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사람들의 눈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민석을 향했다.
“지금 대련하는 선배랑 후배가 주말 MT 짝꿍이 됩니다.”
짝꿍이라니? 민석은 어리둥절해하는 후배들을 향해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나갔다.
“신입생들 잘 들어. 금요일에 우리 펜싱부 MT가 있잖아. 그때 자기 짝꿍 선배랑 같이 다니는 거야.”
“그러면 하루 종일 붙어 다닌다는 건가요?”
도혁이 물었다.
“물론이지. 대절 버스에서도 같이 앉고, 식사할 때도 서로 챙기고. 게임도 같이하고, 잠도 한방에서 자고……. 그냥 일일 부부라고 생각하면 돼. 예를 들어서 방금 도혁이가 주원 선배랑 대련했잖아. 그러니까 이 둘이 한 팀, 아니 부부.”
일일 부부라니. 아, 현기증. 도혁은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도혁아! 너 어지러워?”
“애가 갑자기 왜 이래. 아까 머리 잘못 맞았나?”
주원이 도혁의 정수리를 살폈다.
“아닙니다. 저 괜찮습니다, 선배님. 저 선배님이랑 한 팀 돼서 너무 좋아요.”
도혁은 꼿꼿하게 몸을 세우며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드디어 친해지는구나. 기쁘다 못해 감동받은 얼굴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주원 선배라면 누구나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어 하는 선배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아리송한 분위기 가운데 속속들이 대련이 계속되었고, 사브르부 내에서는 총 열 명. 다섯 조가 확정되었다.
* * *
며칠이 지났다. 아직은 쌀쌀한 3월 둘째 주 금요일. 하늘은 맑고 바람은 청명하게 시렸다. 주원은 오늘도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날이야 춥지만 이럴 때일수록 웅크리지 않고 운동으로 몸을 풀어야 했다. 주원은 프로 운동선수답게 빠르게 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나둘, 하나둘. 주원은 속으로 구령을 붙이며 천변을 따라 달렸다. 4km 정도 뛰고 나자 시간은 8시. 이제 슬슬 MT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주원은 헐렁한 맨투맨을 걸치고 운동복 바지를 입었다. 청바지는 허벅지가 끼어서 잘 안 입고, 그는 이렇게 편안한 바지를 즐겨 입었다.
거울을 한 번 힐긋 본 그는 핸드폰을 들어 팬카페에 접속했다. 시니어 데뷔도 전부터 그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13만 명. 수많은 회원들이 볼 수 있도록 [프롬 주원] 게시판에 전체 공개 게시물을 생성했다. 그리고 셀카와 함께 간단한 글을 남겼다.
프롬 주원
오늘은 학교 MT 날입니다. 건강하게 잘 다녀올게요.
글을 업로드함과 동시에 1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열네 살 때 주니어 무대에 데뷔, 펜싱 인생 10년 차를 버티게 해 준 건 한결같이 그를 응원해 준 팬들이었다. 때로는 유명세가 부담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그는 이 팬카페를 휴식처로 여겼다.
카페 회원들은 보통 10대와 20대 여성이 많았는데, 가끔가다 남자 회원도 있었다. 그리고 주원은 알지 못했다. 그 남자 회원 중에 도혁이 있다는 사실을.
주차장으로 나온 그가 검은색 SUV를 찾았다. 차는 제법 크고 터프했으며, 안에는 펜싱 장비와 더불어 그의 취미인 RC카가 몇 대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 태울 거니까 정리 좀 해야지. 그다지 더럽다고 할 수는 없는 차였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사람을 태우는 셈이라 신경이 쓰였다. 조수석에 먼지를 탈탈 턴 그가 운전석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주원은 학교 쪽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오늘 MT는 신입생들을 데리고 가는 첫 MT이니만큼, 짝꿍 후배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도혁이라고 했었지. 말투에 묘하게 부산 사투리가 묻어나는 덩치 큰 놈. 웬만한 사람 곱절은 되는 놈을 대절 버스를 태우느니, 널찍한 자신의 차에 태우는 게 낫겠다 싶었다. 가다가 휴게소도 자주 들러 맛있는 걸 먹이기도 쉽고. 소풍 왔다고 좋아할 것 같아. 사람 잘 따르는 대형견 같은 면이 있으니까.
