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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16화 (5/115)

16화.

만약에 내가 여기서 뽑히기라도 하면……? 태극마크 달고 국가 대표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주원 선배와 한 팀이 되어 진천으로 향하고,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

순식간에 ‘국대 = 채주원과 함께’라는 논리가 펼쳐졌다.

도혁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눈앞으로 온갖 망상이 스쳐 지나갔다. 주원과 함께 아침 햇살을 맞으며 조깅을 하고, 그러다가 넘어진 주원을 일으켜 주는 늠름한 자신의 모습.

매일 함께 훈련하면서 일상을 보내고, 승리의 순간을 공유한다. 그러면 분명 기회는 온다……!

너무 흥분이 돼 손발이 벌벌 떨렸다. 도혁은 두 팔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국대 선발전이라니! 우리도 기회 있는 거네!”

“생각 있는 사람 민석 선배님한테 오늘 10시까지 알려 달라더라.”

도혁은 퍼뜩 시계를 봤다. 현재 시각은 9시 반, 용희는 지상 최고의 룸메이트였다.

같은 시간 주원 역시 공지를 확인했다. 내용을 보자마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설마 19위인 도혁이 선발되지는 않겠지. 그런 일은 없어야 해.

주원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다가 랭킹 5위 되는 선수들부터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내 차례로 격려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진심 반, 사심 반의 행동이었다.

국대 보궐 선발전 소식 들었지?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파이팅!

도혁을 빼고 싹 다 돌린 다음, 그는 강한 두통을 다스리기 위해 약을 한 움큼 털어 넣고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 * *

이튿날, 올림픽 출전 부원들을 송별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대학로 한복판의 식당에 모여든 부원들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민석과 규영, 그리고 주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주원 선배님, 이번 올림픽도 잘하고 오세요.”

“진천에서 몸 건강하시고요.”

“그래, 고맙다.”

후배들이 주원의 테이블에 찾아와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도혁은 없었다. 무려 내 송별회인데 왜 안 왔지. 무슨 일 있나? 아냐, 신경 끄자. 내가 알 바 아니다.

텅 빈 자리가 자꾸만 눈에 밟혔으나, 주원은 애써 모른 척하며 부원들과의 대화에 동참했다.

“애들아, 많이 먹어.”

“네! 선배님.”

입으로는 다른 사람을 챙기면서 마음은 계속해서 도혁을 향해 있었다.

물론, 도혁이 송별회에 나가지 않은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그는 오로지 사브르 대표 선발전에 온 관심이 가 있었다. 지금도 연습실을 전세 내다시피 하고 나 홀로 훈련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마르셰(전진)!”

“찌르기!”

“베기!”

칼을 거침없이 휘두르는가 하면, 연습실 벽면에서 한 벽면까지 쉴 새 없이 달리며 순발력을 키웠다. 펜싱에 입문한 이래 이렇게까지 열심히 훈련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주 토악질이 나올 만큼 힘이 들었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땀이 주룩주룩 흘러 온 얼굴과 목덜미를 적셨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국내 랭킹 19위의 반란을 선보이려면 답은 연습, 또 연습뿐이었다.

내 꿈은 무엇인가.

당당하게 국가 대표에 선발되어 주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소망뿐이다. 그러려면 웬만한 마음가짐으로는 어림도 없다. 도혁은 당분간 주원을 쫓아다니는 행동을 자제해 보기로 했다.

어중간한 마음으로 연습에 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도혁이 주원을 아예 안 보고 살 수는 없었다.

연습 사이사이, 도혁은 주원의 SNS와 팬카페를 들여다봤다. 며칠째 새로운 게시물은 없었다. 그는 이미 수십 번씩 본 주원의 게시물을 뜯어보고, 중복 저장하고, 확대해서 보고, 캡처하며 별짓을 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도혁은 연습을 끝내고 생수병을 통째로 들이켰다. 원래도 기초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급격하게 늘어난 운동량 탓에 연습이 끝나고 나면 배고픔과 목마름이 밀려왔다. 생수 한 병을 순식간에 원샷한 그는 생수병을 분리수거함에 넣고 연습장 안 벤치에 앉아서 주원의 SNS를 들여다봤다.

그런데 오늘, 주원의 SNS가 평소와 달랐다. 새로운 셀카가 올라온 것이었다.

“헉!”

사진의 배경은 도혁에게도 낯익은 곳이었다. 주원은 교내 카페에서 찍은 음료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이다. 도혁은 핸드폰을 붙잡고 고민했다.

주원 선배가 바로 근처에 있다. 여기서 뛰어가면 1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주원이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섣불리 주원의 얼굴을 봤다가는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아… 어떡하지.”

하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 바로 지척에 있는데, 이대로 못 본 척하고 넘겼다가는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안 되겠다. 가 보자.”

