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아이스크림 타임까지 가진 네 사람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민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우리 드디어 네 명 모였으니까 이제는 정해야겠네요.”
“맞습니다. 룸메이트 결정해요!”
규영과 민석이 유난을 떨며 편의점 테이블을 두구두구 북처럼 쳤다. 펜싱은 전통적으로 4인 1팀이었는데, 선수촌에서 1인 1실을 쓸 수 있음에도 두 명씩 방을 나눠 쓰는 문화가 있었다.
또, 진천에서 정한 룸메이트를 시즌 내내 유지하면서도, 전지훈련이나 해외 경기에 나갈 때마다 다시 룸메이트를 추첨한다는 룰이 있었다. 다양한 조합을 꾀해 서로 간의 친목을 끈끈하게 다지기 위해서였다.
주원은 순간 뜨끔했다. 펜싱팀은 항상 공정하게 룸메이트를 정해 왔으나, 이번만큼은 도혁을 피해 민석이나 규영과 어떻게든 방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재빠르게 민석의 어깨를 붙들고 말을 걸었다.
“민석아, 너 나랑 같,”
“민석이 형, 제가 알기로는 룸메이트는 제비뽑기나 사다리 게임 같은 걸로 공정하게 정한다고 B로그에서 봤는데 맞죠?”
“어, 맞아. 완전 랜덤이니까 더 재밌지.”
“실은 제가 사다리 게임 앱을 준비해 왔어요.”
“오, 진짜?”
“네. 이것 보세요.”
도혁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팀원들 앞에서 낯선 앱을 실행했다.
“완전 본격적인데? 좋다.”
“네 명이 사다리 타서 두 명씩 갈라지는 걸로 설정할게요. 어때요, 공정하죠?”
“어, 좋아. 아주 공정해 보인다.”
“나도 찬성.”
앱을 미리 준비해 왔다는 게 어딘지 수상했지만 말 그대로 랜덤으로 편성된다면 주원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주원도 고개를 끄덕여 찬성 의사를 표시하자 게임이 시작되었다. 도혁이 앱을 조작하며 팀원들에게 실시간으로 화면을 보여 주었다.
“그럼 민석이 형부터 방 배정할게요. 자, 결과 보기.”
곧 띵동, 소리와 함께 화면이 변환되었다.
“형은 A호 당첨이에요.”
“오케이. 내 룸메이트는 누가 되려나?”
“다음으로는 규영이 형 갈게요.”
도혁이 규영에 해당하는 캐릭터 버튼을 눌렀다. 귀여운 효과음과 함께 규영의 캐릭터가 달렸다.
“난 어느 방일까. 어… 나도 A호다! 민석이랑 나랑 룸메이트야!”
“두 분, A호 룸메이트 되셨습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너랑 주원 선배가 같은 방이네! 우리 결정 완료다.”
“아, 그러게요. 저랑 주원 선배가 한방… 저희 같은 방 됐어요. 선배님.”
도혁이 수줍게 웃었다. 주원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말도 안 된다. 이 게임 랜덤인데 왜 이래. 왜 하필 도혁이야!
“얘들아, 우리 이거 다시 하자.”
“형, 왜요?”
“한 번만으로 룸메이트가 결정된다는 건 너무 얄팍한 우연에 기대는 것 같아. 그러니까 한 번만 더 해 보자. 응?”
팀원들이 자리를 떠나려 하자, 주원이 다급하게 그들을 다시 앉혔다.
“네, 그래요.”
“다시 하죠, 뭐. 전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민석과 규영은 별 상관 없다는 듯 찬성했다. 그런데 도혁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요. 다시 한번 돌려 보세요. 선배가 직접이요.”
그러면서 핸드폰을 주원에게 건네기까지 했다. 주원은 그저 새로운 룸메이트를 뽑고 싶다는 생각에 심취해, 도혁이 슬쩍 웃고 있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나부터 간다. 나는 B호. 바로 도혁이 뽑을게.”
주원은 아주 신중하게 추첨 버튼을 눌렀다. 도혁을 나타내는 캐릭터가 사다리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마, 말도 안 돼.”
결과는 B호. 이번에도 두 사람이 룸메이트가 된 것이다.
“주원이 형, 이 정도면 도혁이랑 운명인데요?”
“그만 받아들이세요. 저랑 규영이 형은 이만 숙소 들어갈게요. 이따 봐요!”
주원은 허탈함과 막막함에 한참 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주원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어깨를 떨어뜨린 채 앞서가는 규영과 민석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도혁은 핸드폰을 다시 받아 든 다음 몰래 메신저를 켰다. 그리고 컴퓨터공학과 친구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네가 짜 준 프로그램 잘 실행되더라. 정말 고맙다. 내가 서울 가면 크게 밥 살게.
“1009호. 앞으로 너랑 나랑 지낼 방이다.”
“어……? 침대가 두 개네요.”
방은 크게 하나의 방으로 양쪽에 각각 책상과 침대가 있고, 짧은 복도와 문이 있었다. 욕실 두 개를 살핀 다음 도혁은 침실을 보며 실망스러운 뉘앙스로 중얼거렸다.
“침대가 두 개지 그럼. 하나여야겠어?”
“침대 사이도 너무 떨어져 있,”
주원이 험상궂은 얼굴로 도혁을 노려봤다. 도혁은 어깨를 움츠리며 졸아붙었다.
“그럼 저 좀 씻고 나올게요. 제가 쓰는 욕실이 복도 왼쪽이죠?”
“어, 다녀와라.”
도혁이 방을 나선 후, 주원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나. 날 노리는 알파 놈과 한방에 갇히다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주원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머리를 털어냈다.
