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이튿날, 오전에는 대표팀에 새롭게 합류한 도혁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훈련장에 모인 4인방을 앞에 두고서 장광철 감독은 이번 시즌 목표를 설명했다.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마. 이제부터 너희는 진천에서 기초 훈련을 받은 다음에, 바로 호주로 전지훈련 갈 거야. 거기서 집중적으로 실력 키우고 돌아와서 5월에 베를린 펜싱 월드컵 나간다.”
“네.”
“월드컵은 올림픽 전에 마지막 실전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고 나면 숨돌릴 틈도 없이 바로 8월에 로마 올림픽이다. 개인전, 단체전 나가고 8월 말에 올림픽 끝. 그다음에는 다른 국제대회 하나 정도 더 나가고 시즌 마무리될 거야.”
“잘 알겠습니다.”
“당장 오늘부터 기초 체력 훈련 들어간다. 우리 박 코치랑 주원이가 잘 이끌어 줄 거야.”
선임 코치인 박찬진이 앞으로 나와 네 명의 선수에게 훈련 프로그램을 설명했다. 기초 체력 훈련과 순발력 훈련을 먼저 하자는 것이 그의 이야기였다.
“민석이랑 규영이가 한 팀 하고, 주원이가 막내랑 한 팀 해. 훈련 방법은 지금 시범 보여 줄 테니까 잘 봐. 여기 바닥에 한 줄로 깔아 놓은 사각형 버튼들 보이지?”
박 코치가 가리키는 곳에 보도블록보다 조금 큰 사각형 패널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전원 꽂으면 이 버튼들에 랜덤으로 불이 들어올 거야. 두 명 중에 먼저 밟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쉽게 말해 발로 하는 두더지 잡기. 하체 민첩성 기르기에는 최고지.”
박 코치가 판에 전원을 연결하며 말했다. 주원과 도혁은 판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며 준비 자세를 취했다.
“하나, 둘, 셋. 시작!”
삐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스무 개 버튼 중 하나에 불이 들어왔다. 주원은 긴 다리를 뻗어 버튼을 꽉 밟았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반대편 끝에 있는 버튼이 반짝거렸다. 주원은 날렵하게 달려가 버튼 위에 발을 올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혁도 같이 버튼을 밟았다. 둘의 가슴이 정통으로 충돌했다.
“어어.”
“선배님!”
충돌이 너무 심했던 탓에 주원이 뒤로 넘어지려는 것을 도혁이 확 끌어안았다.
“괜찮으세요?”
도혁이 주원의 뺨을 감싸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원은 도혁을 팍 밀어냈다.
“괜찮으니까 껴안지 마.”
“하지만 제가 안 붙잡았으면 선배님 넘어지셨을 텐데요.”
“넘어지게 놔둬.”
“그럴 순 없어요. 선배님 너무 소중해요. 다치시면 안 돼요.”
“…말을 말자.”
주원은 절대로 다시는 안 넘어지리라 다짐하며 독기를 장착했다. 다시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파바박, 그는 빛의 속도로 달려 버튼을 밟았다.
“어어, 너무 빨라. 선배님, 기다려요.”
“따라오지 마!”
주원은 도혁이 쫓아오기 전에 버튼을 밟으려, 도혁은 그런 그와 몸이라도 한번 스쳐 볼까 싶어 죽도록 버튼 위를 날아다녔다.
두 사람의 속도는 육상 선수를 방불케 했다. 바로 옆 공간에서 연습하는 규영, 민석 조의 두 배도 넘는 속도였다. 블록에 불이 들어오는 10여 분간 주원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도혁을 부지런히 피해 다녔다.
땀이 비처럼 흐를 정도로 훈련에 열중하는 두 사람을 보며 박찬진 코치는 박수를 쳤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아주 밝았다.
“주원이랑 도혁이 정말 열심이네. 주원이 순간 스피드 아주 좋았어. 이번에는 대련 시간이다. 피스트로 이동하자고.”
“예!”
네 사람은 연습장 벽면에 있는 피스트로 걸어가 장비를 착용했다. 칼과 마스크를 정식으로 준비한 다음에 센서가 정상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도혁과 주원은 마주 보고 섰다.
“살뤼(인사).”
심판의 말에 따라 두 사람은 칼을 들어 얼굴 앞으로 가져다 댔다.
“프레, 알레!”
챙. 허공에서 칼이 맞부딪쳤다. 주원이 한발 빨랐다.
“으아!”
1득점을 한 주원이 허공에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다음 공격은 달랐다. 도혁이 빠르게 돌진해 주원의 어깨를 친 것이다.
“이도혁 뚜슈 인정.”
1:1이 되었다. 주원은 인상을 쓰며 도혁을 노려봤다. 다음 공격은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며 전진했다. 챙. 도혁이 주원의 칼날을 막아 냈다. 그러고는 심지어 역공을 시도했다. 주원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허리를 뒤로 꺾었다.
그때, 주원이 과감하게 도혁의 가슴을 찔렀다.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채주원 득점. 2 대 1!”
다시 한 점을 벌리는 데 성공했지만, 주원은 속으로 놀랐다. 방금 도혁이 선보인 막고 찌르기 시도는 굉장히 과감하면서도 빨랐다. 그야말로 놀라운 발전이었다.
다시금 도혁이 파워풀하게 전진하며 주원의 빈틈을 노렸다. 챙. 도혁의 칼을 튕겨 낸 주원은 인정사정없이 도혁을 밀어붙였다.
그는 봐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는 태도로 상대를 피스트 끝까지 몰아갔다. 휙, 주원이 도혁의 복부 한가운데를 갈랐다.
삐이. 득점이 인정됐다.
“채주원 득점. 3 대 1!”
