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라면을 먹고 나서 도혁이 설거지를 자처했다. 뽀득뽀득 그릇을 훌륭하게 설거지한 그에게 주원은 아이스크림을 하나 건넸다.
“애들 깨기 전에 우리가 먼저 먹자.”
“감사합니다, 선배님.”
“밖에 나가서 먹을까?”
“좋죠.”
두 사람은 잔디밭으로 나와 설렁설렁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한참 가다 보니 벤치가 나와, 나란히 앉게 됐다. 도혁은 살살 눈치를 보다가 이야기를 살짝 꺼냈다.
“저, 선배님.”
“응.”
“전화번호 여쭤봐도 됩니까?”
말과 동시에 핸드폰을 주원의 얼굴 앞에 들이댔다. 주원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긴 손가락으로 툭툭, 번호를 찍었다. 그가 번호를 저장하는 동안 도혁은 또 다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한 가지 더요.”
“어, 말해.”
“…선배님 어제 한 이야기 중에서요. 지금까지 항상 오메가만 만나셨다고 했잖아요. 그거 조금 더 여쭤봐도 돼요?”
“그건 갑자기 왜.”
와삭. 아이스크림을 크게 깨문 주원이 도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냥 궁금해서요.”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다음에도 오메가 사귀실 거예요? 꼭 오메가여야만 하나요?”
주원의 뚜렷한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당연하지. 난 알파니까. 어제도 말했듯이 난 베타한테 관심 없어. 알파는 말할 것도 없고.”
“…네, 그렇군요.”
도혁이 착잡한 투로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별게 다 궁금하네, 우리 후배님은.”
주원이 도혁의 뺨을 툭툭, 한 손으로 가볍게 쳤다. 그에게는 진지한 대답을 내놓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그저 눈앞의 후배가 하찮고 또 귀여울 뿐이었다.
“…그러게요.”
저는 왜 그런 걸 궁금해할까요, 선배님.
그 의문은 도혁이 MT에 참가하는 내내 지속되었다. 아침부터 악랄한 스쿼트 훈련을 받을 때도 그랬고, 타이어를 끌고 공터를 행군할 때도 머릿속에는 둥둥 물음표가 떠다녔다.
“자, 정신 통일을 위해 산에 오른다!”
“으아아, 너무 힘들어!”
“미치겠다. 제발 살려 주세요, 주원 선배님.”
MT의 이틀 차 마무리 코스는 가파른 바위산 타기였다. 지친 새내기들이 엉엉 울부짖는 가운데 주원은 삑삑, 호루라기를 불며 산을 올랐다. 동작이 얼마나 날렵하고 대담한지 꼭 전문 산악인 같았다. 불과 어제까지의 도혁이었다면 멋있다며 감탄하기 바빴겠지만, 지금의 도혁은 기분이 묘했다.
왜 주원과 그가 만났던 오메가들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오직 그 생각에 골몰하느라 산에 오르는 게 힘든지도 몰랐다.
“야, 넌 힘들지도 않냐? 이 체력 괴물아.”
장용희가 헉헉대며 도혁의 뒤를 쫓아왔다. 도혁은 그저 산꼭대기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일까… 신경 쓰여 미치겠네. 주원 선배의 애인이 뭐라고.
도혁은 멍하니 다리를 움직여 묵묵히 산에 올랐다. 얼굴에는 수심이 한가득이었다. 주원은 곡소리를 내며 뒤따라오는 후배들 사이, 눈에 띄게 암담해 보이는 도혁을 발견했다.
“도혁아, 힘들어?”
“아, 네?”
“얼굴이 말이 아닌데. 좀 쉴래?”
“아닙니다. 힘들지는 않아요.”
도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눈빛은 복잡미묘해 보였다. 가만히 보니 팔다리는 아주 멀쩡하고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냥 표정만 안 좋았다.
혹시 기분이 심란한가?
“흠, 진짜 괜찮아?”
“네…….”
도혁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주원은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가설을 떠올렸다. 이곳은 자유분방한 MT의 현장, 사랑의 작대기가 복잡하게 오가는 장이다. 새내기가 갑자기 우울해졌다면 그건 애정 문제 때문일 수 있었다.
어젯밤에도 부원 중에 맘에 드는 사람이 있다고 했었지. 잘 안되어 가나. 우리 부원 중에 오메가가 누가 있더라. 몇 안 되는데. 걔네가 다 애인 있었던가.
주원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스무 살짜리의 풋사랑에 선배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그저 힘내라는 말뿐.
“힘내. 힘들어도 쉬지 말고 올라가자.”
주원이 도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도혁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두 사람은 천천히 정상에 올라갔다. 부원들이 모두 모이자, 단체 사진 찍을 시간이 되었다. 늘 비싼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민석이 카메라를 꺼내 들고 구도를 잡았다.
도혁과 주원은 키가 크다는 이유로 양옆에서 현수막 드는 역할을 맡았다. [최강펜싱-국가가 허락한 검객-]이라는 문구가 바람에 펄럭였다.
“다들 활짝 웃으세요! 하나, 둘, 셋!”
찰칵. 소리와 함께 모두의 환한 낯이 프레임에 담겼다. 단, 도혁은 혼자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먼 산을 쳐다보는 모습으로 찍혔다. 이 사진은 MT가 끝난 뒤 펜싱부 SNS에 업로드되었는데, 단연 도혁이 타과 학생들의 이목을 끌었다.
댓글
이 반팔 티 누구야? 허벅지 난리 났다.
몸은 화났는데 눈빛은 아련하네. 펜싱부에 이런 애가 있었어?
누군지 모르겠는 걸로 봐서 신입생 같은데. 재학생이었으면 진작 신상 털렸을 듯.
이 훈남 이름 아는 분 제보 바랍니다.
