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우리 펜싱부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3대 금지 사항이 있다. 첫째는 함부로 좌절 금지, 둘째는 게임이 끝날 때까지 포기 금지, 셋째는 바로 채 선배. 즉 나한테 고백 금지다.”
주원은 뒷짐을 지고서 엎드려뻗쳐 중인 도혁 앞을 느릿느릿 오갔다.
바닥을 짚은 채 낑낑거리던 도혁이 고개를 빼꼼 들며 물었다.
“저기요. 선배님, 제가 첫 번째랑 두 번째 이야기는 들었어도 마지막 사항은 처음 듣는데요?”
“당연하지. 내가 방금 만들었으니까.”
주원이 <월간 펜싱>을 둘둘 말아 도혁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마치 펜싱 동작처럼 빠른 공격에 도혁은 억 소리도 못 내고 매를 맞았다.
“정식으로 말해 둘게. 나는 네 맘 받아 줄 생각 없다. 그리고 네가 간과한 게 하나 있는데, 이제 너 나 보지도 못해. 나 이제 곧 진천 들어가. 정식으로 소집 명령 내려왔어.”
그 말에 도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직 시간이 있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언제, 언제 가세요.”
“당장 다음 주 입촌이야. 그러니까 헛된 데 에너지 쓰지 말고 훈련에나 집중해. 이거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니까 귀담아들어.”
“…선배님.”
도혁은 말문이 막혔다. 그런 그의 옆을 주원은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쿵, 연습실 문이 닫혔다.
* * *
툭, 툭.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비가 떨어졌다.
도혁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과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세찬 바람을 아랑곳 않고 달렸다. 차가운 공기가 사정없이 얼굴을 할퀴고 온몸을 식히는데도 가슴 속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배가 진천으로 가 버리면, 그다음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주원이 다음 주에 정식 입촌을 해 버리면 볼 길이 없다. 진천에 들어간 선수들은 코빼기도 못 보는 존재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면 올림픽이 다가오겠지. TV 중계로 올림픽을 지켜본다면 그 심정은 얼마나 애가 탈까.
그다음으로 있을 세계 선수권 대회도 해외에서 열린다. 그러고 나면 주원이 언젠가 말했듯 정말로 끝, 졸업이다.
도혁은 이 인연이 얼마나 얄팍한가 생각하며 자조했다. 운 좋게 같은 대학, 그리고 같은 전공에 진학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애당초 발을 딛고 있는 위치가 다르다.
주원은 세계 랭킹 1위에 빛나는 국가 대표 에이스고 대학생이 부업이다. 하지만 도혁은 국내 랭킹 19위, 세계 랭킹 201위에 불과한 풋내기였다.
하늘과 땅 차이네.
도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있는 곳이 너무나 낮고 초라해 보였다.
제아무리 팔을 뻗어도 선배가 있는 곳까지 닿지 못해. 하지만 난 선배를 붙잡고 싶어.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남겨진 시간이 너무나 짧아. 하물며 상대의 수비는 철벽과도 같다. 파고들 틈을 안 준다고.
“…하아.”
도혁은 운동장에서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온몸이 흠뻑 젖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가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쏴아아- 찬비가 얼굴과 몸을 아프게 때렸다. 그래도 이 비참한 마음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누워 있던 그는 터덜터덜 일어나 기숙사로 향했다. 느릿하게 걸어가, 밤이 늦은 시간에야 기숙사 문을 열 수 있었다. 용희는 며칠 전 멍에 이어 오늘은 비 맞은 생쥐가 되어 돌아온 룸메를 보고 식겁했다.
“야! 이도혁, 무슨 비를 이렇게 맞았어?”
“일이 좀 있었어.”
“실연이라도 당했어? 영화 찍어?”
“…그렇다고 해 두자.”
늘 해맑고 에너지 넘치던 도혁은 오간 데 없이, 힘 빠진 도혁만이 보였다. 용희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고 다니면 감기 걸려.”
“나 먼저 씻고 잔다.”
“야, 너 감기약이라도 먹고 자.”
“괜찮아.”
대충 씻고서, 도혁은 자리에 누웠다. 몸은 피곤했으나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지배해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밤새도록 주원에 대한 미련과 욕심으로 잠을 설쳤다. 결국 새벽녘 어설프게 잠든 그는 밤새 주원에 대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 주원은 도혁의 고백을 냉큼 받아 주었다. 너의 사랑한다는 말만을 기다려 왔다고 적극적으로 키스해 오기까지 했다. 도혁은 꿈속에서 주원과 키스하고, 끌어안고, 손잡고 캠퍼스를 거닐었다. 아름다운 벚꽃 나무 아래에서 피크닉을 즐기기도 했다.
너무나 꿈결같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잠이 번쩍 깼다.
“하아…….”
어둡고 시커먼 방 안, 현실은 제대로 걷어차인 후였다. 도혁은 제 첫사랑이 비극으로 치닫고 있음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알파라는 이유로 또 어리다는 이유로 자신의 고백을 건성으로 대하는 주원이 미웠다.
난 이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밀어붙인다.
도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일찌감치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새벽 훈련이 루틴인 주원의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실컷 두드려 맞은 장소에 다시 오자니 다시 눈두덩이가 아파 오고 이마가 욱신거렸지만, 지금 그는 사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주원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마음을 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6시 40분이 되자 오피스텔 현관문이 열리고 주원이 나왔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주원은 경악한 표정이었다. 도혁은 재빨리 주원의 앞으로 슬라이딩해 무릎을 꿇었다.
“얼굴 보러 왔어요, 선배.”