게임이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팽팽한 경쟁은 격렬해졌다. 주원이 한 점을 따서 도망가면 도혁이 곧바로 쫓아왔다.
현재 스코어는 14:10. 점수 차가 나기는 나지만, 분위기를 잘 타면 역전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주원은 아주 신중하게 도혁을 살폈다. 죽자 사자 달려들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한 발 빠질 생각이었다.
“프레, 알레!”
심판의 신호와 동시에 도혁이 돌진해 왔다. 주원은 전략대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엇.”
허공을 찌른 도혁이 빈틈을 보였다. 주원은 전광석화처럼 팔을 뻗어 도혁의 마스크를 때렸다.
“채주원 승! 두 선수 인사!”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도혁이 마스크를 벗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주원 역시 마스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했다.
한 게임 만에 이렇게 힘을 뺀 적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너 많이 늘었다.”
“덕분에요. 선배 만나려고 죽자 사자 연습했더니 괴력이 솟아나더라고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칭찬해 줄게. 오늘 진짜 잘했어.”
주원이 악수를 청했다. 도혁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꽉 붙잡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진짜 기분 좋네요.”
“아직 나 따라오려면 멀었어. 너무 좋아하지 마.”
“선배 따라잡으려면 아직 갈 길 먼 거 알아요.”
“알면 됐다.”
주원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다음 바우트를 준비했다. 이어진 두 바우트에서 주원은 도혁을 자근자근 밟아 주었다. 도혁은 찍소리도 못 하고 완패했다.
“아… 뜨겁게 불태웠다.”
도혁이 바닥에 대자로 널브러졌다. 오늘도 한밤중에야 훈련이 마무리되었다. 물리치료사에게 마사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도혁은 결리는 어깨를 툭툭 치며 선배들과 경기장을 나섰다. 그래도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몸이 엄청나게 피곤한 게 사실이었지만 주원과 온종일 붙어 지낸 탓에 충만했다.
“자, 내일은 아침 일찍 집합이다. 그리고 잠깐만. 들어가서 쉬기 전에 조금만 기다려라. 방송국분들 지금 막 도착하셨다고 하네.”
“방송국이요?”
숙소동으로 걷고 있던 와중, 저 멀리서 사람들이 두어 명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선수님들! <월간 펜싱>입니다!”
기자 명찰을 목에 건 남자들이 달려와 4인방과 감독, 코치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일이 악수를 나눈 다음, 그는 도혁에게 대충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월에 한 번 나오는 펜싱계의 대표 매거진, 월간 펜싱에 이번 국대들을 소개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언론 인터뷰라니, 이게 웬일인가. 도혁은 쑥스러움보다는 신기함이 컸다.
“와, 저 그럼 잡지에 나오는 거예요?”
“네. 자연스럽게 이야기 들려주시면 됩니다. 저희가 방에도 찾아뵙고 훈련 모습도 밀착 취재할 거긴 한데, 너무 부담 갖지는 말아 주세요.”
기자가 친절한 말투로 협조를 구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에 인터뷰 좀 딸 수 있을까요, 채주원 선수님?”
“네, 얼마든지 가능하죠.”
주원은 평소 펜싱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큰 사람이었다. 민석의 B로그에 자주 얼굴을 비추고 또 각종 인터뷰, 방송 촬영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어어, 저도 같이 인터뷰하면 안 돼요?”
도혁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 새로 합류하신 이도혁 선수님이죠? 막내 선수.”
“네, 저도 주원 선배님이랑 같이 인터뷰하고 싶어요.”
“주장과 막내라니 좋은 그림 나올 것 같은데요. 그럼 이렇게 두 분, 합동 인터뷰하겠습니다. 저희가 숙소 로비로 갈게요!”
기자가 크게 기뻐했다. 이렇게 적극적인 출연진은 언제나 환영의 대상이 되는 법이었다.
“잘 끼어드네.”
“한순간도 선배님이랑 떨어지기 싫어서요.”
“하여간 머리는 좋아.”
주원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늘 가는 데 실도 아니고, 아주 졸졸 따라다니는구만.
* * *
대충 씻고 나온 두 사람은 숙소 로비로 내려왔다. 기자들은 마이크와 카메라, 조명을 세팅해 놓고서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여기 중앙 소파에 앉으세요.”
주원이 먼저 자리에 앉자, 도혁은 그와 아주 가깝게 붙어 앉았다. 기자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하하, 사이가 무지하게 좋으신가 봐요. 엄청 붙어 앉으시네.”
“네, 사이 진짜 좋아요. 제일 친한 선배예요.”
주원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도혁이 먼저 대답했다. 이 상황에서 친하지 않다고 반박할 것은 아니었기에, 주원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곧 스태프가 두 사람의 가슴에 핀 마이크를 달아 주었다.
“세팅 완료됐으니까 바로 질문드릴게요. 지금 두 분은 국대 주장이자 맏형, 그리고 극적으로 팀에 합류한 막내인데요. 두 분 원래 같은 학교 선후배시죠?”
“네. 저도 선배님들처럼 K대학에서 사브르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채 선수한테 질문드릴게요. 평소에 이도혁 선수는 어떤 후배였나요?”
카메라가 주원을 향했다. 찰칵, 찰칵 셔터가 터졌다. 주원은 도혁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주 발칙한 후배죠. 겁이 없거든요.”
나름 뼈가 담긴 말이었다. 하지만 도혁은 아주 쾌활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맞습니다. 저는 겁이 없어요. 뭐든지 다 해내고자 하는 선수입니다.”
“하하, 정말 당당하고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지네요. 우리 이도혁 선수는, 국대로서 최종 목표가 뭔가요?”
“주원 선배를 넘어뜨리는 겁니다.”
뭐?
주원의 동공이 흔들렸다.