대학 사회의 소문이란 아주 빠른 법이었다. SNS 유저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도혁의 이름과 학년, 학과, 대회 수상 경력을 탈탈 털었다.
그는 SNS를 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업로드한 사진을 바탕으로 [체대 훈남 이도혁 과사 모음]이라는 게시물이 생성되기도 했다. 그의 인기는 무섭도록 상승했고, 그를 앓다 못해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칠 펜싱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항상 후원금에 목말랐다. 비정기 훈련, 정기 모임, MT와 합숙 때마다 부원들이 너무 많이 먹는 탓에 늘 돈이 모자랐던 것이다. 체대에서 교부해 주는 쥐꼬리로는 연명하기가 너무나 힘든 탓에, 펜싱부는 이번 후원 주점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이었다.
후원 주점은 3월 셋째 주, 체대 전 학과가 학생회관 앞 광장에 부스를 짓고 타과생들을 호객해 술을 파는 전통 있는 행사였다. 이때가 아니면 봄에는 돈을 당길 방법이 없었으므로 집행부는 아주 신중하게 호객 담당 부원을 선정하곤 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올해는 도혁을 간판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 * *
“제가 호객 담당이라고요?”
“그래. 얼굴마담이라고 할 수 있지. 이 앞치마 허리에 두르고, 위에는 이 하얀 셔츠 입어. 다른 과 학생들 지나갈 때마다 자연스럽게 우리 부스로 유인만 하면 돼. 일 자체는 되게 쉬워. 하지만 너 같은 얼굴과 몸을 가지기란 어렵지.”
신예지는 신이 나서 도혁에게 각종 아이템을 두르게 했다. 키가 크고 피지컬이 남달라서 걸치는 족족 화보가 됐다.
“이렇게 입으면 되나요?”
“어, 끝내준다. 작년에 주원 선배가 호객했을 때만큼 돈 많이 벌릴 것 같아.”
“그때 역대급 매출이었던 거 기억난다. 도혁이가 오늘 그 기록 한번 깨 보자.”
민석이 파이팅을 외치며 도혁의 등을 떠밀었다. 도혁은 선배들의 등쌀을 이기지 못하고 광장 한복판에 섰다. 20년 평생에 호객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었고, 서버를 연상시키는 복장 또한 낯설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거야. 소리라도 질러? 아니면 내가 먼저 손님들한테 다가가서 주접을 떨어야 하나?
고민에 빠지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진지한 표정이 나왔다. 저 멀리서 걸어오던 한 무리의 학생들이 그런 도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쟤 걔 맞지? SNS에 떴던 잘생긴 신입생 아니야?”
“맞네. 여기 체대 주점이잖아. 바로 뒤에 펜싱부 부스인 걸로 봐서 확실해.”
“와, 근데 실제로 보니까 엄청 포스 있다. 덩치 좀 봐.”
“실은 나도. 안 웃고 있어서 그런가? 분위기 있어서 말 걸기 좀 어려운데.”
학생들이 쭈뼛거리고 있을 때였다. 펜싱부 부스에서 주원이 걸어 나와 도혁의 옆에 섰다. 그는 블랙 셔츠에 도혁과 똑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미쳤다. 채주원 아니야?”
“대박. 나 채주원 처음 봐. TV보다 훨씬 잘생겼어. 진짜 무슨 왕자님 같아!”
“어, 야. 그런데 저 신입생 왜 갑자기 표정이 180도 바뀌어? 채주원 부하… 뭐 이런 건가? 인사를 하다못해 안겨 드는데……?”
“부하라기보다는 반려견 같아. 너무 신나 보인다.”
그들은 삽시간에 웃는 얼굴로 변한 도혁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주원이 등장하자마자 무뚝뚝한 이미지의 체대생은 온데간데없이 한 마리의 대형견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주인이 놀자고 다가왔을 때, 꼬리를 붕붕 흔들며 기뻐하는 그런 반려견 말이다.
“선배님! 어쩐 일이세요.”
“나 그냥 가볍게 들러본 건데 애들이 나 잡았어. 나더러 너랑 같이 호객이나 하다 가래. 내가 4학년까지 이 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주원이 앞치마 허리띠를 묶으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너랑 하니까 재밌을 것 같다.”
싱긋. 섬세하게 그린 듯한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혁은 홀린 듯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끄덕였다.
“네. 정말… 재밌을 것 같아요. 많이요.”
그다음부터는 빈말이 아니라 정말 재밌었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 이목을 끌어, 펜싱부 주점은 사람으로 미어터졌다. 주원과 도혁이 웃으며 길을 가로막으면 여학생이나 오메가들은 백이면 백 주점으로 향했고, 가끔은 남학생들마저 발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신예지는 신이 나서 두 사람을 더욱 적극적으로 부려 먹었다.
“오빠, 도혁아. 한 바퀴 돌면서 손님들 더 끌어와 줘요.”
“예지야, 돈 많이 벌었을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쉬게 해 줘. 도혁이 실시간으로 살 빠지고 있어.”
“당길 때 바짝 당겨야 해.”
“내가 이번 그랑프리 포상금 떼서 펜싱부에 기부하겠다고 했잖아.”
“그건 그거고 주점은 주점이죠.”
“못 말리겠다. 가자, 도혁아.”
신예지의 닦달에 두 사람은 터덜터덜 길을 나섰다. 도혁은 주변 건물들을 둘러보며 주원에게 물었다.
“선배님, 경영대 쪽으로 가 볼까요? 그쪽에 99주년 기념관도 있고 도서관도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닐 것 같아요.”
“거기 말고, 문과대로 가자.”
“문과대는 왜요?”
“미친 벚꽃 보면서 땡땡이치려고.”
주원이 장난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