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도혁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선배님?”
“지난번에 네가 그랬잖아. 펜싱부에 맘에 드는 사람 있다고.”
“제, 제가 언제 그랬어요?”
“벌써 까먹었어? MT 때 술자리에서 지목 게임 할 때 네 입으로 말해 놓고선. 너 설마 그날 필름 끊겼던 거야?”
“그, 그게…….”
도혁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과 주원이 짝꿍으로 하루를 보냈던 MT 날, 술자리에서의 기억이 뚝뚝 끊겨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쓰러지기 전에 무슨 말을 하다 필름이 끊겼는지 궁금했는데, 그게 바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고백이었다니.
나도 모르게 선배에 대한 호감을 털어놓고 말았구나. 나, 이미 그때부터 선배를 무의식적으로 마음에 뒀던 거다.
난처함이 도혁을 덮쳤다. 우물쭈물 대답을 회피하는 도혁에게 주원이 물었다.
“그 사람하고는 잘돼 가?”
“잘되어 가냐고 물으신다면… 그게 말이죠.”
쉽지 않아요. 제 나름 공격 타이밍을 노리고 있지만 한 점 한 점 따는 게 영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 게임을 꼭 제 것으로 가져오고 싶은데요.
도혁이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있을 때였다. 주원이 아무렇지 않게 툭, 말을 던졌다.
“아직 사귀는 단계 아니면 너 소개팅 받아라.”
“…예?”
“나 아는 오메가 후배가 너 소개해 달래.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한번 자리만 주선해 달라는데, 어때?”
쿵.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도혁의 아래턱이 희미하게 떨렸다. 주원은 그런 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계속해서 후배의 장점을 나열했다.
“예쁘고 성격도 좋지만 일단은 오메가니까. 그것 하나만으로도 만나 볼 만하다고 생각해.”
“…….”
“우린 아무래도 오메가 보면 본능적으로 끌리잖아. 어때, 번호 줄까?”
그 말이 도혁을 강하게 자극했다. 마음속에 오기가 돋아났다.
“아뇨. 싫습니다.”
“왜?”
“전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요.”
“어…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나 보네.”
“네. 선배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백 배, 천 배요.”
“음… 그럼 내가 실례했네. 가벼운 호감 정도가 아니었구나.”
단호한 거절에 주원이 한발 물러났다. 그러면서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우리 도혁이, 단단히 사랑에 빠졌네.”
마치 반려동물을 귀여워해 주듯, 주원이 도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끝에서는 좋은 향기가 풍겼다. 도혁은 굳게 결심했다.
고백, 일주일 안에 마무리 짓는다.
* * *
요즘 들어 연락이 통 없단 말이지. 바쁜가?
주원은 사람 상체를 본떠 만든 더미(허수아비)를 칼로 찌르며 생각에 잠겼다.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칼끝은 매서웠으나, 속으로는 자꾸만 도혁 생각이 났다.
신입생이 바쁘고 자시고 할 게 어딨어. 이야기 들어 보니까 미팅도, 소개팅도 전혀 안 나간다는데.
휘릭, 탁.
주원은 더미를 몇 번 더 찌른 다음 연습을 중단했다. 그리고 벽면에 붙은 휴게 의자로 가 털썩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 목록을 쭉 훑어보았다. 국대 멤버들, 친한 부원들. 그놈이 그놈이었다.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은 도혁이었다.
프로필 상태 메시지 -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옛말. 찌르면 먹을 수 있다.
뭐야. 제대로 된 속담도 아니고 아주 자기만의 해석을 해 놨구만. 주원의 입가에서 실없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몇 번 신호가 가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 주원 선배님! 선배님이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아, 별건 아니고. 바쁘냐?”
─ 아뇨, 아니요. 절대 안 바빠요.
“나 지금 연습실에 있거든. 나와라. 같이 한판 뛰자.”
─ 아, 정말요?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어, 얼른 와라.”
챙. 챙.
예리한 칼날끼리 부딪치며 금속성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 타가 두어 번 있었으나, 게임은 내리 주원의 우세였다. 주원은 도혁의 머리를 치고 가슴을 베고, 기습적으로 팔을 찔렀다. 결과는 15:3으로 주원의 완승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3점이나 땄네.”
“선배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오늘 많이 배웠어요. 특히 막고 찌르기, 3점 다 그걸로 딴 거잖아요.”
도혁이 마스크를 벗으며 환하게 웃었다. 져 놓고도 아주 재밌고 기쁜 표정이었다. 오른쪽 볼에만 푹 파인 볼우물이 유난히 깊게 들어갔다. 주원은 눈앞의 해맑은 후배를 보다가 피식 따라 웃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참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 같은 녀석이었다.
“아부를 잘하네.”
“아부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말이라도 못 하면. 하여튼, 수고했다. 재미있었어.”
“저도요. 너무 즐거웠어요.”
인사치레가 오간 후, 주원이 복도를 가리켰다.
“너 씻으러 안 가?”
“아, 맞네. 재킷 널어 놓고 얼른 샤워실 가야죠. 근데 선배님은요?”
“난 집이 가까워서 가서 씻으려고.”
“이 근처 사세요?”
“응. 여기 후문으로 나가면 바로 우리 집이야.”
“그러시구나. 그럼 잠시만요. 저 씻고 나와서 다시 인사드릴게요.”
“뭐 하러 그래. 나 간다.”
