렇게 생각할까 두렵다. 안 돼. 그저 그런 후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도혁은 이를 꽉 깨물었다.
“프레, 알레!”
도혁은 힘껏 다리를 뻗으며 긴 팔을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중심부 수비가 뚫렸다. 상대의 칼끝을 거두어 내면서, 도혁의 칼이 주원의 명치를 찔렀다.
“파라드 리포스트(막고 찌르기)!”
심판을 맡은 선배가 놀라 외쳤다. 녹색 불이 점등된 것이다.
도혁은 마스크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주원 선배를 상대로 득점했어. 방금 건 내가 생각해도 대단했다. 와, 나도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역 세계 랭킹 1위를 상대로……!
하지만 다음 순간, 매서운 칼날이 도혁의 정수리를 과격하게 내리쳤다. 띵하고 골이 울리는 동시에 시뻘건 불이 번쩍 빛났다.
“헐……!”
“15:1로 채주원 선배 승. 게임 끝!”
주원이 마스크를 벗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고, 새하얀 얼굴에는 마찬가지로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저 땀이 번들거리는 것뿐인데, 마치 주원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아 도혁은 멍해졌다.
“아까 그 반격 멋있었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을 겨누더라. 좀 놀랐다.”
“아… 네, 선배님.”
“앞으로 기대가 커, 이도혁.”
허점투성이지만 일격은 상당히 매서운 녀석이네. 두고 보면 꽤 재미있겠어.
주원이 피식 웃으며 칼끝을 뻗었다. 도혁이 홀린 듯 그를 바라보며 챙, 칼끝을 맞부딪쳤다. 시합 때도 떨리지 않던 손이 잘게 떨렸다.
내 이름, 불러 줬어. 내 이름 외우고 있다. 나를… 날 알아봤다.
도혁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흥분이 그를 휩쌌다. 그가 멍하니 주원만 쳐다보고 있던 중, 민석이 손뼉을 쳤다.
“잠깐 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