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와중, 주원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국가 대표 펜싱 총감독인 장광철 감독이었다.
“네, 감독님.”
─ 주원아, 오늘 보궐전 참관 안 올 거냐?
“네, 감독님. 저는 진천 들어갈 짐이나 싸려고 합니다.”
─ K 대학 애들이 많이 출전하는데 시합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아? 민석이랑 규영이는 와서 본다고 벌써 자리 잡고 앉아 있는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 네가 보기엔 누가 될 것 같던? 역시 랭킹 높은 승호나 우식이, 둘 중에 하나가 뽑힐 것 같지?
현재 전문가와 펜싱 팬들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박승호와 성우식을 꼽고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이 가장 좋고, 랭킹 또한 가장 높기 때문이었다.
“예,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랭킹 두 자리 수 친구들하고는 기량 차이가 좀 나죠. 승호 형이나 우식이가 뽑힌다면 저희랑 호흡 맞추기도 편할 거고요.”
─ 그렇긴 해. 연맹 회장님이 이번에는 20위까지 부르라고 지시하기야 했지만, 사실 구색 맞추기용 아니겠냐. 결국은 랭킹 높은 애들 중에 뽑힐 거 같다.
네, 저도 예상 가능한 범주에서 승부가 결정됐으면 하는데요. 주원은 속으로 말을 삼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집어넣기 전, 메신저 창에서 <건방진 놈>을 검색했다. 뭐라도 응원의 말을 써 볼까 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창을 껐다.
얘가 오늘 잘하면 큰일 나지. 빈말로라도 응원 금지.
주원은 핸드폰을 침대에 휙, 던지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시합이 끝나기까지는 앞으로 약 다섯 시간. 정말 세세하고 자질구레한 것까지 챙기며 짐을 싸야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을 듯했다.
이도혁, 너한테 집중하기 싫어. 나 다른 일 할 거다.
주원은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블루투스 스피커의 먼지를 털어 냈다.
* * *
그 시간 도혁은 화성시 펜싱 스타디움에 와 있었다.
한국 펜싱 연맹 주최: 남자 사브르 보궐 선수 선발 경기장
크게 현수막이 나붙은 메인 경기장 안은 승부의 열기로 후끈했다. 오늘 모인 선수는 국내 랭킹 5위부터 20위까지 총 열여섯 명.
오늘 게임의 룰은 1:1 승부를 여러 차례 내면서 최종 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랜덤으로 두 명씩 짝을 이뤄 3판 2승제 게임을 치르고, 각 게임의 승자가 위로 올라가 최후의 한 명이 우승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룰 탓에 첫판을 치를 상대가 누가 되느냐가 이 시합의 향방을 가른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한참 레벨이 높은 선수를 만나 버리면 첫 라운드에서 된통 깨지고 그대로 탈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련 조를 추첨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선수들은 극도의 긴장감을 보였다. 다리를 떨기도 했고, 손톱을 물어뜯는 선수도 있었다.
공정함을 위해 선수들이 랭킹별로 나란히 섰다. 관례에 따라 20위 선수부터 직접 상대를 추첨하기로 했다. 20위 선수가 공을 뽑아 자기 상대를 확인하고 피스트로 이동했다. 그다음으로 진행 요원은 도혁의 앞으로 걸어와 투명 아크릴 상자를 내밀었다.
“참가번호 19번 이도혁 선수, 공 뽑으세요.”
꿀꺽. 도혁은 긴장된 목으로 침을 삼키며 공을 뽑았다. 6번 공이 나왔다.
“6번이네요. 성우식 선수랑 한 조 됐습니다.”
관중석에 앉아 있던 K대 응원단 사이에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6번은 곧 국내 랭킹 6위를 뜻했고, 성우식은 연륜 있는 선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전적으로만 봐도 성우식의 기록은 아주 화려했고, 시니어 무대 경험 횟수가 많았다.
19위와 붙기에는 너무 강한 상대라는 생각에 민석은 혀를 찼다.
“아쉽다. 도혁이 조기 탈락할 수도 있겠어요.”
“그러게. 주원 선배가 알면 속상해하겠는데.”
그 옆에 앉은 규영도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며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소곤거리는 사이 모든 조의 추첨이 끝났다. 도혁 또한 1차전을 위한 피스트 세팅과 장비 착용을 완료했다.
“B조 준비하시고요. 성우식 대 이도혁. 첫 바우트 시작합니다. 프레, 알레!”
도혁은 시작 신호와 동시에 앞으로 돌진하며 칼을 휘둘렀다. 휙, 칼끝이 상대의 가슴을 정확하게 찌르며 득점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동작이었다.
“뚜슈(터치)!”
삐익. 소리와 함께 득점이 인정됐다. 도혁은 이를 꽉 깨물고 다시 준비 자세를 취했다.
내가 오늘 기필코 이기고 만다. 그게 누구든, 다 덤벼!
비록 마스크에 가려져 있었으나, 마치 눈빛이 뚫고 나와 번쩍 빛나는 듯했다. 성우식이 그 눈빛에 주춤하는 사이, 다시금 선제공격이 이루어졌다.
챙, 챙. 끝도 없이 날카로운 마찰음이 발생했다. 한 점 한 점을 딸 때마다 도혁은 포효하며 에너지를 발산했다.
“으아아!”
그는 공격에 성공할 때마다 허공으로 박차 오르고 주먹을 휘두르며 상대를 압도했다. 실점을 했을 때에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기합을 넣었다. 힘이 철철 넘치는 플레이에 서서히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 형, 저기 좀 봐요. 벌써 5 대 1이에요.”