아니다. 신경 쓰면 지는 거다. 아무렇지 않게 지내야…….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로 이리저리 자리를 뒤척이고 있던 중이었다. 침실 문이 벌컥 열리며 도혁이 들어왔다. 그는 아래에만 트레이닝 바지를 걸치고, 위는 완벽하게 탈의한 상태였다.
“뭐야. 너 옷을 왜 안 입고 다녀.”
“티셔츠 갖고 들어가는 걸 깜빡해서요. 죄송합니다.”
도혁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 내며 제 짐가방을 열었다. 진짜로 티셔츠를 갖고 들어가는 걸 깜빡한 것뿐인지, 그는 짐가방을 뒤적거리며 옷을 찾았다. 그러는 동안 도혁의 헐벗은 등이 사정없이 꿈틀거렸다. 주원의 시선은 저절로 도혁의 울퉁불퉁한 근육에 따라붙었다.
이 녀석 덩치 좀 봐라? 나도 한 근육 하지만 얜 클라스가 다르네.
전신이 근육으로 펌핑된 몸은 잘 다져졌다기보다는 화가 나 보였고, 알파미가 넘쳐흘렀다. 처음 봤을 때부터 펜싱 선수라기보다는 유도 선수가 아닌가 싶었을 만큼 큰 덩치에 걸맞게, 큼직하게 조각된 근육이 도혁의 등 가득히 새겨져 있었다. 넓게 뻗은 어깨 아래로는 그야말로는 웬만한 사람의 두 배는 되어 보이게 넓은 등짝이 드러나 있었다.
홀린 듯 그 등을 바라보던 주원은 퍼뜩 깨달았다.
…잠깐만. 저 정도 덩치면, 여차할 때 위험한 거 아니야?
주원은 자신의 팔다리를 슬쩍 훑어보았다. 펜싱이라는 종목 특성상 벌크업은 되지 않고 늘씬하고 탄탄하게 잔근육이 붙은 몸이었다. 그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체격에 원체 키가 큰 편이긴 했으나, 냉정하게 말해 도혁같이 유도 선수 스타일은 아니었다.
안 되겠다. 오늘부터 몸 키우기 들어가야겠어.
여차하면 두들겨 패면 그만이지만, 만사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다. 완력 키우는 운동에 뭐가 있지? 빠르게 효과 보는 게…….
그래. 런지와 플랭크를 미친 듯이 하고, 거기에다가 윗몸일으키기 하루에 100번 두 세트 추가하자.
“선배님.”
“어, 왜.”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도혁이 얌전하게 이불을 걷고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도혁 쪽의 수면 등이 꺼질 줄을 몰랐다.
“안 자? 잔다며.”
“자려고 했는데요, 설레서 눈이 안 감겨요. 이런 말 하면 선배님이 싫어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래요.”
“…….”
“지금 다 꿈같아요. 이렇게 진천에 와 있는 것도, 선배랑 나란히 누워 있는 것도요. 우리 지금부터 아주 오랫동안 한 공간 안에 있을 거잖아요. 막연하게 상상만 했던 일을 이뤄서…….”
도혁이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잠시 쉬었다가, 그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오늘 한숨도 못 잘 것 같아요.”
“…….”
“아시죠. 운동하는 사람한테 제일 중요한 건 잠이라는 거. 그런데도 밤을 새워서라도 이 행복감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만큼 저한테는 오늘 밤이 특별해요.”
“…….”
“주무시는구나. 좋은 꿈 꿔요, 형.”
형 아니라 선배님, 이라고 정정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잠든 척을 실컷 하고 난 뒤였다. 주원은 눈을 꼭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형이라는 한 글자가 귓가를 끝없이 맴돌아, 묘한 여운을 남겼다.
평화로울 줄만 알았던 진천 생활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새벽녘, 주원은 어느덧 깊게 잠이 들었다.
“으음…….”
주원이 뒤척거리며 도혁 쪽으로 돌아누웠다. 도혁은 마치 못된 장난을 치려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놀라며 숨을 멈추었다. 다행히도 주원은 깨지 않은 듯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도혁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 주원 쪽을 향해 누워, 마치 눈 안에 아로새기기라도 할 듯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봤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첫눈에 반한, 첫사랑과 같은 공간에 있게 되었다. 그 사실이 도혁의 마음을 끝도 없이 부풀게 했다. 꼭 내 걸로 만들고 말 거야.
도혁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주먹을 꽉 쥐고 맹세했다. 깊은 밤, 아주 조용한 방 안. 그렇게 선수촌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아, 목말라.
주원은 갈증 때문에 깊은 새벽잠에서 깼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거실로 나가 물을 마시고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옆 침대의 도혁을 보니, 그는 간간이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요…배.”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볼까. 주원은 살금살금 도혁의 침대 쪽으로 걸어가 침대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까이 귀를 붙이고 들으니 말소리가 제법 또렷하게 들렸다.
“…내 거예요, 선배……. 뽀뽀할 거야.”
히익.
주원은 식겁하며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도혁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 으… 으음.”
도혁은 자는 와중에도 통증을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리나 싶더니, 이내 다시금 쿨쿨 잠들었다.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주원은 잠든 도혁을 쏘아보다가 자기 침대로 돌아갔다. 몸을 옆으로 뉘자 흐릿하게 도혁의 실루엣이 보였다.
“휴…….”
내가 어떻게 네 마음을 다 헤아리겠냐마는, 이거 하나는 알겠네. 네가 날 참 좋아한다는 것. 나랑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을 원동력 삼아 국대 뽑힐 정도니.
“하지만 사절이다.”
주원은 이불을 휙 당겨 머리끝까지 덮었다. 갈증도 사라지고, 이도혁도 한 대 쥐어박은 덕분에 잠이 솔솔 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