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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9화 (48/115)

9화.

주원이 화성시 펜싱 스타디움에서 국대 멤버들과 한참 땀을 빼고 있는 중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어 마스크를 벗고 핸드폰을 살피자, 오늘도 도혁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선배님, 뭐 하세요?

요즘따라 연락이 잦네. 주원은 대강 답장을 써넣었다.

오늘 하루 종일 훈련.

그럼 얼굴 보기 힘들겠네요 ㅜㅜ 내일은요?

내일도 새벽부터 국대 소집.

그렇구나. 식사는 하셨어요?

“주장! 애들 챙겨서 나와라. 회 먹으러 가자.”

때마침 코치가 주원을 불렀다.

“예! 알겠습니다.”

“와! 회다!”

“오랜만에 B로그 찍자!”

규영과 민석, 박상진이 어깨동무를 하며 춤을 췄다.

평일 점심의 식당은 북적거렸다. 메뉴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려 규영은 배가 고프다고 죽는시늉을 해 댔다. 민석은 핸드폰 카메라를 셀카 모드로 해 놓고 멘트를 쳐 대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오늘의 B로그 주제는 먹방입니다. 협회에서 회 사 줘서 식당에 왔어요. 간만에 국대 예비군 다 모였는데요, 식당이 아주 꽉 찼습니다.”

“형! 형도 한마디 해요. ‘국가 대표가 B로그 했다’ 찍고 있어요.”

규영이 주원의 손등을 톡톡 쳤다.

“잠깐만.”

주원은 아까 미처 답장하지 못한 도혁과의 메신저 창에 접속하는 중이었다. 그새를 견디지 못하고 녀석은 문자를 여러 통 남겨 놓은 상태였다.

바쁘신가 보다.

아니면 밥 드시러 가셨나? 맛있는 거 드시면 자랑해 주세요.

모레는 볼 수 있을까요? 그다음 날은요? 주말까지 기다려도 좋은데 시간 어떠세요.

뭐 이렇게 할 말이 많아. 정신없네.

하나하나 답장을 하고 있던 중, 규영이 말을 걸었다.

“형, 대체 누구랑 연락하는 거예요?”

“응?”

“애인 생겼어요? 아니면 썸?”

“무슨 소리야. 아니야.”

“그러면 왜 그렇게 로맨스 눈빛 장착하고 계신데요.”

“내가?”

주원이 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규영은 안경테를 고쳐 쓰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보기에는 아주 푹 빠져 계신데요. 회 나온 것도 모르셨죠?”

“응? 진짜네.”

테이블 위를 보니 어느새 윤기가 좔좔 흐르는 모둠 회가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뭐야. 주원 오빠 애인 생겼다고?”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 후배 박유진이 호들갑을 떨며 말을 붙여 왔다. 그녀 역시 같은 K대학 2학년이라, 같이 펜싱부원 활동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동시에 여자 국대팀 멤버로 활약 중이었다.

“아니래도. 문자 보낸 거 도혁이야.”

“진짜요? 그러고 보니까 오빠, 도혁이랑 친하죠.”

“응, 요즘 들어 많이 친해졌지. 왜?”

“도혁이 제 연락에는 반응 절대 안 하는데. 부럽다. 저 소개 좀 시켜 주시면 안 돼요? 오빠 통해서 만나면 잘될 거 같아요.”

여자 후배가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유진이 너, 도혁이한테 관심 있었어?”

“네. 좀 쑥스러운데… 오빠 아니면 부탁할 데가 없어요. 제 연락에는 반응 자체가 시큰둥하다니까요.”

“그래……?”

주원은 눈앞의 유진과 도혁을 상상 속에서 나란히 붙여 보았다. 펜싱계에 몇 안 되는 오메가인 유진과 덩치 좋은 알파 도혁은 꽤 잘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도혁이 직접 ‘나 우리 부원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 있어요.’라고 말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 소리만 없었으면 상당히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오빠. 한 번만요, 네?”

“물어나 볼게. 대신 도혁이가 싫다고 하면 깨끗하게 물러나는 걸로.”

“와! 알겠어요. 오빠, 진짜 고마워요.”

유진은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 가운데, 주원은 뒤늦게 회를 한 점 집어 먹었다.

그런데 묘하게 맛이 별로였다. 평소 좋아하던 식당인데 오늘은 생선 질이 별로인가 보다.

* * *

주원의 얼굴을 본 지 거의 일주일이 되어 갔다. 아, 못 보니까 미치겠네. 도혁은 오늘도 습관처럼 저녁 연락을 시도했다.

선배님, 오늘은 혹시 시간 되세요?

도혁은 침대에 드러누워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렸다. 그런데 문자 수신음 대신 지잉-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전화가 온 것이다.

누구지. 설마 주원 선배인가?

도혁이 반응속도 0.1초도 안 되는 찰나 핸드폰을 낚아챘다. 액정을 보니 정말로 주원이었다.

“여보세요. 선배님!”

─ 기다렸다는 듯이 받네.

“네, 선배님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 말 한번 번지르르 잘하네. 하여튼, 도혁아, 지금 부실로 올 수 있어?

“부실은 왜요?”

─ 체육대회 나갈 사람 뽑고 있는데 네가 필요해.

“아아, 체대 대항전 말씀하시는 거죠?”

조만간 체대 내에서는 연중 가장 큰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학과 대항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대다수 펜싱부원들이 속해 있는 사회체육학과는 체육레포츠학과와 오랫동안 앙숙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 ‘미니 올림픽’ 때문이었다. 운동 좀 한다는 사람끼리 누가 더 세냐, 강하냐 하는 문제는 곧 자존심으로 직결되었기 때문이었다.

