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평일 저녁의 대학가는 인파로 북적였다. 특히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쭉 뻗어 있는 대로인 이곳 새살이 길은 하교하는 학생과 저녁 약속을 잡은 학생들이 뒤엉켜 혼잡하기까지 했다. 개중에 키가 너무 커 머리만 솟구친 펜싱 선수들은 번잡한 가운데 서로를 쉽게 알아봤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이도혁입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 반갑다.”
규영이 안경테를 슥 올리며 악수를 청했다. 홀쭉하게 마른 체격에 허허 웃는 얼굴이 선해 보였다.
“규영이 형이 엄청 미식가거든. 우리는 지금부터 새살이길을 벗어나서 제일 비싸고 고급스러운 초밥 먹으러 갈 거다. 새내기가 맛보기 어려운 코스지.”
“정말입니까? 진짜 감사합니다.”
“허허, 주원이 형이 네 이야기 자주 하더라. 진짜 덩치는 곰 같은데 하는 짓은 개 같다고. 실제로 보니까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나온 주원의 이름에 도혁은 흠칫했다.
“개요?”
“귀엽단 뜻이래.”
“아, 그렇구나.”
오, 주원 선배는 평소에 날 개 같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근데 그게 나쁜 의미는 아니고 귀엽다는 의미고?
“마당에서 키우는 엄청 큰 개 같다고 했어. 사람 잘 따른다고.”
규영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안경테를 고쳐 썼다.
역시 좋은 뜻이구나. 기분이 좋아진 도혁은 실실 웃으며 두 선배의 뒤를 따랐다.
20여 분 정도 걸어 세 사람은 새살이길을 벗어난 동네에 들어섰다. 그들은 오거리에 위치한 고급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정갈하면서도 운치가 있는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세 분이신가요?”
“네.”
여기 꽤 비싸겠다. 초밥도 맛있을 것 같아. 규영 선배 좋은 사람이네.
도혁은 벌써부터 규영의 말을 잘 들어야겠다고 결심하며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입장했다.
“세 분,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식당은 미닫이문으로 공간을 분리해 놓은 구조였다. 그런데 전부 방문이 닫혀 있는 데다가 복도가 미로 같아 세 사람은 잠시 식당 안을 헤맸다.
“저긴가?”
“가장 안쪽이면 저 방 말하는 거 아니에요?”
“저기는 예약 룸이라고 쓰여 있는데. 2인실 같고 말이야.”
두 선배가 여기저기를 기웃대고 있을 때였다. 도혁의 등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도 함께였다.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네.”
“오랜만이야. 너무 반갑다, 얘들아.”
“주원이 형, 희우 누나! 웬일이에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흰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주원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늘씬한 여자가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청바지를 입은 채로 서 있었다. 그 여자는 도혁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서희우였다.
도혁은 전설적인 선수에게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에 감탄했다. 실제로 본 그녀는 얼굴까지 미인이었다. 몸은 마르고 왜소한 편이었으나 오랫동안 운동을 해 온 사람 특유의 탄탄함이 느껴졌다.
“서, 서희우 선수님……!”
“아, 도혁이는 처음이겠구나. 인사드려.”
대선배를 만났다는 얼떨떨함을 진정시키고 도혁은 일단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십니까. 1학년 이도혁입니다.”
“1학년이라고요? 나랑 한참 차이 나네. 반가워요. 전 에페 졸업생 서희우라고 해요.”
“에이, 자기소개를 왜 해요. 얘가 설마 누나를 모르겠어요? 아무리 세대 차이가 나도 그렇지. 우리 펜싱 여신님을.”
“그런가?”
민석의 말에 희우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실제로 희우는 도혁보다 아홉 살이 많았고 세대가 달랐다. 또한, 지난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이미 은퇴한 상태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도혁의 시선이 희우 옆에 서 있는 주원에게로 옮겨 갔다. 평소 자주 볼 수 없는 셔츠 차림에, 머리를 세팅한 그는 마치 데이트 중인 사람처럼 보였다. 도혁의 입가가 조금씩 굳어 갔다.
“누나가 마침 학교 온다고 해서 근처에서 커피 마시고 이리로 온 참이야. 누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흔치는 않잖아. 귀한 몸이신데.”
주원이 싱긋 웃으며 희우를 바라봤다.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합석할까?”
“너무 좋죠.”
“대찬성!”
주원의 제안에 규영과 민석이 환호했다. 도혁은 뭐라고 의견도 내지 못한 채 합석이 결정되었다. 직원이 나서서 새로운 룸을 잡아 주었다. 도혁은 엉겁결에 선배들을 따라 널따란 룸으로 들어갔다.
희우를 안쪽에 앉힌 다음에 주원이 그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그 맞은편에는 도혁, 민석, 규영이 앉게 되었다. 자리 배치 때문에 도혁은 주원이 희우를 챙기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누나, 차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셔요. 입 데겠다.”
주원이 희우의 찻잔을 빼앗아 강제로 식혀 주었다. 또한 그녀 앞에 직접 젓가락을 놓아주었고, 혹여나 불편하지는 않은가 물으며 자리를 여러 차례 살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도혁은 기분이 묘했다.
나한테는 저렇게 안 해 주는데.