“뭐?”
“간밤 꿈에 선배가 나왔어요. 일어나니까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행복한 꿈이었어요. 저 선배 포기 못 할 것 같습니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직 정신 못 차렸지?”
“네, 저 정신 못 차렸어요. 선배만 보면 미칠 것 같으니까요.”
주원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헛웃음을 지었다. 한참 허공에 대고 허허 웃던 그가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내가 이런다고 너한테 넘어갈 것 같아?”
“그건 아직까지… 자신 없지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하, 어디 한번 오기 실컷 부려 봐라. 너만 고생이지. 난 신경 안 써.”
주원은 장비 가방을 고쳐 메고는 쌩하니 도혁을 지나쳐 갔다.
“선배!”
“따라오지 마. 지금 네 얼굴 보기 싫으니까.”
“서… 선배.”
도혁은 서러움에 입술을 꾹 깨물고 턱에 호두를 만들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그는 주원의 다음 동선을 파악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주원은 편의점에 들러 두통약을 찾았다. 도혁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남은 한 개를 계산하고 나와 연습실로 향했다.
그는 스트레스 발산용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연습용 과녁에 감정을 싣고 싶었다. 주원은 심호흡을 한 다음 인조 과녁에 힘차게 칼을 꽂았다.
“으아아!”
텅 빈 연습실에 그의 힘찬 구령이 울려 퍼졌다. 그는 전력을 다해 과녁을 베고 찌르며 미친 듯이 땀을 흘리며 연습에 전념하려 애썼다.
‘감히 나한테 입술을 비벼?’
‘나를 어떻게 해 보려고 수작질을 떨어?’
‘내가 성인군자라서 참는 거지.’
‘아니, 더 죽여 놨어야 했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너무나 점잖게 도혁을 밀어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 또 한 번 이딴 식으로 굴면 특단의 조치를 취해 주마.’
주원의 눈에 불꽃이 번쩍번쩍 튀었다.
“큿! 하앗!”
우렁차게 기합을 넣으며 멋진 검법을 선보이던 중이었다. 그는 창문 바깥에서 인기척을 느껴 시선을 돌렸다. 갈색 곱슬머리가 부리나케 창틀 아래로 숨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키와 덩치가 너무 커 상대가 누군지 훤히 보였다.
“야!”
주원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창가로 달려갔다. 영화의 액션 신을 방불케 하는 주원의 기세에 도혁이 반쯤 울면서 도망갔다.
이후로도 도혁은 학생 식당, 도서관, 교양관에 차례로 출몰했다. 동선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원이 있는 장소에는 곧 도혁이 나타나거나, 이미 도착해 있었다.
주원은 두더지 잡기의 두더지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기분을 맛봤다. 망치가 있다면 콩 하고 쥐어박고 싶을 만큼 도혁이 거슬렸다.
하지만 그를 피해 동선을 바꾸는 건 상알파의 자존심을 깎아 먹는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꿋꿋이 자신의 동선대로 다녔고, 도혁은 길목마다 주원을 붙들고 애정 공세를 퍼부었다.
심지어 자기는 듣지도 못하는 4학년 수업에 들어와 도강을 하다가 교수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주원의 자리에 초코 우유와 쪽지를 두고 나가는 것은 잊지 않아, 주원은 이 깜찍하고 끔찍한 후배를 어떻게 쥐어박아 줄까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죽자 사자로 쫓아다니며 일주일이 흘렀다. 밥도 거르고 주원만 따라다니다 보니 도혁은 나날이 수척해져 갔다. 하지만 주원이 곧 진천으로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초조해지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강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도혁은 만성 피로에 시달렸다.
* * *
피곤해. 더 자고 싶어. 1교시부터 수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혁은 자꾸만 감겨 오는 눈꺼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불을 있는 대로 끌어다가 몸을 웅크리고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는 이윽고 용희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뜨고 말았다.
“도혁아, 일어나 봐.”
“…….”
“일어나 보라니까?”
용희가 도혁의 침대까지 와서 그를 흔들어 깨웠다.
“…왜, 무슨 일이야.”
도혁은 침대에 축 늘어진 채로 대답했다. 용희는 그런 그의 침대맡에 앉아 호들갑을 떨었다.
“단체 메시지 확인해 봐. 얼른.”
“왜, 또 집합이래? 나 피곤한데.”
“아니야. 민석 선배님이 올린 공지 빨리 확인해 봐.”
“민석 선배님?”
“응. 사브르 방에 공지 떴어.”
민석은 사브르 전공생들 사이에서 총무를 맡고 있었다. 또한, 국가 대표로서 펜싱 협회에서 전하는 소식이나 각종 혜택, 정보들을 정리해서 올려 주고는 했다.
“얼른 좀 봐!”
“알았어, 알았어.”
도혁은 졸린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메신저 방에는 민석이 갓 올린 메시지가 한 통 올라와 있었다.
톡. 손끝으로 메시지를 클릭하자 장문의 글이 좌라락 스크롤 됐다.
K대학 사브르 검객들
긴급 사항: 펜싱 연맹 공지 전달입니다. 체육 건강 공단 박상진 선수가 부상을 입어 큰 수술을 받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국대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펜싱 월드컵과 올림픽까지 뛸 남자 사브르 선수를 1명 보궐 모집합니다. 참고로 이번 선발전 참가 자격은 국내 랭킹 5위부터 20위까지 제한이 있습니다.
“헉, 나 19위인데.”
“야, 그치? 그래서 내가 너 깨운 거야.”
나도 참가할 수 있잖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