─ 어, 그러니까 지금 올 수 있으면 와.

“당장 뛰어가겠습니다, 선배님!”

도혁은 부리나케 일어나 후드티를 훌렁훌렁 꿰입었다. 오랜만에 주원을 볼 생각을 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아까까지의 시무룩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주인이 산책 나가자고 하니 신이 난 강아지의 모습 그 자체였다.

거의 뛰다시피 해, 도혁은 10분 만에 부실에 나타났다.

“저 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보니 열댓 명 되는 남자 부원들이 모여 있었다.

“어서 와.”

주원이 손을 흔들며 도혁을 불렀다. 간만에 보는 그는 저지에 운동복 바지를 걸쳤을 뿐인데 미친 듯이 근사했다. 도혁은 자꾸만 솟구쳐 오르는 광대를 진정시키며 부원들에게 다가갔다. 주원은 한가운데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고, 그의 앞에 놓인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뭐 하는 중이셨어요?”

“허벅지 씨름 예선전. 우리 과 대표로 나갈 사람이 필요해.”

“아……! 이거 그거구나. 허벅지 힘으로 남의 다리 벌리기. 수비하는 쪽은 안 벌려지게 꽉 힘주고 다리 모으고. 맞죠.”

체고에서 여러 차례 해 본 게임이라 낯설지 않았다. 허벅지 힘이 센 사람끼리 하체 힘을 제대로 겨룰 수 있는 게임이었고, 도혁은 일평생 허벅지 씨름에서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다.

“응. 지금까지는 내가 다 이겼는데, 애들이 너 한번 시켜 보자고 해서.”

“지금 저, 저랑 선배랑 허벅지 씨름을 해 보자는 건가요? 다, 다리를 벌리고 막 오므리고요?!”

도혁은 식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주원의 허벅다리를 벌리려 애쓰는 자신이라니. 상상만으로 너무나 망측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 한번 해 보자고. 얼른 앉아라.”

하지만 주원으로서는 도혁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도혁의 손목을 잡아끌어 자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그들을 둘러싼 구경꾼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와, 누가 이길까.”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주원이 형을 이긴 사람은 없었지. 난 선배가 이길 거라고 본다.”

“아니야. 신입생 허벅지 좀 봐. 저건 인간의 허벅지가 아니야.”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주원은 도혁의 양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서, 선배님.”

“네가 공격을 해. 내가 수비를 할 테니까.”

“그럼 제가… 벌려요?”

“그래. 네가 벌리는 거고, 내가 버티는 거고. 알지?”

“저기… 이거 이기면 뭐가 좋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도혁은 이 게임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런 민망한 자세를 취하고 주원을 이겨 본들, 학과 대표로 나가는 것 외에 소득이 있을까?

“있지.”

“뭔데요?”

“네가 나 이기면, 개인적으로 내가 소원 하나 들어줄게.”

“정말요? 제 소원 들어주시는 거예요, 진짜로!”

“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올인 해 봐.”

주원은 거침없이 도혁의 다리를 잡아 허벅지 씨름 자세를 취했다. 주원의 다리 사이로 몸이 들어가자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말도 못 하게 가까워졌다. 탄탄한 허벅지를 느끼는 순간 도혁은 현기증이 났으나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했다.

“하나, 둘, 셋, 시작!”

심판이 스타트를 알렸다. 도혁은 이를 악물고 허벅지에 힘을 줬다.

“으윽!”

허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힘을 주고 주원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대의 힘도 만만찮았다. 도혁은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

지금 도혁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주원의 근력은 가공할 만했다. 그의 자세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으며, 심지어 표정에는 여유마저 감돌고 있었다.

“와, 주원 선배 땀 하나 안 흘려. 엄청난데?”

“도혁이 힘내라! 무너뜨려 버려!”

동기들이 도혁을 응원했으나, 승기는 점점 주원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제한 시간 30초 중에 20초 지났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주원 선배가 버티면 선배 승입니다.”

“10, 9, 8……!”

부원들이 입을 모아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안 돼.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 이깟 허벅지 하나도 열지 못하면서 어떻게 선배의 마음을 연단 말인가? 오랫동안 운동을 해 오며 쌓아 온 근성과 자존심이 발동을 걸었다. 도혁의 눈빛이 활활 타오르며 승부욕이 샘솟았다.

“흣……!”

도혁은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기며 어금니를 아득 깨물었다. 두 주먹을 으스러질 듯이 움켜쥐며 기합을 넣었다. 허벅지 근육을 부풀리며 힘을 주자 미세하게 주원의 다리가 벌어졌다.

“읍!”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전신의 힘을 쥐어짜 내 허벅지에 온 힘을 실었다. 주원 역시 모든 힘을 다해 버텼다. 구경꾼들이 큰 소리로 마지막 숫자를 셌다.

“4, 3, 2.”

“크읏!”

“아!”

마지막 순간 빈틈이 생겼다. 도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있는 힘껏 바깥쪽으로 다리를 벌렸다. 드디어 주원의 다리가 활짝 열렸다.

“와아! 도혁이가 이겼다!”

도혁은 벌떡 일어나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동기들이 뛰어올라 도혁을 끌어안으며 포효했다.

“이도혁 승! 우리 과의 허벅지 씨름 대표는 이도혁 군으로 선발되었습니다.”

“하아… 하아…….”

이게 뭐라고 땀이 줄줄 흘렀다. 도혁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한 손으로 주원에게 악수를 건넸다. 주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내 허벅지를 벌린 놈은 네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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