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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8화 (47/115)

8화.

주원은 그 이후로 팝콘 통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로부터 10여 분 뒤, 영화가 끝났다. 주원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밌네. 저번 시리즈보다 더 액션이 좋아진 것 같아. 근데 도혁이 너 표정이 왜 그렇냐?”

거의 사색이 된 도혁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주원이 물었다. 도혁은 기가 빨린 얼굴로 대답했다.

“아… 너무 몰입했나 봐요……. 힘이 드네요.”

그가 팝콘 통을 꼬옥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야? 하긴, 너 이 영화 광팬이라고 했지. 나가는 길에 굿즈 구경 좀 할까?”

“굿즈요?”

“입구에 특별 판매 부스 있던데. 구경 가자.”

주원이 바깥으로 나가 길을 앞장섰다. 상영관 바로 바깥에 <별들의 전쟁> 굿즈 판매 숍이 있었다. 빌런 가면, 실제 크기의 광선검, 캐릭터 포스터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와중에 주원이 진열장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20cm 남짓 크기로 줄여 놓은 미니어처 광선검 두 개가 <젓가락>이라는 이름을 달고 고이 누워 있었다.

“이것 좀 봐. 빨간 광선 들어오는 젓가락이야.”

“와, 너무 귀엽다. 선배님, 이거 진짜 아이디어 상품이네요. 불 켜고 밥 먹으면 재밌겠죠?”

도혁이 웃으며 젓가락을 바라보았다. 주원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점원을 불렀다.

“젓가락 하나 주세요.”

“어, 선배님 사시려고요?”

“너 선물해 주려고.”

“정말요?”

“당연하지. 난 빈말 안 해.”

주원은 그 즉시 젓가락을 사서 도혁의 품에 안겨 주었다. 도혁은 활짝 웃으며 젓가락 세트를 받아 들었다.

“한 짝은 선배님 드릴게요.”

“나눠 가지자고?”

“네. 이러고 놀아요.”

도혁이 주원의 젓가락에 제 젓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딱(공격).”

장난스러운 손짓에 주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파라드(수비)를 미처 못 했네. 도혁이 1점.”

이번에는 주원이 도혁의 젓가락을 튕겨 냈다.

“콩트라 아딱(역습). 나도 1점이야.”

“역시 선배님이시네요.”

“잘 간직해.”

“물론이죠.”

영화관을 나온 두 사람은 주원이 자주 찾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무려 50년 전통의 소갈비 집에, 고급스러운 한옥 인테리어를 갖춘 집이었다.

메뉴판을 펼친 도혁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주원이 그에게서 메뉴판을 빼앗아 들었다.

“내가 살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먹어. 일단 소갈비로 12인분 시켜 볼까?”

“네? 12인분이요?”

“너 보아하니 그 정도는 먹을 것 같아.”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비싸잖아요. 선배님, 죄송해서 안 돼요.”

“나 이번 대회로 포상금 많이 받았다.”

“아, 그렇죠. 그래도 죄송해서…….”

도혁이 멋쩍은 듯 뒷덜미를 긁적였다.

“대신 다음번에는 제가 사게 해 주세요.”

“그래. 꼭 큰 대회에서 우승해서 나 24인분 사 줘.”

“네, 약속 드릴게요.”

곧 고기가 서빙되었다. 도혁은 싱글벙글하며 고기를 구웠다. 주원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먹어 보았다. 굉장히 고소하고 육즙이 촉촉했다. 그가 감탄하며 말했다.

“진짜 맛있다. 너 근데 진짜 고기 잘 굽는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 외식하면 고기는 무조건 제가 구웠어요. 남들이 가위, 집게 절대 못 잡게 해요. 전 제가 뭘 잘해서 남이 행복해하는 거 보는 게 취미거든요.”

“귀여운 짓 하면서 컸네.”

주원이 도혁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도혁이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혹시 선배는 뭐 잘해요? 그니까, 취미요.”

“음… 취미라고 해야 하나. 바둑 자주 둬.”

“바둑이요? 우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원래 꿈이 바둑 기사였거든.”

주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열네 살, 펜싱에 반해 칼의 세계에 입문하기 직전까지 바둑을 전문적으로 배웠었다. 아마 자신의 세계를 통째로 뒤흔든 ‘서희우’의 짜릿한 플레이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둑을 계속해 프로 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 검은 돌 흰 돌 가지고 하는 그 바둑이요?”

“어.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랑은 자주 둬.”

“와, 그러셨구나. 그럼 정장 입고 막… 손으로 돌 굴리면서, 얼굴 찌푸리고 그러셨어요?”

“손으로 돌 굴리는 건 비매너야. 상대방 집중을 흩트려 놓는 행위거든.”

주원은 엉뚱한 후배다운 질문에 웃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선배랑 바둑, 잘 어울려요. 그것도 따지고 보면 사각형 안에서의 싸움이잖아요.”

“잘 아네. 바둑판도 일종의 피스트(펜싱 시합장)지. 서로 공격하고 수비하고, 기습하고 역습하고. 소리만 안지를 뿐, 치열해.”

“네, 그럴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은 소리 지르면서 싸우는 게 더 좋아. 상대 허점 치고 들어가는 게 짜릿하고.”

웬만해서는 잘 들려주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 이 후배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속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도혁은 신기하다는 눈빛을 띠며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어쩌다가 펜싱으로 전향하신 거예요?”

