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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5화 (44/115)

5화.

“뭐라고. 애인? 주원 오빠 애인 있었어요?”

후배들이 깜짝 놀랐다. 선욱은 그것도 몰랐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작 당사자인 주원은 잠잠히 있었다.

이걸 이렇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네.

“어… 그게.”

테이블에 둘러앉은 후배들의 눈이 일제히 주원을 향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착잡한 어투로 대답했다.

“실은 최근에 헤어졌어.”

“네? 어쩌다가요.”

“야,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야.”

조윤영이 구선욱에게 눈치를 줬다. 하지만 선욱은 구제 불능 수준으로 눈치가 없는지, 혼자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아니, 물어볼 수도 있지. 그 누나 우리 고등학교 출신이라서 나도 아는 사이란 말이야.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예쁜 오메가였는데.”

“진짜? 오메가들은 안 그래도 예쁜데 그중에서도 예뻤다고?”

또 다른 눈치 없는 1학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말도 마요. 내가 본 오메가 중에 최고로 예뻤으니까.”

“그만들 해.”

주원이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그의 얼굴은 살짝 굳어 있었다.

“이미 헤어진 사람인데 구구절절 입에 담을 건 아니라고 생각해.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가 바빠서 헤어졌어. 5월이면 나 진천 들어가야 되기도 하고. 그럼 진짜 못 만나게 되니까.”

그러고는 눈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여러 모금 연이어 마셨다. 좌중에 침묵이 깔렸다. 한 부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맞아. 올림픽 때문에 이제 슬슬 진천 들어가셔야 되죠. 거기는 외박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나온다면서요.”

“나도 진천 입소 한 번 해 봤는데, 말도 마. 거기는 바깥이랑 완전 격리 생활이야. 나도 그때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화제는 자연스럽게 진천 선수촌 생활로 옮겨 갔다. 주원도 이때다 싶어 그 사이에 섞여 선수촌의 재미있는 점, 그랑프리 준비 시즌에 선수촌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풀었다. 다시금 테이블에는 떠들썩한 웃음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살아났다.

주원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 테이블에서 웃지 못하고 있는 건 오직 도혁 혼자뿐이라는 걸.

한 시간 정도 식사가 이어지고, 진 팀이 와서 테이블을 말끔히 치워줬다. 거기에다가 술잔과 술병까지 세팅을 해 주니 본격적인 놀자판이 벌어진 것이다.

“여러분, 우리 대답 못 하면 한 잔씩 마시기 해요.”

조윤영이 신난다고 손뼉을 짝짝 쳤다.

“좋다. 주원 선배님도 같이 이야기하고 놀아요.”

“난 술은 더 못 마셔. 내일도 훈련 있어서.”

“괜찮아요. 마셔야 될 때마다 도혁이가 선배님 대신 마시면 되잖아요.”

“…나?”

“네가 주원 선배 짝꿍이잖아. 그럼 네가 대신 마셔야지. 자, 시작!”

엉겁결에 지목당한 도혁이 뭐라 할 새도 없이, 대화의 장이 열렸다.

게임 방식은 굉장히 단순 무식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이 당당하게 답변을 하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고, 곤란한 질문이라 대답이 막히면 차라리 술을 마셨다. 그런 후에 다음 타자를 지목하는 식이었다. 스타트는 조윤영이 구선욱의 질문을 받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 중에 맘에 드는 사람 있어?”

노골적인 질문에 부원들이 박수를 쳤다. 딱 봐도 선욱이 윤영을 좋아하는 티가 났다.

“응. 베타고, 남자네.”

윤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 중에 베타 남자라고는 선욱뿐이었다. 노골적인 화답에 야유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CC 탄생이네!”

왁자지껄 분위기가 요란해졌다. 한 차례 박수갈채가 있고 난 다음, 윤영이 다음 타자를 고를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쭉 둘러보더니 주원을 가리켰다.

“그럼 제가 선배님한테 질문 돌리겠습니다. 선배님,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지목을 받은 주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이상형이라.

“음…….”

단순하게 대답하자면.

“어른스러운 오메가.”

“아, 연상 좋아하시나 봐요?”

“응. 연상에 선이 가녀린 편을 만나 온 것 같아.”

대체적으로는 그랬다. 지나간 애인들을 생각하자면 공통점이 그거였다. 연상. 오메가. 몸 선이 가녀린 편. 그리고 또 뭐가 있지……? 딱히 기억나는 건 없었다. 그렇게까지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람들은 아니었으므로.

그래도, 공통점이 있다는 건 내가 그런 스타일을 좋아했다는 뜻이겠지. 주원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이상형을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오메가들은 전체적으로 그렇지. 알파나 베타랑은 신체 조건이 다르니까.”

선욱이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선욱이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 순간, 주원은 손을 들어 가볍게 그를 제지했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누구 지목할까?”

주원이 또다시 화제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이번에도 도혁이 혼자서 소맥을 세 잔째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음, 이럴 때 짝꿍을 챙겨 줘야겠지? 주원은 아까부터 잠자코 있던 도혁을 쳐다봤다.

“나는 도혁이한테 질문. 우리 펜싱부에 맘에 드는 사람 있어?”

“네?!”

그런데 도혁이 화들짝 놀랐다. 그 반응에 부원들이 깔깔 웃으며 그를 놀리려 들었다. 도혁은 손사래를 치며 조용히 하라고 눈썹을 찌푸렸다.

“어… 그거야 당연히……!!”

“우리 중에는 없을 테니까. 이 중에는 오메가 없잖아.”

