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얼마나 잔 거야. 주원은 비몽사몽간에 겨우 눈을 뜨고 시야에 어슴푸레 들어오는 것들을 살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흰 티셔츠와 그 아래 꽉 찬 근육이었다. 또한 머리 아래로 느껴지는 것은 단단한 팔뚝이었다.
주원은 가볍게 앓는 소리를 내며 도혁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도혁아, 우리 세 시간이나 잤어.”
“으음……?”
“밤이다. 이제 일어나.”
그제야 도혁이 눈꺼풀을 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헉.”
그가 퍼뜩 놀라는 얼굴을 하며 허둥지둥거렸다. 주원은 팔베개에서 빠져나오며 목덜미를 긁었다.
“네가 베개 베고 자고 있길래 네 팔 좀 빌렸다. 많이 저리지? 미안.”
“아, 아니에요. 저 하나도 안 저려요.”
“허벅지도 좋지만 팔뚝도 단단한 게 딱이네.”
주원이 도혁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정말 딱딱해서 목침을 벤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배고픈데 우리 뭐라도 해 먹을까?”
주원이 물었다. 도혁은 순한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함께 냉장고를 열어 안을 뒤져 보니 한 무더기의 닭가슴살 사이 소고기 등심과 야채 몇 가지, 파스타 소스가 보였다.
“선배님, 제가 고기 구워 드릴까요? 이거 스테이크 해 먹으면 맛있을 것 같아요. 파스타도 만들어 드릴게요.”
“너 요리 잘해?”
“네. 저 몸으로 하는 건 기본적으로 뭐든지 잘해요.”
“요리도 몸으로 하는 일의 범주에 들어가나?”
“당연하죠. 기다리세요. 제가 맛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도혁은 찬장 구석구석을 뒤져 후추와 소금, 올리브유를 찾아냈다. 양념에 재운 고기를 잘 썰어 굽자 그럴싸한 요리가 완성됐다.
거기에 적당히 삶은 파스타 면과 소스를 곁들이자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주원은 고기와 파스타를 번갈아 입에 넣고 깜짝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
“맛있다. 너 요리 진짜 잘하네.”
“맛있게 먹어 주시니 다행입니다.”
“도혁이가 선배한테 잘하네. 잠도 재워 주고, 끼니도 챙겨 주고. 너 참 괜찮은 애네.”
“정말요?”
“응. 너처럼 괜찮은 후배 처음이야.”
주원은 진심으로 말했다. 자신의 말 하나하나가 도혁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칭찬은 그칠 줄 몰랐다.
* * *
도혁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우선 격식 있는 옷을 샀다. 백화점에 가서 비싼 정장을 산 것이다. 주니어 대회 상금을 모은 통장에 뻥, 하고 구멍이 뚫릴 만큼 지출이 컸지만 그만큼 옷은 근사했다.
그다음으로는 고백 연습이 필요했다. 도혁은 유명하다는 멜로 드라마와 로맨스 영화를 닥치는 대로 봤다. 특히 고백 신 모음 영상은 구할 수 있는 만큼 다 구해서 대사를 외울 만큼 반복해 시청했다.
“내 고백 안 받아 줄 거면 차라리 날 쏘고 가.”
“미치도록 사랑한다. 네가 날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으니, 네가 책임져.”
“내 심장이 이글이글 타 버렸다……. 잿더미가 된 가슴만이…….”
몇 가지 대사를 따라 해 보았으나, 상당히 느끼하고 와닿지가 않았다. 하지만 도혁은 연애 경험이 전무 한 자로서, 마땅히 물어볼 상대도 없이 오직 외부 자료에 의존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기에 꾹 참고 부담스러운 대사들을 열심히 연습했다.
“주원 선배, 선배 때문에 제 가슴이 불탑니다. 사랑해요.”
고민 끝에 대사를 결정했다. 남들 보기에는 민망하고 오글거릴 수 있었으나, 도혁의 진심이 담긴 멘트이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배우들의 눈빛과 자세를 연구했다. 드라마 속에서는 대부분 벽치기가 대세였다. 상대를 벽에 밀친 채 폭풍 같은 고백을 쏟아 내는 것이다. 그게 꽤 괜찮아 보여, 도혁은 기숙사 방 벽을 여러 차례 때리며 대사와 제스처를 연습했다.
문제는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키스 신이었다. 모든 드라마와 영화에 키스 신이 나왔지만, 도혁은 키스가 뭔지 몰랐다.
살아생전 남의 입술에 입술을 갖다 대 본 적이 없는데, 이건 어떻게 리드해야 하는지. 또 입술이 닿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저히 감을 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난 분명 잘 해낼 거야. 닥치면 어떻게든 하게 돼 있어.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지, 뭐!
미디어에 현혹된 도혁은 이미 망상 속에서 모든 것을 이루었다. 그는 스스로를 세뇌한 채 허황된 자신감을 부풀리기 바빴다. 그렇게 해서 고백은 코앞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도혁은 정작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빼놓고 제멋대로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니까, 주원의 마음 같은 것은 깡그리 배제하고 자기 좋을 대로 이 상황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주원이 자신을 받아 줄 것이라는 자신감은 어디서 솟아난 것일까. 그건 그냥 스무 살의 패기였다. 근거도 없고 대책도 없는 그런 풋내 나는 열기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도혁은 슬슬 결전의 날을 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오늘 되면 오늘 지르고, 내일 되면 내일 지른다. 절대 이번 주 넘어가면 안 돼.”
그가 이번 주로 시한을 정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다음 주에는 주원이 국대 소집으로 인해 잠깐 서울을 떠나기 때문이었다.
