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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18화 (7/115)

18화.

“…….”

조금 망설여졌다. 하지만 걸려 온 전화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주원은 후우,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말이 들려올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들어 봐야 했다.

“어, 나다.”

─ 선배님.

수화기 저 너머에서는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 듣기에도 엄청난 성취감과 승리의 기쁨이 느껴졌다. 주원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결과를 알 수 있었다.

─ 저 진천 가요.

도혁이 우승했구나. 생각과 동시에 안도감이 그를 찾아왔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굉장히 밝고 활기찼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아픈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주원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 저 4강 마지막 바우트에서 다쳤잖아요. 그런데 민석 선배님이 주원 선배님이 응원하고 계시다고, 힘내라고 하셨다고 전해 주셨어요. 저 그 말 듣자마자 자리 박차고 일어나서 피스트로 뛰어갔거든요. 그때부터 한 점도 안 내주고 이겼어요. 결승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완승했고요.

도혁은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 냈다. 그만큼 그는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 수화기 너머로 그의 벅찬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역시 내 말이 자극제가 됐구나. 축하할 일은 축하해 줘야 하겠지. 하지만 이 시건방진 놈이 국대 자리를 꿰찬 탓에 주원 자신의 입술은 위기 경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대가 된다는 건 한 선수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다. 6년 연속 국가 대표로 뛰고 있는 주원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축하한다.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유감이지만, 한 선수로서는 정말 많이 축하해.”

─ 선배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너무 행복하네요. 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죽지는 말고.”

─ 이게 다 선배님 덕분이에요.

“…….”

─ 선배님이 힘내라고 했으니까 저 진짜 힘낼 거예요. 국대로서도 열심히 하겠지만,

“하겠지만 뭐.”

─ 선배님 마음 사로잡는 것도 꼭 해낼 겁니다. 두고 보세요.

“왜 또 결론이 그렇게 되는데? 끊어!”

주원이 정색하며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쓸어 넘기며 핸들에 엎드렸다.

이 자식이 결국 해내고 말았네. 여기로 쳐들어온다 이 말이지.

“괜찮으려나…….”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도혁이 입술 박치기를 시도했던 때를 생각하니 다시 화도 치밀었다.

“아냐. 여차하면 두드려 패면 돼.”

주원은 애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심호흡했다. 하지만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일까, 심장 박동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 * *

이른 아침, 펜싱회관 앞에 도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하는 그를 보며 스태프들과 박찬진 코치는 흐뭇하게 웃었다.

“어서 와라, 이도혁. 국대 선발돼서 기분이 아주 좋은가 봐.”

“날아갈 것 같아요. 버스 안 타고 뛰어서도 진천까지 갈 수 있습니다.”

“진짜 좋은가 보다. 입촌하면 주원이가 죽어라 훈련시킬 건데 괜찮겠어? 걔가 우리 코치들보다 더 악랄한데.”

“주원 선배의 악랄한 훈련. 상상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별종이네.”

박 코치는 도혁의 패기 넘치는 모습이 맘에 든다는 듯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코치와 스태프의 격려 인사를 받으며, 도혁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진천까지 가는 길,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유난히도 맑았다.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하늘과 따사로운 햇빛이 마치 자신의 앞날을 축하하는 듯했다.

버스는 막힘없이 달렸다. 도혁을 태운 차는 서울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진천에 입성했다. 이윽고 도혁은 선수촌 입구에 다다랐다. 정문 입구에 나붙은 글씨가 시선을 잡아챘다.

진천 선수촌

단 다섯 글자만으로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곳이고, 일생의 목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

진천 선수촌 입성을 환영합니다

커다란 플래카드가 정문에 나붙어 있었다. 도혁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이곳에 발을 들이는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주원 선배와 함께하기 위해서. 쿵쿵, 심장이 너무 요란하게 뛰어 귓가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이도혁, 감탄은 그만하고 어서 내려라. 펜싱 연맹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셔.”

“아, 네네.”

“나머지 국대 애들도 같이 있대. 어차피 다 같은 학교라서 아는 사이라지만 정식으로 인사해야지?”

박찬진의 말에 도혁은 정신이 확 들었다. 한 명의 국대로서 정식으로 팀에 합류한다. 주원이 주장으로 이끄는 국가 대표에 정정당당하게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예!”

“기합이 바짝 들었네. 보기 좋다.”

박 코치와 스태프들은 짐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도혁도 장비 가방을 둘러메고, 캐리어를 챙겨 그들의 뒤를 따랐다.

생전 처음 와 본 선수촌은 무지막지하게 넓었다. 잔디가 널따랗게 펼쳐진 구기 종목 연습장, 각종 실내 체육관이 가는 길목마다 나왔다.

이러다가 길을 잃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또한, 가도 가도 펜싱 경기장이 보이지 않았다.

“코치님, 우리 경기장은 대체 어디 있,”

“다 왔다.”