도혁은 샤워실로 달려가서 급하게 찬물과 바디워시를 뒤집어썼다. 선배를 보러 가는데 차마 땀 냄새를 풍길 순 없었다. 머리는 말리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사복을 챙겨 입었다. 이렇게 될 줄 알면 멋진 옷을 입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오늘도 평소와 변함없이 트레이닝 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연습실에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장을 입고 가는 것도 웃겼지만, 사랑에 빠진 스무 살은 진지했다. 그는 이 와중에도 거울을 보고 얼굴 상태를 점검했다. 며칠간의 지옥 훈련으로 얼굴 살이 조금 내려 평소보다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오케이, 굿. 이만하면 됐어.

점검을 마친 도혁은 운동화를 꿰어 신자마자 미친 듯한 속도로 달렸다. 주원은 벌써 가 버리고 없을지도 모른다. 방금 사진이 올라왔다고 해서 실시간이라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 봐야 했다. 혹시 모를 가능성을 위해서.

“어서 오세요.”

점원의 인사를 들으며 도혁은 카페 안을 두리번거렸다. 카페 안에는 오늘따라 손님이 별로 없었다. 덕분에 도혁은 어렵지 않게 주원을 찾아냈다. 티셔츠 한 장만 입었지만 빛이 나는 모습에 도혁은 감격에 겨워 입을 틀어막았다.

카운터 뒤에 선 점원이 그런 도혁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도혁은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주원은 도혁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대앉아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한 손은 머리를 짚고 있었다. 도혁은 성큼 다가가려다 순간적으로 망설여지는 마음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지금 가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아직 국대 보궐 선발전이 열리지도 않았다. 저도 진천 가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때까지는 주원을 보지 않고 참기로 한 것은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주원에게 말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한참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주원은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일어났다. 그리고 도혁 쪽은 보지도 않은 채 다른 문으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짤랑- 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손님, 주문하시겠어요?”

점원이 물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도혁은 꾸벅 인사하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걸어가는 주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도혁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온 길을 되짚어가서 다시 연습장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우승하고 만다. 선발되고 만다. 그래야 저 사람과 다시 당당하게 대화할 수 있으니까.

* * *

닷새가 지났다. 보궐전이 열리는 토요일 아침, 주원은 펜싱 스타디움에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캐리어를 채우고 있었다. 옷방과 안방을 부지런히 오가며 운동복과 선수 유니폼을 한가득 채우자, 대형 캐리어가 꽉 찼다.

옷은 이만하면 됐고. 장비도 다 챙겼고. 개인 물품을 하나씩 챙겨 볼까.

주원은 침대맡에 앉아 책장과 선반을 둘러보았다. 탁상시계, 블루투스 스피커 등 사소한 물건을 꾸리고 있던 그의 시야에 하얀 베개가 들어왔다.

도혁이 베고 누웠던 베개네. 그 자식, 우리 집에 와서 놀기도 했지. 밥도 만들어 먹고. 그때만 해도 좋았는데 말이야.

“흠…….”

주원은 결국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누워 있으려니 또 도혁 생각이 났다.

며칠 전, 주원은 학교 근처 카페에 갔었다. 별다른 용무가 있는 건 아니라 혼자서 갔었다. 한동안 뜸했던 SNS에 사진을 올리고, 동기와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도혁의 소식을 들었다.

최근 들어 도혁은 미친 사람처럼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장에 틀어박혀서 훈련을 수행한다고 했다. 그 말에 주원은 잠시 멈칫했다. 어쩐지 송별회에도 오지 않더라니, 연습장에 틀어박혀 있었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생각났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너무 차가웠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기도 했거니와, 현실적으로도 서로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이대로 진천에 입소하고 나면 졸업 때까지 도혁을 볼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도혁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 줘서는 안 됐다.

다만 국대 보궐 선발전은 뜻밖의 일이었다. 잠시 그 녀석이 진천에 따라 들어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긴 했지만, 또 진지하게 연습에 임한다고 하니 새삼 녀석이 다르게 보였다.

마침 훈련장 근처 카페에 있던 주원은 도혁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고민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메시지를 썼다가 지웠다가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선배가 후배에게 격려를 보내는 건 별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녀석은 다르다.

결국 주원은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자리를 일어섰다. 나가는 길에 언뜻 덩치 큰 실루엣을 봤지만 도혁은 훈련에 매진하느라 밖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도혁은 아닐 것이다. 주원은 차가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걷다가 훈련장 쪽을 쳐다봤다. 저 안에서 미친 듯이 연습하고 있을 도혁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오늘은 드디어 국대 보궐 선발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현장에 가지 않은 건 오롯이 주원의 판단이었다. 가서 응원을 할 입장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떨어지라고 훼방을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내가 녀석 컨디션에 어떤 영향도 안 끼치는 게 정답이 아닐까. 가만히나 있어 주자. 녀석이 자기 기량을 있는 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나는 잠시 무존재가 되어 주는 거야.

그게 주원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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