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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금지 채선배 찔러나 보기-19화 (8/115)

19화.

구내식당은 펜싱 경기장 옆 건물이었다. 여러 종목 선수들이 이곳 제1 구내식당 앞에 장사진을 치고 서 있었다.

“사람이 되게 많네요.”

“스태프들이랑 견학생들도 여기를 주로 이용해서 그래. 우리는 선수니까 저쪽, 전용 배식구 이용할 수 있어.”

민석이 도혁을 친절하게 안내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각 종목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특수 식단을 배식받고 있었다. 배식구에 줄지어 놓인 연어 스테이크, 훈제 오리를 담은 접시가 눈에 띄었다.

“우리도 시즌 되면 저런 거 먹어야 돼. 오늘은 일반식.”

“네. 와… 신기하다.”

진천에 처음 와 보는 도혁은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렇게 큰 식당에 모인 수백 명이 모두 운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무심코 선 배식 줄에서 유명 테니스 선수를 보고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여기서 제일 유명한 건, 따지고 보면 주원이 형이 제일일걸?”

민석이 도혁을 놀리며 웃었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지금도 선수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주원을 힐끔거리는 중이었다. 가끔 여자 선수들은 감탄사를 내뱉었고, 남자 선수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등장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미남 메달리스트. 주원은 한 운동 한다는 이 동네에서도 톱의 위치였다.

배식을 받고 나서, 도혁은 주원의 옆자리를 홀랑 꿰차고 앉았다. 주원은 인상을 쓰려다가 참았다. 사실 자리라고 해 봤자 네 명이 앉는 거라, 옆자리가 아니면 앞자리였다.

“선배님, 맛있게 드세요.”

“그래. 너도.”

“헤헤, 선배님이랑 먹으니까 너무 좋아요.”

“…….”

주원이 묵묵하게 국을 떠먹는 동안, 민석과 규영은 정신 사납게 굴며 핸드폰을 미니 삼각대에 세팅했다. 삼각대에 핸드폰을 올리자 그럴싸한 촬영 구도가 갖춰졌다.

“이런 건 또 언제 가져왔어?”

“B로거라면 늘 갖고 다니죠. 크기가 작아서 휴대하기 좋거든요.”

“그걸로 뭐 찍으려고?”

“오늘은 막내 소개요.”

규영이 블루투스 리모컨으로 카메라를 셀카 모드로 전환했다.

“선수촌 이모저모, 오늘은 선수들과 함께 밥을! 시간입니다. 말 그대로 진천 선수들은 어떻게 식사를 하는지, 무슨 메뉴를 먹는지 보여드리는 건데요. 오늘은 스페셜 게스트가 있어요. 바로 저희 사브르팀에 새로 합류하게 된 이도혁 선수입니다!”

민석이 신난다고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카메라가 반전되며 도혁을 향했다.

“이도혁 선수. 선수촌도 처음이고 구내식당도 처음인데 급식 맛이 어떻습니까?”

도혁은 뺨을 긁으며 배시시 웃었다. 한쪽 눈이 유난히 작게 접히며 볼우물이 파였다.

“이거 먹으려고 진천 들어왔나 싶을 정도로 맛있습니다. 돈가스 최고예요.”

“맛을 잘 아시는 분이네요. 맞습니다. 우리 선수촌의 자랑은 바로 이 바삭바삭한 돈가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선수촌에는 사실 먹을 게 별로 없어요. 배달되는 곳도 거의 없다시피 한데, 그래서 이 돈가스 한 조각이 더욱 소중한 것 같습니다.”

도혁이 먹기에 이 돈가스는 서울 시내 맛집보다 훨씬 훌륭했다. 그는 한 조각을 우물우물 씹어 맛본 다음, 주원의 식판을 살폈다. 그 역시 맛있었는지 어느새 돈가스를 다 비운 상태였다.

“선배님.”

“왜.”

“더 드세요.”

도혁이 제 몫의 돈가스를 덜어 주원의 식판에 올려 주었다. 주원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 먹어. 난 됐어.”

“선배님이 잘 드시는 것 같길래요.”

“내가 먹을 게 없어서 후배 급식을 빼앗아 먹냐.”

“빼앗아 먹는 게 아니라 제가 드리는 건데요.”

옥신각신을 하던 중, 규영이 끼어들었다.

“그림 너무 좋네요. 팬싱(FAN-CING: 국가 대표 펜싱 서포터즈) 여러분, 주장과 막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희가 이렇게 사이가 좋아요.”

규영은 허허 웃으며 주원을 카메라에 담았다. 주원은 평소 국가 대표를 응원해 주는 팬들에게 몹쓸 꼴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돈가스를 먹었다.

“맛있게 드셔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배님. 그나저나 규영이 형, 여기는 배달 음식이 없다고요?”

도혁의 질문에 규영은 무릎을 쳤다.

“네, 맞아요. 안타깝게도 맛집은커녕 그냥 배달이 되는 집조차도 한 군데뿐입니다. 바로 배달로만 한 시간 걸리는 터미널 앞 치킨집인데요, 그곳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헉, 몰랐어요.”

“지내다 보면 우리 도혁 선수님도 외부 음식의 소중함을 알게 될 겁니다. 편의점 물건도 영 부실해요. 과자도 최신상은 없고 다 옛날 거고요. 저희는 술도 잘 못 마시게 하다 보니까 편의점도 잘 안 가요.”

“그러면 이온 음료수 정도나 사 마시겠네요.”

“맞습니다. 그나마 건질 게 아이스크림 정도? 아, 말 나온 김에 아이스크림 먹으러 갑시다. 저는 벌써 돈가스 다 먹었거든요.”

“좋아요!”