“아, 그게 말이지.”

벌써 9년 전이구나. 옛 기억을 되살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각이 그녀를 향했다.

“갑자기 꽂혔어. 너도 알 텐데. 마드리드 대첩 말이야.”

“아! 에페 서희우 선수님이 역전승했던 그 시합이요?”

“응, 맞아. 그거 보고 나도 펜싱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바로 운동 시작했어.”

서희우. 그녀는 도혁도 잘 아는 선수였다. 아니, 펜싱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존재였다.

오메가라는 형질을 극복하고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펜싱 여신.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검객. 전광석화 같은 찌르기와 불꽃같은 팡트로 빛을 내는 사람. 펜싱을 예술로 승화시킨 유일무이한 선수. 서희우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늘 화려했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선배야, 희우 선배.”

“사브르가 아니라 에페 선수를 제일 존경하신다니 의외네요.”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그런데 난 그 누나의 승부사 근성을 좋아하는 거라서. 마드리드 세계 선수권 대회 때도 마지막 한 점, 한 점을 추격해서 결국 역전해 낸 거잖아. 난 그런 사람이 좋아.”

주원의 말을 듣다 보니 도혁 역시 진지해졌다.

“저도입니다.”

“응?”

“저도 가장 존경하는 선수, 선배라고요.”

“나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한 말,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원래 무슨 종목을 주 종목으로 할까 결정 못 하고 있던 시기였거든요.”

그때는 도혁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다고 해도 좋을 방황의 시기였다. 에페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고, 플뢰레 감각도 나쁘지 않았던 그였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 주원의 등장은 하나의 계시였다.

“그러다가 선배님 싱가포르 아시안게임 보고 내 길은 사브르다, 단박에 느낄 수 있었어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나도 저렇게 포효하면서 경기에서 모든 걸 쏟아붓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원래 저를 에페로 보내려던 코치님, 부모님 설득해서 사브르로 왔거든요.”

“그랬구나. 후회는 안 해?”

“그럴 리가요. 저한테 있어서 항상 목적지는 선배님 같은 사브르 선수가 되는 거였고, 벌써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이 대학 왔으니까 열 계단 중에 첫 번째 계단은 오른 거 아닐까요.”

도혁이 민망한 듯 옆머리를 긁었다. 주원은 싱긋 웃었다. 누군가의 우상이 된다는 건, 정말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도혁은 뭉게뭉게 고기 연기 너머로 주원의 주변만 밝아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동시에, 아무래도 거사를 앞당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쉽게 말하자면, 고백을 저질러야겠다는 욕구가 치민 것이다.

스무 살의 설익은 판단력은 천천히 다가간다거나 간질간질 썸을 타며 상대를 파악한다는 개념을 무시했다. 그저 직진, 돌진.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사귀고 싶어. 선배랑 애인하고 싶다. 손잡고 싶고 껴안고 싶고… 그다음 단계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되는대로 다 닿을래. 나 선배 냄새도 너무 좋아. 내 애인 해서 민트 향기도 실컷 맡고 싶어.

풋풋한 마음에 한번 불덩이가 내려앉자 이내 그 감정은 활활 불타는 화산이 되었다. 도혁은 단 며칠 만에 넘치는 혈기와 열정을 주체하기 힘든 지경에 빠져들었다.

* * *

도혁은 매일 밤 주원을 생각하느라 잠을 설쳤다. 어떤 사랑 노래를 들어도 자신의 마음을 가사로 옮긴 것만 같았으며, 로맨스 영화를 보면 주인공에게 심각하게 감정 이입이 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주원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시크함, 매너, 잘생긴 얼굴과 늘씬한 몸매, 펜싱을 향한 사랑, 스포츠맨십. 그리고 가끔가다 보여 주는 부드러운 미소. 그럴 때는 또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답다. 쉽게 말해, 그 무엇 하나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멋있고, 또 근사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풋사랑의 감정에 도혁은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고백하자. 선배한테 내 사랑을 전달하는 거야. 어떻게?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뜨겁게.

그리하여 도혁은 자그마한 일기장에 계획을 적으며 스스로 다짐했다.

첫째, 우선 나는 주원 선배의 가장 친한 후배 자리를 꿰찬다. (친목 도모)

둘째, 그다음으로는 분위기가 무르익도록 주도한다. (소위 썸)

셋째, 달콤한 키스와 함께 고백해 선배의 애인이 된다. (성공적 결말)

주원과의 연애라니, 그가 내 것이 된다니. 도혁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비록 애인이 있어 본 적은 없지만 연애를 하면 어떻게 지내는지는 간접 경험을 통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허구한 날 만나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심심하면 스킨십을 하고, 둘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 아무도 끼어들 수 없게끔 찰싹 달라붙어서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이가 바로 애인 아니던가?

내가 만약 주원 선배의 애인이 된다면 최대한 달콤하고 자상한 남자친구가 되어 주겠다. 온갖 훈련으로 심신이 지친 그에게 애교를 부려 주고, 매일 웃게 해 주겠다. 뽀뽀도 맨날 해야지. 그건 연인들끼리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니까.

아! 어떡해! 너무 좋아.

도혁은 기숙사 침대를 퍽퍽 때리며 이리저리 굴렀다.

참으로 섣부른 결심이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으나, 애석하게도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주원 입장에서는 신입생의 철없는 속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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