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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7화 (46/115)

7화.

문과대는 캠퍼스의 구석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편이었는데, 그 뒤쪽으로 야트막한 벚꽃 언덕이 있었다. 그곳은 유난히도 볕이 잘 들어 벚꽃의 개화가 말도 안 되게 빨랐고, 덕분에 나무들은 ‘미친 벚꽃’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3월 셋째 주인 지금, 벌써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들었으나, 마땅히 갈 시간이 없었다. 거길 황소만 한 남자 후배랑 같이 가게 됐다니, 4학년 마무리 제대로 하네. 주원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좋아요. 당장 가요, 선배님!”

도혁은 아주 신이 난 모양이었다. 그렇게 좋은가? 하긴, 땡땡이는 언제나 옳다.

말로 듣던 것보다도 문과대 언덕은 더 한가롭고 아름다웠다. 도혁은 연신 감탄사를 남발하며 언덕 가득히 만개한 벚꽃을 눈에 담았다.

“진짜 예뻐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피었지.”

“좋아하는 걸 보니까 데려오길 잘했네.”

“선배님,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이리 와 봐.”

나무 그늘 아래 앉은 주원이 손으로 탁탁,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도혁은 그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붙어 앉았다.

“네, 선배님.”

“가만히 있어.”

“예?”

뭐 하는 거지. 도혁이 파악할 새도 없이, 주원이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예상한 대로 딱딱하니 좋네. 높이도 딱이고.”

그러더니 눈을 감고 바로 자는 자세를 취했다. 도혁이 가슴이 고장 난 것처럼 쿵쾅거렸다.

이렇게 기습을 하는 법이 어딨단 말인가. 이건 방어가 안 되는 공격이었다.

“서, 선배님.”

“어허. 베개가 움직이는 법이 어딨어.”

당황한 도혁이 주원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주원은 제 머리를 더욱 꽉 눌렀다. 도혁은 죽을 노릇이었다. 허벅지에도 심장이 달렸나,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는 감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주원은 무척이나 편안한지, 슬쩍 웃었다. 결국 도혁은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얌전히 다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아, 좋네. 봄이다.”

주원이 벚나무를 가리켰다. 도혁이 위를 올려다보자 그들의 머리 바로 위에 있는 나무가 무척이나 풍성하게 만개해 곧 있으면 꽃잎이 떨어질 것 같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도 미풍이었으며, 햇빛도 따사로웠다.

이 풍경을 이제는 볼 수 없다는 게 아주 아쉬울 만큼 오늘 이 풍경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이 나무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네.”

“네?”

“나 5월 되면 진천 들어간다고 했잖아. 올림픽 때까지 쭉 거기 있다가, 끝나면 또 세선(세계 선수권 대회) 나가거든. 그러면 얼렁뚱땅 졸업할 때 돼 버리지. 그니까 학교는 지금이 사실상 끝이야.”

끝. 마지막. 도혁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단어들에 얼굴이 굳었다.

“아… 맞네요. 곧 입촌하신댔죠.”

주원이 하는 말들은 모두 맞는 말들이었다. 도혁은 갓 입학한 새내기이고, 주원은 본업이 국가 대표고 부업이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도혁은 국가 대표가 되기에는 아직 모자란 성적이니, 앞으로는 길이 엇갈린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은 3월 둘째 주. 곧 있으면 올림픽 출전 국가 대표들이 모여 진천에서 합숙을 하는 시즌이었다.

현재 사브르 종목의 국가 대표는 총 네 명. 주장은 채주원이었고, 그 동료로는 2학년 김민석이 유명했으며, 해외에서 강화 훈련 중인 3학년 안규영도 엔트리에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체육 건강 공단 소속의 박상진이라는 선수였다.

그 외에는 후보 선수 네 명이 더 있어 도합 여덟 명이 사브르를 책임지고 있는 구조였다. 주니어에서 시니어 리그로 올라온 지 만 1년밖에 안 된 도혁은 포인트가 모자라 국내 랭킹 19위에 그쳤기 때문에 아직 국대 선발은 무리였다. 그렇다 보니 진천 입소니 올림픽이니 하는 이야기가 그저 멀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럼 선배님, 4월 말까지만 뵐 수 있는 거예요?”