민석이 옆 조 경기를 관전하던 규영을 팔꿈치로 찔렀다. 규영은 알 없는 안경을 고쳐 쓰며 눈을 크게 떴다.
“도혁이 장난 아닌데? 어떻게 된 일이지. 우리가 알던 도혁이가 아닌 것 같은데?.”
K대학 응원단들도 하나둘 도혁이 서 있는 피스트로 시선을 옮겼다. 도혁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날아다니며 칼을 휘둘렀다. 베테랑 성우식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장내의 수군거림이 점점 커졌다.
“바우트 게임 끝났어! 도혁이가 이겼다.”
“어떻게 된 거야. 다음 라운드 진출이라고?!”
“대단하다.”
도혁의 다음 상대는 랭킹 8위로, 역시 만만치 않은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도혁은 첫 바우트를 내주며 게임을 시작했으나 이내 역전했다.
도혁은 눈 깜짝할 새 4강전에 진출했다. 승리의 기쁨을 맘껏 표현하는 그를 보며, 응원단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 도혁이가 달라졌어요!”
“진짜 잘해!”
4강에서도 도혁은 선전했다. 한 바우트씩 승패를 주고받은 후, 마지막 승부 게임에서 끝에는 9:4로 게임을 리드했다. 또한 지속해서 공격을 주도했다. 사브르의 특성상 선공이 중요했기에, 누가 봐도 도혁이 앞서가는 그림이었다.
“규영이 형, 이러다가 도혁이 국대 되는 거 아니에요?”
“진짜로 우리랑 한솥밥 먹을 수도 있겠다.”
민석과 규영은 혀를 내두르면서 도혁의 경기에 집중했다. 심판이 다시금 두 선수에게 준비 신호를 줬다.
“프레, 알레!”
도혁과 상대 선수가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 나갔다. 챙. 허공에서 칼끼리 맞부딪쳤다.
“윽!”
그때 도혁이 넘어졌다. 왼쪽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넘어진 탓에, 손목에 강한 통증이 왔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한 고통이었다.
“19번. 괜찮습니까?”
심판이 다가와 도혁을 살폈다. 도혁은 손을 짚고 일어나 보려 했으나 통증 때문에 선뜻 일어나지 못했다.
“괜찮… 윽.”
“잠깐 중단해 줄 테니 응급처치 부스로 가세요.”
“감사합니다.”
의무 부스에 도착하자 스태프가 그의 손목을 살피고 스프레이를 뿌려 주었다. 이리저리 손목을 돌려 보았으나, 움직일수록 손목이 아팠다. 조금이 아니라 제대로 접질린 것 같았다.
이 손목을 가지고 마지막 바우트를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인가, 객관적으로는 아니었다. 심판이 이도혁에게 다가와 남은 시간을 알리며 물었다.
“19번. 경기 속행해도 되겠습니까? 그만둘 거면 지금 기권 선언하세요.”
* * *
그 시각 주원은 자기 차로 장비와 캐리어를 옮기는 중이었다. 큼지막한 장비 가방을 뒷좌석에 실은 순간, 주머니 깊숙이 쑤셔 박았던 핸드폰이 웅웅 진동했다. 액정을 켜 확인해 보니 민석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형, 준비 잘하고 계십니까? 저랑 규영이 형은 보궐 선발전 잘 관전 중입니다.
주원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메며 답장을 써 넣었다.
응. 나 지금 짐 싹 챙겨서 정리 중이야. 시합은 어떻게 돼 가?
이변이 일어나고 있진 않겠지? 슬쩍 도혁의 이야기를 물어볼까 말까 할 때, 민석의 답장이 도착했다.
지금 4강전 중인데요. 도혁이가 심하게 다쳐서 시합 중단됐어요.
멈칫. 주원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손목 삐었거든요. 심판이 인저리 타임 많이 못 준다고 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다시 피스트로 못 돌아오는 중이에요. 오늘 진짜 잘했는데 여기서 기권하면 너무 아까울 것 같아요.
“…….”
도혁이 뽑히지 않길 바랐지, 다치길 빈 건 아니었다.
주원은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라앉힌 다음 다시 메시지 창에 글자를 써 넣었다.
도혁이한테 전해 줘. 힘내라고.
길게 말할 것은 없었다. 그래도 선배 된 도리로 응원의 메시지 한 마디는 남겨야 마땅했다.
“후우…….”
주원은 가방과 장비를 마저 챙겨 넣고 운전석에 앉았다. 원래 계획은 이대로 진천으로 가는 것이었다. 어차피 누가 보궐 멤버로 뽑히든, 내일 예비 소집은 진천 선수촌에서 열리게 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슬슬 진천으로 출발해 너무 늦지 않게 선수촌에 들어가 방도 배정받고, 짐도 풀고. 여유 있게 쉬어야 했다. 그게 맞았다. 하지만 주원은 발바닥에 풀이라도 붙인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그대로 30분을 꼬박 앉아 있었다. 시계를 보자 오후 3시. 슬슬 시합이 마무리될 시점이었다. 그러나 아까의 문자 이후로 민석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됐길래 연락이 없지. 도혁의 손목은 무사할까. 어쩌자고 몸을 다쳤을까. 나 때문에 무리한 건가. 인대 다치면 큰일 나는데.
그나저나 기권을 했으려나? 기권 않고 게임을 했다면 졌겠지. 손목이 아픈 상태로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선수는 없으니까.
“…….”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운전대만 만지작거릴 때였다.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건방진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