그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자꾸만 주원이 희우를 쳐다볼 때마다, 눈을 마주치고 웃을 때마다 관찰하게 됐다. 보면 볼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맛있다고 급하게 먹지 말라니까요. 자주 체하면서.”
초밥 한 조각을 먹을 때마다 주원은 잔소리 섞인 염려를 보였다. 민석은 그 모습을 보며 놀리듯 말했다.
“주원이 형이 희우 누나 좋아하나 봐. 그치, 도혁아?”
“예?”
“형! 맨날 우리는 무섭게 대하면서 누나만 저렇게 살뜰하게 챙기는 법이 어딨어요. 남녀 간에 우리는 좋은 선후배다, 그냥 누나 동생이다. 그런 거 다 거짓말인 것 같네요?!”
“어머, 민석이가 우리 놀리네. 주원아, 나 그만 챙겨야겠는데?”
희우는 이 상황이 전혀 불쾌하지 않은 듯했다. 표정이 밝고 유쾌했다. 도혁은 이렇다 저렇다 대답하지 못한 채 어색한 웃음만 띠었다. 선배들로 가득 찬 이 상황에서 자기감정 하나 때문에 분위기를 망칠 순 없었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희우가 도혁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도혁 후배님 되게 잘생기셨다. 혹시 여자친구 있어요? 내 동생이 좋아할 스타일인데. 참고로 내 동생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어려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원이 끼어들었다.
“누나, 말도 마요. 얘 내가 오메가 소개시켜 주려고 했는데 칼같이 차단했어. 소개 같은 거 안 받는대요.”
“진짜야? 미안해요, 후배님. 초면에 실례했네요.”
희우가 환하게 웃었다. 하얀 꽃처럼 청초한 미인의 웃음에 방 안이 환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주원도 웃었다. 도혁은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다섯 사람은 식당 앞으로 나왔다. 주원은 발레파킹해 두었던 차를 찾으며 후배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난 희우 누나 좀 데려다줄게. 잘들 들어가라.”
“네. 누나, 형. 안녕히 들어가세요.”
“두 분 오붓하게 가라고 보내 드리고, 도혁이는 우리랑 놀자.”
“맥주나 한잔할까?”
“아님 볼링 치러 가든가요.”
민석과 규영이 놀 거리를 찾는 동안 주원의 차가 출발했다. 도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혁은 지금 자신의 속을 꽉 메우고 있는 것이 열등감과 패배감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답답함을 깨부수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다. 이대로 주저앉거나, 혼자 상심에 빠져 주원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우선 희우와의 관계를 확인한 다음, 준비한 고백을 쏟아 내고 싶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 내일까지 기다릴 것 없이, 이 초조한 마음을 해결하고만 싶었다.
스무 살의 첫사랑이란 모름지기 성미 급하기 마련이었다. 도혁은 지금 난생처음 겪는 풋사랑에 휘말려 앞뒤를 가릴 여력이 없었다. 신중하게 밀고 당긴다거나, 간지럽게 분위기를 조성하며 상대의 마음을 떠본다는 생각을 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어렸다.
“안 되겠어.”
“응? 뭐가 안 돼, 도혁아.”
“…도저히 못 견디겠다고.”
“너 뭐 해?”
“선배님들, 죄송하지만 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볼링도 맥주도 다음에 제가 대접하게 해 주십시오.”
“아, 바빠?”
“네. 오늘은 제가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가. 다음에 놀지 뭐. 요즘은 싫다는 애 억지로 붙잡고 놀면 꼰대 소리 들어.”
규영이 싱거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도혁은 두 선배에게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고서 휙 뒤돌아섰다. 여기서 주원의 집까지는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가서 그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도혁은 번화가의 인파를 거침없이 제치고 대학가로 걸었다. 걸음이 워낙 빨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주원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가로등이 고장 났는지 건물 앞은 다소 어둑어둑했으나, 아직 주원의 차가 돌아오지 않은 것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도혁은 주원이 주차하는 자리 근처 벽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꼈다.
머릿속은 매우 어지러웠다. 희우와 연인처럼 굴던 주원, 장난스럽게 그들을 놀리던 민석과 규영. 그 놀림이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은지 내내 웃던 두 남녀. 그 틈새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어쩌면 주원 선배는 이미 희우 선배를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불길함이 도혁을 엄습했다. 너무 떨리고 긴장되고, 또 기분이 좋지 않아 자꾸만 머리를 감싸 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초조함에 1분에 한 번씩 시계를 확인하는 와중에 갑자기 차 소리가 났다. 주원의 차가 오피스텔 앞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도혁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가슴이 쿵쿵, 뛰는 가운데 차에서 내린 주원이 도혁을 발견했다.
“어? 도혁아, 웬일이야.”
“…선배님.”
“왜 여기 있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래? 그럼 같이 올라가자.”
주원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듯 현관을 가리켰다. 도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원의 손목을 턱, 붙잡았다.
“아뇨. 여기서 이야기해요.”
“무슨 일이길래 그래? 너 표정은 또 왜 그렇게 진지하고.”
“심각한 일입니다.”
“뭔데.”
후우. 도혁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단숨에 뱉었다.
“저 선배님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