와. 도혁은 눈앞에 우뚝 솟은 건물을 보며 크게 감탄했다. 화성시에 있는 펜싱 스타디움도 규모가 상당했지만, 이 진천 연습장은 더 컸다. 또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은빛 외관에는 가로 길이만 5미터가 넘을 듯한 <검객들이여! 로마 땅에 애국가를>이라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

바로 여기구나. 주원 선배와 내가 사랑에 빠질 곳이.

도혁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감격한 얼굴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를 보며 박 코치는 다시 한번 어린 선수의 패기에 반했다. 단단히 오해를 한 것이다.

“자, 들어가자.”

“네! 코치님.”

도혁은 씩씩한 걸음으로 걸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박 코치와 도혁은 시원시원한 로비를 지나, 복도 가장 왼쪽에 위치한 <연맹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예상대로 민석, 규영, 그리고 주원이 앉아 있었다. 도혁과 주원의 눈이 마주친 순간, 주원은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어서 와! 반갑네, 이도혁 군.”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연맹 회장 최종호가 벌떡 일어나 도혁을 반겼다. 주원은 예의상 함께 일어나 그들 뒤편으로 섰다. 도혁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려 국대로 선발되었고, 또 주원 자신과 딱 붙어 다닐 기회가 마련되었으니 말이다.

“불굴의 투지가 인상적이었네. 보궐전 때 보여 준 모습처럼만 시합에 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저한테 불가능은 없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대답 한번 잘하네.”

최 회장은 도혁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평소 호탕하고, 사람 보는 식견이 예사롭지 않은 그가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하는 인재라. 주원은 도혁이 실은 강아지가 아닌 늑대가 아니었을까 의구심을 품었다.

“허허. 그럼 김 비서, 태극마크 수여식 시작하지.”

“네, 회장님.”

회장의 비서가 조용히 뒤쪽으로 빠져 트레이를 하나 가지고 왔다. 그 위에는 태극기 모양의 배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최 회장은 도혁의 가슴에 직접 배지를 달아 주었다.

“이제 자네는 대한민국 국가 대표 펜싱팀이야.”

“영광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원을 비롯한 일동이 박수를 쳤다. 주원은 속으로 별생각이 다 들었다. 마땅히 축하해 주어야 하는 상황이 맞으나, 또 생각해 보면 도혁의 목적이 빤한데 좋다고 축하해 줄 수 없는 이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그럼 이제 선배들하고 인사 나누지 그래. 어차피 같은 대학 출신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자기소개 해야지.”

“네, 이도혁입니다. 사브르 국내 랭킹 19위, 선배님들의 지도 편달이 필요합니다. 배우는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환영한다.”

“감사합니다!”

주원이 도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도혁은 해맑게 웃었다. 주원은 차마 따라 웃을 수 없어, 애매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최 회장의 방을 나서고, 4인방끼리 사무실 내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민석과 규영은 도혁을 얼싸안고 거의 춤을 췄다.

“와, 나는 도혁이가 와서 너무 좋다.”

“나도. 앞으로 진짜 재밌겠다. 너도 우리랑 B로그 같이 찍자.”

“규영 선배님이 운영하시는 선수촌 이모저모 B로그 말씀하시는 거죠?”

“너도 아는구나?”

“펜싱 선수라면 필수 구독이죠.”

“말을 예쁘게 하네. 허허.”

규영이 흡족한 듯 웃으며 안경테를 매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주원은 기분이 미묘했다. 그런데 또 대놓고 짜증이 날 만큼 싫으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이 기분 뭔데? 아, 열받아.

“그럼 우리 점심시간인데 밥이나 먹으러 갈까?”

민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와, 저 진천 선수촌 밥 먹어 보는 건가요?”

“당연하지. 안 그래도 오늘 B로그 뭐 찍을까 했는데 ‘신입과 함께 밥을’ 찍어야겠어. 따라와. 식당은 저 건물이야. 짐은 그냥 여기다가 두고 가면 돼.”

규영이 도혁을 챙겼다. 주원은 잠자코 있었다.

“선배님, 식사하러 가시죠.”

도혁이 기어코 주원에게 말을 붙였다. 아까부터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결국은 수줍게 웃는다. 큰 덩치를 배배 꼬며 살살 주원의 눈치를 본다. 주원은 그 투명함이 깜찍했으나, 동시에 화가 났다.

앞으로 이런 풍경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지켜봐야 한다는 거지? 아, 안 봐도 비디오네.

“그래. 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는 뭘까?”

“돈가스 나왔으면 좋겠다.”

“난 제육볶음.”

민석과 규영 2인조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동안, 도혁이 슬그머니 주원 옆으로 와서 섰다.

“오느라 고생 많았다.”

주원은 무심하게 한 마디를 툭 던지고 뒷짐을 졌다.

“고마워요, 선배님. 선배님 아니었으면 절대 이 자리까지 못 왔을 거예요.”

“…어차피 나 보러 여기 온 거 아니야?”

“그건 맞아요.”

“말이라도 못 하면.”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너랑 나랑 안 친한 건 아니었어.”

“더 친해지자는 소리예요.”

“조용히 하고 밥 먹으러 가자.”

주원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후배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그래도 도혁은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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