수다스러운 20분이 금세 지나갔다. 실컷 배부르게 먹은 주원은 빚진 기분에서 얼른 해방되고 싶었다.

“내가 사 줄게. 편의점 가자.”

“와! 주장이 쏜다!”

“선배님, 사랑합니다!”

규영과 민석이 주원의 양팔에 덥석 매달려 재롱을 피웠다. 도혁 역시 그에게 안겨 들려 했지만, 주원이 가자미눈을 뜨는 바람에 실패했다.

“편의점은 같은 1층에 있어. 저기가 연결 통로고.”

식당에서 복도 하나를 지나면 바로 편의점이 나오는 구조였다. 네 사람은 줄을 지어 편의점으로 이동했다. 이미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커피나 과자,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편의점에 몰려 들어와 있었다. 우선 자리부터 잡자는 말이 나와, 4인방은 편의점 앞 노상에 놓인 파라솔 아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사람 너무 많네요.”

“응. 복잡하니까 내가 사 올게. 규영이는 메론이구나, 민석이는 상어바지?”

“네, 맞아요.”

“막내는?”

주원의 물음에 도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들었다.

“전 가서 보고 고를래요. 선배님이랑 같이 편의점 들어가겠습니다.”

“복잡한데 뭐 하러 그래.”

“같이 들어가요, 선배님.”

한순간도 나한테서 떨어질 생각이 없구나. 주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도혁에게 손짓을 했다.

“그래. 따라와라.”

그들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편의점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이리저리 치여 가며 한참을 전진해, 두 사람은 겨우 냉장고 앞에 설 수 있었다. 주원은 냉장고 문을 열고 규영과 민석 몫의 아이스크림을 먼저 빼 들었다. 그런 다음 도혁에게 물었다.

“넌 뭐 먹을래?”

“저… 저는 커플바요.”

“아, 초코맛 아이스크림? 어렸을 때 갈라 먹는 거 많이 했었는데. 오랜만에 본다.”

주원이 팔을 깊숙이 넣어 커플바를 꺼내 주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무더기를 보며 중얼댔다.

“난 뭐 먹지……?”

“선배님, 저랑 같이 먹어요.”

“뭐? 커플바 나눠 먹자는 소리야?”

주원이 눈썹을 찌푸렸다. 도혁은 비 맞은 생쥐처럼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저 소원인데…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돼요?”

“내가 왜 너랑 커플바를 나눠 먹어야 하는데?”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한 번 들어주실 수 있잖아요.”

“내가 살다 살다 별소릴 다 듣네. 됐어. 난 여름 사냥 먹을 거야.”

주원이 커피 맛 아이스크림을 빼 들었다. 그러자 도혁이 그의 손목을 탁, 잡아챘다.

“그럼 여름 사냥 나눠 먹어요. 이것도 반 쪼갤 수 있잖아요.”

주원은 기가 막혀 여름 사냥을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난 참외바 먹을란다, 이 자식아!”

그러고는 도저히 나눠 먹을 수 없는 디자인의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도혁의 완패였다.

“다들 아이스크림 인증샷 찍어요. 아이스크림 먹는 것도 B로그에 편집해서 넣어야지.”

규영이 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네 명분의 아이스크림이 중앙으로 모였다. 도혁은 울적한 표정으로 커플바를 들이밀었다.

“도혁이는 욕심도 많네. 혼자서 2인분 먹어.”

“…그런 거 아니에요.”

원래 좋아하는 맛도 아니라 우물우물 먹는데 별맛도 없었다. 도혁이 침울하게 있자, 민석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너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손목도 다쳤는데 어떻게 이긴 거야.”

“결승전 때 나 심장 터지는 줄 알았잖아. 나 네 팬 될 뻔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테이핑하고 왔네. 병원은 다녀왔어?”

“아뇨. 아직 못 갔죠. 시간이 없어서.”

“어디 좀 보자.”

민석이 도혁의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주원은 하얀 테이프가 칭칭 감긴 그의 손목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대로 한 거 맞아? 네 손으로 했으면 왼손으로 감았을 거 아니야.”

“아, 그렇긴 한데요……. 어쩔 수 없었어요. 룸메도 어디 가고 없어서 저 혼자였거든요.”

“그럼 인마, 누구라도 만나서 잘 감아 달라고 했어야지.”

주원이 목소리를 깔았다. 그러고는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좀 기다려 봐라. 여기 편의점만큼 테이프 잘 갖추고 있는 곳도 없으니까.”

“선배님이 해 주시려고요?”

“어, 내가 제일 잘해.”

잠시 후 주원은 냉각 스프레이와 테이프가 가득 든 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그가 입으로 테이프를 물고서, 도혁의 손목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테이프를 길게 끊어 아픈 부위에 힘 있게 테이핑을 하는 동안, 도혁은 황홀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손목 관리 잘해. 펜싱은 다리 힘이 7할이라고 하지만 결국 칼 휘두르는 건 손이니까.”

“네, 선배님.”

사실 짐승 같은 회복력으로 어제 다 나았는데, 아픈 척 한번 해 본 걸로 이런 꿀을 빨다니. 진천 오길 잘했다. 너무 좋다, 정말.

도혁은 오랜만에 가까이서 보는 주원의 모습과 은은하게 끼쳐 오는 민트 향기에 황홀함을 느꼈다.

“선배님, 저 이쪽 팔목도 아픈데요.”

“여긴 또 언제 다쳤어? 거짓말 아니야?”

“아니에요. 아, 아프다. 진짜로 아파요.”

“꾀병이기만 해 봐.”

지금 막 상상으로 다쳤어요. 도혁은 열심히 연기하며 주원을 속여 넘겼다. 단짠단짠 편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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