“뭐, 그렇지. 나중에 경기에서 보면 인사 잘해라.”

주원은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이내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도혁은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울적함을 느꼈다.

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져 가는구나. 올림픽에서 선배는 크게 활약하겠지. 세계 랭킹 1위니까 분명히 잘할 거다. 메달도 따고, 계속해서 큰 무대만 서고, 나 같은 후배가 아닌 어른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거야.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서.

하지만 계속해서 보고 싶었다. 범접하기 힘든 이 사람 앞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날카롭고 우아한 이 얼굴이 웃는 것을 보면 가슴이 뻐근했다. 친해지면서 가슴이 자꾸만 뛰었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고 싶다. 힘껏 팔다리를 뻗어서 선배의 마음을 열어, 선배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도혁의 가슴이 아려 왔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자꾸만 심장이 신호를 보냈다. 혼란이 가중되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이 마음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동경일까, 존경일까, 그것도 아니면.

“어……?”

그때였다. 갑자기 그들이 있는 언덕에 바람이 일었다. 벚나무 가지가 떨리며 꽃잎이 파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혁은 퍼뜩 주원을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그의 얼굴에도 꽃잎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런. 떼어 드려야겠네.

그의 새하얀 뺨에 도혁은 살살 손을 뻗었다. 잠을 깨우지 않으려, 최대한 부드러운 손길로 다가섰다. 그런데 도혁의 손이 얼굴에 닿는 순간 주원이 반짝 눈을 떴다. 새까만 눈동자가 도혁의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 눈은 도혁이 살아오면서 본 것 중 가장 빛나고 투명했다.

아.

나, 사랑에 빠졌구나.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혁은 비로소 제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 * *

실컷 땡땡이를 치고 오니 이미 해가 떨어진 시간이었다. 손님 하나 없이 돌아왔다며 두 사람에게 신예지는 투덕투덕 화를 냈다. 그래도 돈을 많이 벌어 기쁜지 연신 깔깔대며 매상 자랑을 하기 바빴다. 주원도 신예지와 짓궂은 장난을 치며 소리 내 웃었다.

손님들이 만석이 된 시점에 주원은 가방을 둘러메고 부스 밖으로 나왔다. 쪽문으로 나가려는 그를 도혁이 쪼르르 쫓아 나왔다. 주원은 오늘 하루 잘 따라다녀 준 후배가 마냥 귀엽고 기특했다.

“도혁이 오늘 내 베개 노릇 하느라 수고했다.”

“선배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또 보자.”

주원이 도혁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그리고 뒤돌았다. 그때 등 뒤에서 다급한 부름이 들렸다.

“저기요, 선배님!”

“응?”

“내일 뭐 하세요? 토요일인데요.”

“연맹에서 국대 소집한대서 잠깐 모여. 그런데 그건 왜?”

“그러면 끝나고는 시간 되세요?”

“뭐… 따로 뭐 없긴 한데.”

“그럼 저랑 만나요!”

도혁이 허겁지겁 외쳤다. 주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 만나고 싶어?”

“네!”

“너랑 나랑 만나서 뭐 해. 운동? 개인 교습이라도 받게?”

“그건 아니고요. 영화… 보고 싶습니다.”

“웬 영화?”

“<별들의 전쟁> 새 시리즈 나왔어요. 칼싸움하는 영화잖아요. 공부가 될 거예요.”

도혁이 손으로 칼을 휘두르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주원이 피식 웃었다.

“맞네. 광선검이긴 하지만 그것도 칼싸움이지. 그래, 보러 가자. 그럼 나 이만 갈게.”

“네, 선배님! 안녕히 가세요.”

주원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쪽문을 나섰다. 뒤에 진득한 시선이 따라붙은지도 모른 채.

* * *

이튿날, 날씨가 유난히도 맑았다.