일단 메시지 보내 볼까. 도혁은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슬쩍 핸드폰을 열었다.
선배님,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한참 뒤에 답장이 왔다.
어쩌지. 오늘은 선약이 있어.
아… 그러시군요. 그럼 내일 뵐까요.
그래. 그러자.
오늘은 안 되는구나. 실망스러웠다. 내일은 반드시 고백해야겠다는 초조함도 느껴졌다. 핸드폰 액정을 끄려는 때, 다시금 진동이 울렸다.
이번 문자의 발신자는 <김민석 선배님>이었다.
도혁아, 오늘 끝나고 뭐 하냐.
오늘은 별거 없습니다.
그럼 너 지금 새살이길로 나와라. 규영이 형 소개시켜 줄게.
안규영 선배님이요! 영광입니다. 수업 마치면 바로 나가겠습니다.
사브르 국대 중 이 학교 3학년인 안규영은 그간 개인 훈련을 떠나 있던 터라 아직 도혁과 안면이 없었다. 하늘 같은 선배이자 또 다른 국대를 만난다는 생각에 도혁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오늘은 고백하는 날이 아니지만 대선배를 만나는 날이네. 좋은 날이 될 거야.
도혁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 *
같은 시각, 주원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에 와 있었다. 수목원 앞에 위치해 경치가 끝내주는 이곳은 희우가 즐겨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누나는 어쩜 하나도 안 변했어요. 3개월 만인데 그대로네.”
“주원이 너는 어떻게 된 게 전보다 얼굴이 훨씬 밝아 보인다.”
“제가요?”
아이스 잔을 들어 올리던 주원이 물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어?”
희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턱을 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친한 후배이긴 하지만 주원은 늘 시크하고 무념무상인 편이었다. 그런 그가 유례없이 밝은 모습으로 나타나자 호기심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아무 일도 없는데요. 재미있게 지내고 있긴 하지만.”
“재밌는 일?”
“신입생 들어왔는데 저를 잘 따라요. 그래서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게 전부예요.”
“네 나이에, 경력에 신입하고 말이 통해?”
“말은 안 통하고, 그냥 귀여워하는 거죠.”
“내가 너한테 그랬듯이?”
“아, 진짜. 옛날이야기 하지 말아요.”
희우가 소리 내 웃었다. 스물아홉과 스물셋이 된 지금 와서 보아도, 주원은 풋풋한 소년으로만 보였다.
“근데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저 때문에 사브르 시작했다고.”
“정말? 와, 대단한 영광인데?”
“그 말 듣고 좀 신경 쓰여요.”
“뭐가.”
“걔가 저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자의식 과잉 아니야? 왕자병 여전하네.”
희우는 박수까지 치며 주원을 놀렸다.
하지만 주원은 진심이었다. 도혁은 갓 난 새끼오리처럼 자신을 졸졸 따라다녔다. 다른 선배들에게는 격식을 차리고 대했지만, 주원한테는 애교를 부렸다.
신예지나 김민석 같은 2학년들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나가다가 그들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90도로 허리를 접어 인사하고, 무슨 부탁이라도 받으면 상하 규율이 엄격한 체대생 바이브가 나왔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취하는 태도는 그것과 묘하게 달랐다.
존경하고 떠받든다기보다는, 좀 뭐라고 해야 하지……. 너무 좋아한다?
“…아, 주원아?”
“네?”
“무슨 생각 하길래 내가 부르는데도 못 들어.”
희우가 서운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삐진 티를 냈다. 주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누나, 오늘 초밥 먹고 싶다고 했죠? 학교 가까운 동네에 맛있는 데 있어요. 거기 예약해 놨어요.”
그의 말에 따라 희우가 일어났다. 커피잔을 정리해 카운터로 가져다주며, 희우는 주원의 옆구리를 찔렀다.
“채주원, 역시 매너 죽지 않았어. 내가 이래서 널 예뻐한다니까.”
“사소한 건데요, 뭐. 예약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너 다른 사람한테는 이러지 말아라. 착각해.”
“뭘 착각해요.”
“나 좋아하나? 희망 가진단 말야. 네가 울린 펜싱계 인사가 몇 명인지 생각 좀 해 봐라. 방금 말한 네 후배도 그 희생양 되는 거 아닌가 몰라. 누가 알아. 형, 저 책임지세요. 이 유죄남, 하면서 매달려 올지.”
장난스러운 말에 주원은 정색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걔 알파예요. 그것도 저보다 훨씬 덩치 크고 산만 한 우성 알파.”
“진짜?”
“네. 징그럽기가 말도 못 하겠네요.”
“아까는 귀엽다며.”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징그러운 건 징그러운 거죠.”
주원은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상상했다. 커다란 꽃다발을 내밀면서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도혁의 모습을.
‘선배, 저 좋아하시죠? 제멋대로 착각에 빠져서 저도 선배를 사랑하게 됐어요.’
커다란 몸뚱이를 배배 꼬며 눈을 깜빡거리는 도혁의 모습을 상상한 소감은,
“으음…….”
이건 좀 아니었다. 많이, 아주 많이.
쓸모없는 상상이다. 때려치워, 집어치워.
주원은 머릿속을 개운하게 비우며 카페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주차돼 있던 SUV에 원격으로 시동을 켰다.
“누나 먼저 타요.”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매너는 기본 장착이었다. 운전석에 오른 그는 익숙한 루트를 떠올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지금부터 그가 가려는 곳은 학교 옆 동네이자 고급스러운 일식집이 즐비한 오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