주원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주원의 차는 막힘없이 달려 정문을 통과했다. 체대 건물 앞에 위치한 운동장까지 가자, 대절 버스와 함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도혁과 신예지가 달려와 꾸벅 인사를 했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오빠, 차 가지고 왔네요?”
“응. 신입생 태워 가려고 특별히 가지고 왔지.”
“저요?”
도혁이 깜짝 놀라며 화색을 띠었다.
“도혁이 내 짝꿍이잖아. 그럼 나 얘 데리고 간다.”
“네, 오빠. 알겠어요.”
“이도혁, 뭐 해? 얼른 안 타고.”
“아? 네, 선배님. 지금 바로 탈게요.”
도혁이 조수석 쪽으로 돌아가서 문을 열었다. 워낙에 큰 차였지만 다리가 길어 한 번에 올라탈 수가 있었다. 그는 차에 오르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와… 차 엄청 크다.”
“너도 되게 크다. 이 차, 여자애들은 한 번에 못 올라오던데.”
“아… 그래요? 제가 요새 키가 더 커 가지고.”
“190cm 넘어 보이는데, 맞지?”
“네, 조금 넘어요.”
도혁이 조수석에 반듯하게 자리를 잡았다. 굉장히 공손한 자세로 가방을 끌어안은 채였다.
“무릎 위에 짐 무거워 보이는데. 뒷좌석으로 치워도 돼.”
“정말요? 감사합니다.”
도혁은 몸을 돌려 뒷좌석으로 가방을 옮겼다. 그러고는 깔끔하게 정리돼 있는 차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선배님, 방향제 좋은 거 쓰시나 봐요. 처음 맡아 보는 향인데, 시원하고 좋아요.”
“응? 나 방향제 안 쓰는데. 인공적인 냄새 싫어해서.”
“그래요? 지금 살짝 싸한 민트 향 돌잖아요.”
“아… 미안. 그거 내 페로몬일 거야. 나도 모르게 흘러 나갔나 보다.”
주원이 눈썹을 찡그리며 곤란한 낯을 했다. 애초에 알파란 한 무리 안에서 상호 간에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 알파의 본능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알파의 페로몬은 곧 공격으로 느껴지고 불쾌함을 유발하기 마련이었다. 즉 서로의 페로몬이 거북하기에 알아서 조심해서 감추는 것이 예의였다.
“너 알파라고 들었어. 그럼 내가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기분 나빴지. 미안하다.”
“아, 아니에요. 하나도 안 기분 나빴어요. 오히려…좋았어요.”
주원은 고개를 살짝 돌려 도혁을 쳐다봤다.
“알파 냄새가 좋다니 너도 참 별나다.”
“어…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요.”
“일단 출발하자.”
“네.”
안전벨트를 매야지. 도혁은 큼지막한 손으로 벨트를 쥐었다. 그런데 낯선 차라 그런지, 그의 동작이 굼떴다.
내가 매줘야겠네. 주원은 몸을 숙여 도혁 쪽으로 다가갔다. 철컥, 하고 안전벨트가 견고하게 결착되었다. 코끝에 도혁의 페로몬이 희미하게 감지되었다.
“너는 우디 계열이구나. 묵직하네.”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간 주원이 피식 웃었다. 당황한 도혁에게서도 페로몬이 흘러나와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혀… 형,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뿜어져 나왔나 봐요.”
“아냐. 나도 그랬는데 무슨.”
“죄송합니다, 형.”
“괜찮아. 그런데…….”
“네?”
“형 아니고 선배님.”
“아, 죄송, 죄송합니다.”
하늘 같은 4학년 선배님한테 형이라니. 이건 아니지.
주원은 상하 관계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트렌디한 껍데기를 지닌 꼰대라고도 했다. 주원은 그런 말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윗사람 아랫사람은 확실해야지.