“아니에요. 잠시만요, 선배님.”
도혁이 복도로 나가며 주원에게 손사래를 쳤다. 씻고 오려면 한 10분은 걸리겠지. 주원은 천천히 장비 가방을 정리했다. 그런데 웬걸. 도혁은 1분 만에 돌아왔다.
“벌써 다 씻었어?”
“아뇨. 수도가 고장 났어요. 물이 안 나오는데 어떡하죠?”
“그래? 단수 공지는 못 본 것 같은데 갑자기 끊겼나 보네.”
“하아, 저 지금 땀에 젖어서 기숙사까지 걸어가면 엄청 추울 텐데. 감기 들지도 몰라요.”
도혁이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펜싱부실에서 기숙사까지는 천천히 걸으면 30분, 빨리 뛰어도 1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주원의 측은지심이 발동했다.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는 그 모습이 주원의 눈에는 그저 꼬질꼬질한 강아지로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저 꼴로 나다니게 할 수는 없지 싶어서.
“그럼, 우리 집에서 씻고 가.”
“진짜요?!”
도혁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까지 기뻐할 일이야? 얼른 따라 나오기나 해.”
“네!”
주원과 도혁은 커다란 짐가방을 둘러메고서 연습실을 나섰다. 그들이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샤워실에는 사람이 득시글했다. 두말할 것 없이, 따뜻한 물도 콸콸 잘만 나왔다.
별관 쪽문으로 빠져나와 2분쯤 걷자 주원의 오피스텔이 나왔다. 근방에서 가장 으리으리한 건물이라 도혁도 익히 알고 있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609호로 들어서며 도혁이 물었다.
“선배 여기 오래 사셨어요?”
“응, 1학년 때부터 쭉. 근데 1년에 절반은 비워 놓지. 진천에 살다시피 하니까. 그래서 별것 없다.”
집은 한눈에 봐도 넓고 깔끔했다. 이렇다 할 장식은 없이 모든 가구가 무채색이었고, 아기자기한 느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밥은 아예 해 먹지 않는 것인지 주방에서도 으레 있을 법한 밥솥도, 전자레인지도 보이지 않았다.
“너 먼저 씻어. 왼쪽이 욕실이야.”
“정말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갈아입을 옷은 여기.”
주원이 흰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얼른 씻고 나올게요.”
도혁이 후다닥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10분도 안 되어 나왔다.
“와, 너무 따뜻하고 개운해요. 정말 고맙습니다, 선배님.”
주원은 조금 놀랐다. 이 집에서 가장 큰 흰 티셔츠에 검은 운동복 바지를 줬는데도 옷이 끼었다. 특히 가슴 부분과 어깨는 옷감이 불쌍할 정도로 팽창해 있었다. 또, 살짝 젖은 몸에 티셔츠가 찰싹 달라붙어 도혁의 골격과 근육을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몸 장난 아니네. 나 같으면 벗고 돌아다닌다.
사브르 특성상, 보통 선수들은 슬림하고 키가 큰 체형이 많았다. 또 실내 스포츠인 탓에 피부 톤이 그을리지 않은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도혁은 적당하게 구릿빛을 띠는 피부, 마치 미식축구 선수 같은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흠…….”
“왜요?”
“아니다. 나도 씻고 나올 테니까 방에서 한숨 자든지 해. 피곤할 것 아니야.”
“예? 설마 선배님 침실에서요?”
“그래. 그럼 널 거실에서 재우겠냐? 어차피 너 너무 커서 소파에 몸 들어가지도 않아. 저기가 침실이야.”
주원은 직접 침실 문까지 열어 주며 도혁을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온수로 근육에 쌓인 피로를 풀고, 주원은 느릿하게 욕실을 나섰다. 운동을 격렬하게 했더니 전신에 노곤함이 몰려왔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다음 그는 침실로 들어갔다. 도혁이 퀸사이즈 베드의 2/3을 차지하고 누워 있었다. 자기 딴에는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린답시고 시도한 듯한데, 워낙에 덩치가 커 역부족이었다.
머리는 잘 말리고 자나.
주원은 침대맡에 걸터앉아 도혁의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곱슬머리는 보송하게 잘 말라 있었다.
“으음…….”
도혁이 잠꼬대를 하며 똑바로 누웠다. 은은한 수면 등 아래, 반듯하게 깎아 놓은 듯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렇게 보니까 참 잘생겼네. 주원은 도혁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앞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겨 주었다. 자신과 똑같은 샴푸를 썼겠지만 미묘하게 다른 향이 풍겨 나왔다. 그건 아마 타고난 페로몬 냄새가 달라서일 것이었다.
지난번에 맡았던 것처럼 도혁의 향은 오래된 나무에서 맡을 수 있는, 그런 묵직한 냄새였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좋은 쪽이었다.
…잠깐. 나 지금 뭐 하는 거냐. 알파 후배 침대에 드러눕히고 여기저기 만지고나 있네. 냄새가 좋니 어쩌니 품평까지 해 대면서. 윽.
주원의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떤 다음, 도혁과 두 뼘 이상 거리를 두고 침대에 누웠다. 도혁이 팔을 뻗어 주원의 몸에 묵직한 팔을 걸치려 했다. 주원은 요령 좋게 그의 팔을 걷어 내고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냄새가 코끝을 간질여서일까? 잠자리가 평소보다 턱없이 비좁은데도 잠이 솔솔 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