주원은 드레시한 셔츠를 꺼내 걸치고 전신거울을 바라봤다.

너무 멋을 냈나? 음, 신입생하고 영화 보는데 이렇게까지 과할 필욘 없지.

그는 셔츠를 다시 벗고서 평소 즐겨 입는 맨투맨을 꺼내 들었다.

주원과 도혁이 만나기로 한 영화관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주원이 영화관 앞에 도착했을 때, 몸에 핏 되는 셔츠를 입고 슬랙스를 곁들인 도혁이 저 멀리 보였다. 지나가는 여자들이 그를 한 번씩 쳐다봤다.

오, 잘생겼네.

주원은 가볍게 감탄하고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주원을 발견하자마자 도혁은 우렁차게 외쳤다.

“선배님! 어서 오세요.”

“여기 주차할 데가 없어서 뱅뱅 돌았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

“아니에요. 조금밖에 안 늦으셨는데요.”

“얼른 들어가자.”

그들이 영화관 안으로 들어서자 1층 엘리베이터가 막 닫히려는 타이밍이었다. 주원은 긴 팔다리를 뻗어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 안이 만원이라 두 사람의 몸이 꽉 밀착되었다.

그런데 도혁이 자꾸만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불편해? 너무 좁나.”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도혁이 헛기침을 했다. 주원은 도혁의 가슴에 등을 밀착하다시피 하며 11층까지 올라갔다.

“영화 티켓 끊으려면 저기로 가야 하지?”

주원이 지갑을 꺼내 들며 무인 발매기를 가리켰다. 그러자 도혁은 뒷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티켓을 냉큼 꺼냈다.

“제가 미리 예매해 놨어요.”

“오, 내가 얻어 보는 거야?”

“제가 보자고 했으니까요. 어서 들어가요, 선배님.”

“그럼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어… 그런데 왜 상영관이 커플관이야?”

주원이 티켓을 들여다보았다. 티켓에는 <스페셜 커플관: 2인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그게, 이번 시리즈가 워낙 화제잖아요. 빈자리가 그것밖에 안 남았더라고요.”

“그래? 살다 보니 알파 후배랑 이런 자리에 다 앉아 보네. 별일이다.”

어쩔 수 없지. 주원은 별생각 없이 상영관으로 입장했다. 두 사람의 자리는 가장 구석진 곳에 마련된 2인석으로, 하나의 소파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는 식이었으며, 양옆으로 칸막이가 세워져 있어 상당히 폐쇄적이었다. 남들 시선 피해서 손을 잡거나 그 이상의 스킨십을 해도 티가 나지 않는 구조인 것이다.

“좌석이 좀 야릇하네.”

주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그가 칸막이 친 자리 안쪽에 앉았다. 도혁도 그를 따라 나란히 앉았다. 장정 둘이 앉자 소파가 꽉 차면서 자연스럽게 몸이 닿았다.

“네가 덩치가 크긴 크구나. 몸이 꽉 찬다.”

“죄송합니다. 공간이 이렇게 작을지 몰랐어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주원은 리클라이너에 편안히 기대었다. 곧 어둠이 깔리면서 <별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첫 장면은 외계 전사들이 빨간 광선이 뿜어져 나오는 칼을 들고 싸우는 신이었다. 챙챙, 휘리릭.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화려한 액션이 이어졌다.

영화는 무척 흥미로웠다. 주원은 스크린에 집중하며 몇 분에 한 번씩 도혁이 무릎에 얹고 있는 팝콘 통에 손을 집어넣었다. 자꾸만 집어 먹다 보니 통의 수위가 삽시간에 낮아졌다.

휙휙. 팝콘이 손에 쉽사리 잡히지 않자, 주원이 통의 바닥을 힘 있게 훑었다.

“흡.”

도혁이 숨을 멈추며 무릎을 부르르 떨었다. 주원은 그제야 자기가 아차, 하며 손을 꺼냈다. 그러고는 귓속말로 ‘미안해’를 속삭였다.

남의 허벅지를 인정사정없이 간지럽히다니, 이건 매너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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