슬쩍 살펴보니 도혁은 진심으로 미안한 듯 제 잘못을 뉘우치는 표정이었다.
주원은 잔뜩 졸아붙은 후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긴장을 풀어 주려 했다. 머리가 곱슬곱슬, 꼭 강아지 털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 잘 따르는 큰 개 같다니까.
“그렇게 죄스러워할 건 없고, 이제 정말 가자.”
주원이 차를 출발시켰다. 한 손으로는 카 오디오를 틀었다. 플레이리스트는 7년 전에 발매되어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곡이었다. 한국인이고 외국인이고 누구나 이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혹자는 그해를 이 노래가 발매된 해로 기억하기도 했다.
전주가 시작되자 도혁이 말을 꺼냈다.
“선배님, 이 노래 나왔을 때 기억하세요?”
“이 노래……? 음, 10년까지는 안 되었고… 5년은 넘었으니까 한 7, 8년 정도 전인 것 같은데.”
“이 곡이 7년 전 여름에 발매됐거든요. 그때 싱가포르 아시안 게임 있었잖아요. 저 그때 처음으로 선배님 경기 봤습니다.”
“아… 그래?”
“전 그때 사브르 해야겠다고 맘먹었어요. 결승전이 너무 인상적이었거든요. 마지막 팡트(런지 자세)가 너무 짜릿했어요. 그때 언론도 들썩였잖아요. 10대 검객이 아시아를 제패했다. 이런 기사도 나왔고요. 전 진짜 그 경기 보고 펜싱에 홀렸고, 선배님 존경하게 되고 그랬습니다.”
신입생 환영회에 이은 두 번째 고백이었다. 내가 이만큼 주원을 좋아한다는 존경의 표현이었고, 팬심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주원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도혁이 하는 말이 자신의 팬클럽 게시판에 올라오는 레퍼토리와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7년 전 그때가 생각났다. 그는 옆자리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혁을 힐끗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혁 후배가 나 많이 좋아하나 보네. 옛날 일을 다 기억해 주고.”
“네?”
“내가 가장 힘들게 싸운 시합이었고, 아직도 기억에 남는 대회야. 내가 지금껏 딴 메달 중에 가장 의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 다들 내가 가장 열심히 뛴 대회가 지난 올림픽 은메달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그 싱가포르 메달 제일 아껴. 그때 생각나게 해 줘서 고맙다.”
주원이 싱긋 웃었다. 그 산뜻하면서도 우아한 미소에 도혁은 할 말을 잃었다.
팡트. 날카로운 칼끝으로 가슴을 쿡, 찔린 기분이었다.
* * *
주원과 도혁이 가평 펜션에 도착한 것은 정오의 일이었다. 대절 버스는 일찌감치 도착해 있었는지 신예지와 사십여 명 부원들은 모두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도혁아! 주원 오빠, 어서 오세요. 둘이 짝꿍이니까 같은 방 쓰는 거 알죠? 저쪽 제일 안쪽에 남자 방 1호 쓰면 돼요.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서 게임 해요.”
도혁은 주원과 함께 펜션 안으로 들어가면서 신예지의 설명을 들었다. 에페, 플뢰레, 사브르 선후배 총 스무 팀 중에 게임으로 등수를 매겨 하위 열 팀이 요리와 뒷정리를 담당하고, 상위 열 팀은 놀고먹기만 하면 되는 룰이 정해졌다는 소식이었다. 사악하면서도 아주 재미있는 규칙이었다.
“와, 그럼 무조건 10등 안에 들어야겠네요.”
“아니지. 1등 해야지.”
주원은 자신 있다는 듯 검지로 숫자 1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들고 온 스포츠 백을 방구석에 휙 던지고, 그는 난데없이 훌렁, 맨투맨을 벗었다. 그러자 도혁이 찰싹 벽면으로 붙으며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서, 선배님……!”
“왜?”
“이렇게 갑자기 옷을 벗으시면,…….”
“뭐 어때. 남자끼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