주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구성원은 도혁과 주원만 알파고 나머지가 베타였다. 보편적인 성 관념으로 보기에 알파는 오메가와만 교제하고, 드물게 베타를 만났다. 알파와 알파가 만나는 일은 사하라 사막에 떨어진 바늘만큼이나 희박한 사례였다.

“야, 베타 좋아할 수도 있죠. 요새 알파 베타 커플이나, 오메가 베타 커플도 많아졌다고요.”

주원의 동기가 핀잔을 줬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모두의 눈길이 도혁을 향했다. 무언의 압박이었다. 뭐라도 대답하라는.

그러다가 도혁이 입을 열었다.

“있는데요.”

아주 뚜렷하고 선명한 목소리였다. 당찬 대답에 테이블 멤버들은 놀란 반응을 보였다.

“어머! 진짜야?!”

“와, 대박이다. 누군지 알려 줘.”

“너라면 곧이곧대로 말하겠냐?”

테이블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윤영은 도혁의 어깨를 붙잡고 앞뒤로 흔들어 댔다. 주원은 살짝 놀랐다. 벌써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구나.

“얼른 불어! 누구야! 나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단 말이야!”

“…모르겠고… 나 어지러워.”

도혁이 흐느적거렸다. 좌우 앞뒤로 힘없이 흔들리던 그가 이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주원은 깜짝 놀라 팔을 뻗었다. 하지만 도혁이 쓰러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도혁아!”

쿵. 도혁이 테이블에 머리를 찧으며 앞으로 엎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도혁은 라면 냄새에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눈을 뜨며 주변을 살펴보자 대부분의 남학생이 시체처럼 누워 있는 와중에 자신 역시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구석에 구겨져 있었다. 읏차. 그는 커다란 덩치를 펴며 기지개를 켰다.

내가 어제 뭘 어쨌더라. 다 같이 게임 하고, 주원 선배 옆에 앉아서 술 먹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무슨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아… 생각 안 나.”

이게 바로 필름 끊긴다는 거구나. 대학생들이 겪는다는 바로 그 무서운 필름 끊김.

아무리 생각해도 술자리의 막판, 자신이 무슨 행동과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별말이야 했겠어? 그냥 술 먹다 뻗은 거겠지.”

아무 일 없었을 거야. 만약 아니라면 이렇게 얌전히 잠들어 있을 리가 없지. 핸드폰에도 특별한 연락이 없고.

도혁은 가볍게 몸을 풀고 쓰러진 학우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어제 과음한 탓인지 찬물로 정신을 차리고 싶어 일부러 냉수로 샤워했다. 그러자 술이 좀 깨는 것도 같았다.

“아, 시원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 도혁은 머리에 수건을 얹고 펜션 마루로 나왔다. 구석에는 아직까지도 생존해 술을 마시고 있는 극소수의 신입생들이 보였으며, 주방 쪽에서는 구수한 라면 냄새가 풍겨 왔다.

아까 날 깨운 것이 바로 저 냄새구나. 해장하고 싶다.

도혁은 성큼성큼 걸어 주방에 도착했다. 라면 냄비를 긴 젓가락으로 휘젓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바로 주원이었다.

“주원 선배님?”

“어, 일어났냐?”

주방 창문을 통해 눈부신 햇살이 들어와 주원의 얼굴과 몸을 비췄다. 흰 티에 트레이닝 바지 하나를 걸쳤을 뿐인데 전신에서 빛이 났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잘생김이었으나, 도혁은 왠지 모를 설렘에 침을 꿀꺽 삼켰다.

“라면 먹을래?”

“아, 네. 안 그래도 냄새 때문에 깼습니다.”

“잘됐네. 나 혼자 먹기 적적했는데.”

“모자라진 않을까요?”

“세 개 끓이고 있었어.”

주원이 펄펄 끓는 냄비에 계란을 네 개 투하했다. 적당히 계란을 익힌 그가 빈 그릇과 김치를 세팅했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해요, 선배님.”

“너 일어날 줄 알았으면 더 끓이는 건데.”

주원은 거의 라면 두 개 분량을 도혁에게 덜어 주었다.

“선배님도 드세요.”

“네가 더 많이 먹어야지. 네가 후배인데 내가 더 많이 먹으면 좀 그렇잖아.”

그의 재촉에 도혁이 젓가락을 들었다. 평범한 라면에 불과한데도 맛있었다. 그건 아마 주원의 매너와 배려가 빚어 낸 맛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상하시네요.”

“내가?”

주원이 소리 내 웃었다.

“애인분들한테… 그런 말씀 많이 안 들으셨어요? 자상하다, 다정하다… 이런 말들.”

“글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넌 항상 네 일이 우선이야, 이런 말은 들어 봤어도.”

“…정말요?”

도혁이 눈을 깜빡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주원은 도혁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한번 닦아 준 다음 대답했다.

“응. 난 그다지 좋은 애인감은 아니었나 봐.”

“구체적으로 어떤…….”

“불겠다. 얼른 먹어.”

왜 다들 내 연애사에 이렇게 관심이 많을까. 주원은 사실 좀 이해가 안 갔다. 하다못해 이제는 신입생도 내 지나간 오메가들한테 관심을 갖네.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네.”

주원은 라면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면발을 씹는 후배를 보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그래도 얜 귀여워. 미워할 수 없는, 그런 구석이 있달까.

창밖으로는 햇살이 내리쬐고,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식탁은 평화로웠다. 어디까지나 주원 기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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